독후감 (서평) 조종영 저, “지당에 비 뿌리고-중봉 조헌과 그의 의병들-” 북랩, 2019.7
이 책은 486쪽에 달하는 중봉 조헌의 일대기(전기)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사 연구를 20여년간 연구해온 필자는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유명한 수필가인 윤승원씨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처음 소개를 받을 때에 큰 제목만 보고 수필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수필이 아니라 역사서였다.
저자 조종영은 조헌의 12대 후손이다. 그는 육군대령 출신으로 전투의 중요한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임진왜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수필가로 등단한 분이고 글의 서술이 매우 매끄러운 점은 이에 연유한다.
이 책은 4부로 되어 있다. 4부의 명칭은 문학적으로 달았으나 그 내용을 보면 제1부는 조헌이 출생한 이후 즉 1544~1581년까지의 전기, 제2부는 1582~1590년까지의 전기, 제3부는 1591~1592년의 전기라고 할 수 있고, 제4부는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술이다.
서술은 대체로 연대순에 의해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가 지은 시와 번역한 원문을 고딕체의 글씨로 인용해 쓰고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붙였다. 그리고 모든 인용 자료에는 출처를 각주로 붙였다. 역사적 전기 작품으로서 훌륭한 저서이다.
중봉 조헌은 금산에 있는 7백의총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는 내용을 궁궐 앞에 가서 도끼를 메고 가 올린 ‘지부상소’ 등은 역사학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학문에 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과 위키백과에 비교적 소상히 서술되어 일반인이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글은 단순히 독후감의 차원을 넘어서는 서평을 하고 싶다.
독후감으로 말한다면 그의 글 중 감명깊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가 임금에게 올리려고 써 놓은 글 즉 (‘起兵後 疏’351~356쪽) 중에 임진왜란 중 자기의 생명을 위해 공적 임무를 포기하고 자기 영역을 벗어나 도망친 경상감사 김수, 김해부사로 성을 버리고 탈출한 서예원, 수만명의 근왕병을 모집하여 공주에서 해산한 전라감사 이광과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등용하도록 한 중앙의 간사한 정언신 등의 목을 치라고 하는 상소문은 비록 국왕에게 올려지지 못한 것이지만 통쾌한 내용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공격할 길을 예견하고 ‘영호남비왜지책’(264쪽)을 제시한 것은 상당히 판단이 옳은 대책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조헌의 장점을 표출함에는 대단히 훌륭한 저술이다.
서평으로 간단한 비판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어느 역사적 인물을 서술함에는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비판적 견해가 거의 없다. 이는 후손이 썼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인정한다. 이 책도 소위 ‘문중사학’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임진왜란사의 의병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거의 모두 문중의 지원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칭찬과 미화, 내지는 과대포장이 비판 없이 이루어진다.
이 책에서도 조헌의 스승인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와 서인인 송강 정철 등에 대하여만 찬사를 보내고 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서인계의 문헌자료만을 주로 다루고 있어 동인계의 영남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사는 일이 혹 있지 않을까 싶다.
16세기 당대의 역사를 일생동안 깊이 있게 연구한 은봉 안방준은 포은과 중봉을 사모한 나머지 호를 은봉이라고 하였다. 조헌이 명나라 질정관으로 갔다 와서 올린 ‘동환봉사’와 ‘항의신편’을 정리하여 중봉문집의 토대를 마련한 그도 당파적 시각에 몰리고 있다. 이는 우리들이 넘어서야할 시각이다. 당파를 조장한 것은 선조였다. 현재도 아직 임진왜란을 다룸에 있어서는 당파심이 지역적으로 잔존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제1인물은 선조이다. 선조는 음흉한 군주 중 대표적인 군주였다. 물론 중봉이 사망한 후이지만 선조는 20여 차례나 양위선언을 했다. 삼정승이 이를 수용하기로 합의를 해 놓고 선조 앞에서 정철만이 주장했다가 유배를 갔다. 광해군에게 정무의 일부를 맡겼던 분조활동을 방해한 것도 선조였다. 그 양위선언을 철회하게 한 재상그룹의 아첨이 문제였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에 보고된 통신사의 보고 중 오직 김성일의 불침할 것이라는 단독 의견을 택한 것도 선조의 책임이었다. 선조는 전후 공신책봉에서 임진왜란에 싸운 사람보다는 자기를 호종한 사람을 더 많이 책봉했다. 심지어 의주에서 명나라로 탈출하려 하자 그를 따르던 네 명의 승지들이 자신들이 지고 다니던 기록을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전쟁이 나자 서울 시민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 이에 성난 군중은 경복궁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죽을 각오가 단단히 서 있던 조헌은 그런 선조를 성군으로 치켜세웠을 뿐 전혀 비판하지 못했다.
선조실록은 조선조의 실록 중 가장 부실한 것이다. 선조는 우리나라를 명나라 속국이라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중국 사람들이 이를 읽어 보고 우리를 어떻게 볼런지 두렵다. 임진왜란 전투에 대한 기사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조헌이 청주성을 탈환했으면 시민들로부터 일본군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어야 하나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또한 금산전투도 그렇다. 의승장 영규 등 여러 사람이 금산 공격을 늦출 것을 진언했지만 그는 권율과의 협공 약속 때문에 공격을 단행했다. 자신이 죽을 때와 곳을 택하여 물러서지 않은 것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부하 의병들까지도 승산없는 전투를 감행하여 모두 죽게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권율과의 사전 약속은 사람을 통해 다시 확인했어야 했다. 그는 금산전투에서 적에 대한 정보 없이 싸움에 물러설 줄 몰랐다. 그의 투쟁적인 의병정신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자기를 따르는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장수에게는 문제점이 없을가를 묻고 싶다.
더구나 요즘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젊은 학생들에게 의리를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순국정신을 본받자고 주장함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가 부하들과 작전회의를 했다는 서술도 이런 각도에서 따져볼 일이다. 자신의 선조를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중봉의 동환봉사의 내용은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반계 유형원과 북학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 실천적인 지성인이었고, 효자였으며 책을 열심히 읽고 당시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주장했음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래서 그와 연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의병에 동참했고 물러서지 않고 그를 따라 죽음을 바쳐 싸웠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선비정신은 좋은 장점을 가졌지만 그를 전혀 비판없이 미화하는 서술이 얼마나 독자들의 좋은 호응을 받을 가 의심스럽다. 역사를 사실 그대로의 재현이란 점에서는 우수한 저서이나 비판적 해석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점을 느꼈다.
저자는 관련 자료를 널리 수집한 점에서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조헌이란 인물을 사실대로 알리려 한 점에서는 성공적이고 아주 우수한 저술이라고 평하고 싶다.
첫댓글 정 박사님의 서평을 읽으며 감탄합니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 한 권을 짧은 시간에 독파하신 점도 놀랍거니와, 단순히 감상을 적은 독후감 차원이 아니라 한 평생 이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쌓으시고 학문적 연구를 해오신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심층적이면서 객관적으로 평해 주셨습니다. 제가 감히 정 박사님 서평에 댓글 한 줄 올리는 것도 조심스러우나 오늘 올려주신 서평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권위있는 전공 학자님의 해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조종영 작가에게는 감사를, 정 박사님께는 존경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정박사님의 객관적인 서평이 눈에 띕니다. 독자가 돈을 지불하고 책을 구매하여 읽는다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는(삶에 적용하겠다는) 심정일 것입니다. 읽기만 하고
쓰기(비평)를 거부한다면 이 또한 올바른 독서 방법은 아닌듯 싶습니다.
두 분 감사합니다. 이 책의 4부에 참여한 의병 160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청양 사람, 정산 사람도 나오고 있습니다. 3번의 임정식은 정산 사람, 17번의 복응길은 청양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복응실은 복지겸의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지적은 안했지만 이 책에는 오자가 몇군데 나옵니다. 부색(否塞)은 비색으로 치은(治隱)은 야은으로 등등 보입니다. 그리고 충청도 지방이 왜군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정박사님은 참으로 자상하십니다. 꼼꼼하게 살피시면서 읽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에서 몇 군데 오자 발견되어 지난 밤에 카톡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조종영 작가에게도 보내드려야겠기에 수정 요망합니다.(그리고 댓글에서 지적하신 '비색[否塞] : (운수가)꽉 막히다', 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부색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부자는 막힐비자로 읽습니다. 저의 글이 횡설수설이 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오자의 지적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색>이 맞습니다.
동조(洞照)라는 단어도 통조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자는 꿰뚫을 통지이므로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지(度地)는 탁지(度地) 또는 度支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쓰는 한자어 중엔 두 가지로 읽히고 쓰이는 한자어가 많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전문 교정팀이 필요합니다. 1차적으로는 작가가 초고부터 사전을 찾아보며 세밀히 작성해야겠지만 2차적으로는 출판사 교정 전문가의 여과 시스템이 치밀하게 작동해야합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래서 적어도 3회 이상 교정을 봅니다. 그래도 인쇄 후에 오자가 한 두개 보입니다. 부탁하신 저자의 이메일은 카톡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책의 저자소개 밑에도 저자 이메일 주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승원 ※이와 관련 책에는 잘 표기돼 있습니다만, <배천(白川)조씨>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저의 할머니가 배천조씨입니다. 학창시절 어르신들이 축문을 읽을 때 白川이라 써 놓고 배천조씨라 독축하는 것이 이상하여 찾아보았더니, <활음조 현상>에 의해 배천으로 읽는다고 하더군요. 옛날 사람들도 헷갈렸는지 전해오는 이야기에 배천군수로 발령받게 되었다고 집안 어른들께 인사하기 위해 백천군수로 간다라고 말했다가 집안 어른에게 "제가 갈 고을 이름도 제대로 못 읽다니!" 라고 혼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봉는 장수가 아니라 백면서생 선비였습니다 즉 전투 전쟁의 전문가가 아니란점. 오직 국난으로 부터 나라를 구해내야겠다는 의를위해 자발적으로 뭉친 말그대로 의병이였다는점 청주성탈환시 3000천이넘던 의병들의 수가 관의 시기 질투 모략으로 점점 줄어 700백만 남은시점에 내생명 부지하고자 후퇴했다면 아마조선은 영혼까지도 왜에 패배하는것이였을겁니다 중봉 본인은 고사하고 자신의 장손까지도 희생한 거룩한 구국의 장렬한 희생입니다 아무도 그의 잘잘못을 평해서는 안될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