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10월16일(월) 무신론 비판
Ⅱ-3. 무신론의 발전:
고대 인도의 무신론적 자유사상가 집단을 사문(沙門Shramana,쉬라마나)이라고 한다. 그들의 사상을 사문사상(Shramanism,쉬라마니즘)이라 하며 부처님 오시기 전 200~300년 사이에 인도에서 유행하였다.
⑴로카야타(Lokayata): 로카Loka는 세상 혹은 우주인데 ‘부서지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에 아야타ayata(포섭되어 들어감)을 붙여서 로카야타Lokayata, 순세외도順世外道라 한다. 로카야타는 유물론자들이다. 짜르바카Carvaka라 하기도 한다.
①세상에는 오직 물질뿐이다. 로카야타들이 보는 세상은 ‘부서질 것, 깨어질 것, 붕괴될 것, 사라질 것’들의 덩어리에 불과하였다. 유물론적이면서 허무주의적이다. 당연히 영혼이나 내생을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최상의 삶인가? 살아있을 때 최대한 즐겨라.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상의 삶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가능한 한 많은 빚을 내어 감각적 쾌락을 최대한 만족시켜라.
②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의 안정된 패턴Pattern이다. 물질은 안정화 경향이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慣性관성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정지된 물체는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정지된 채로 있다. 물질은 가장 안정된 위치나 에너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안정된 상태stable↔여기勵起상태excited
③의식(마음,정신)은 종種의 진화과정 중 어떤 시점에서 표현형적 특성으로 발생했다. 그 전엔 非存在비존재였다. 의식이란 물질로부터 생긴 것이다. 마치 발효된 누룩으로부터 술의 취醉하는 성질이 생기는 것과 같다.
(물질 → 생명 → 진화 → 표현형 → 의식)
④비물질적 영혼은 없다. 영혼이란 의식이 있는 몸(=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⑤물질 덩어리는 흩어지고, 부서지고, 남는 게 없다. → 죽음은 끝이다.
⑥문제점: 물질은 안정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식(=생명)은 즐거움 추구의 경향이 있다.
ⓐ안정화 경향과 즐거움 추구의 경향은 상반된 개념이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택한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안정을 포기할 수도 있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한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활동을 물질법칙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생명에게는 물질과는 질적으로 다른 즐거움 추구의 경향이 있다. 생명체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은 물질 활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의식활동의 결과인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로카야타는 물질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의식문제를 물질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로카야타를 극복한 새로운 사상이 요구되었다.
*참고: 수행을 하면 심신이 안정되면서도 즐거움이 따라오는 효과가 있기에 안정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게 해준다. 수행하면 선정에 들어 평안과 喜樂희락을 누리게 되므로 그러하다.
ⓒ에너지가 있는 곳에 한 무리의 원자가 안정된 패턴Pattern이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따라서 생명활동은 유물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과학의 신앙화: 옛날에는 우주의 생성소멸과 물질의 궁극적 성질에 대해 성직자나 종교인들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는데 지금은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드린다. 예를 들면 빅뱅Big Bang이론은 137억 년 전 쯤 고압, 고온, 고열로 농축된 일점의 에너지가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우주가 팽창되었다고 주장한다. 브라만 창조신이 자기 몸을 부풀려 우주를 만들어냈다는 발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빅뱅이론은 지금까지의 천문학적인 관측과 이론의 정합성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그럴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지 사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우주생성론cosmogony가운데 현재까지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은 합리적 논증도 없이, 자기의 눈과 귀로써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과학자들의 이야기라니까, 수식과 도표로 이뤄진 가설을 읽고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사실인 것으로 받아드린다. 이런 태도는 거의 사이비 종교를 신앙하는 행태와 유사하다. 이것을 과학의 신앙화라 한다.
*최근에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물질적 현상이 발견되었다.
⒜복제현상: 물질은 기본적으로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생명은 자기복제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실험실에서 물질이 자기 복제를 하는 사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물질의 자기복제 현상은 유물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기조직화 현상: 비평형 소산구조消散構造dissipative structure에서는 혼돈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질서가 생성된다는 이론인데, 현실의 사례로 증명된다. 벨기에의 통계 열역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egogine, 1917∼2003)이 발견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물질계는 기본적으로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의 화살이 날아간다. 그런데 자연현상 가운데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사례가 관찰된다. 가장 간단한 예로 <베나아르 대류(Benard Flux)>를 들 수 있다. 파이렉스 유리 커피포트에 맑은 물을 담고 열판 위에서 서서히 열을 올리면 처음에는 무질서하게 거품이 일다가 계속 온도를 올리면 어느 순간부터 무질서했던 거품은 사라지고 일정한 대류對流가 생긴다. 여러 줄로 질서 있게 아래부터 위로 뻗쳐 올라가는 물의 대류를 위에서 관찰하면 거의 정육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물거품이 계속 상승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6각형의 거품의 모양을 <베나아르 세포>라고 부른다. 한 예이지만 이와 같이 일종의 혼돈상태에서 어느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것이다. 책의 제목대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자연현상에서 시간의 화살이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물질계는 비평형, 비가역적, 비대칭적이어서 확실하게 정해진 방향이 없으며 조건에 의해서 創發창발emerge된다. 이것은 종래의 유물론으로는 설명한 수 없다.
⑵아지위카(Ajivika):영혼을 강조하는 사상.
A(명사 앞에선 강조의 의미)+Jiva(命,영혼)+ika(있다)=Ajivika, 邪命外道사명외도라 흔히 불린다. 마칼리 코살라Makhali Kosala가 아지위카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①영혼(jiva, 비물질적 정신)이 있다.
②地,水,火,風,苦,樂,命 7대 요소설
③영혼에 감정만 있다고 본다. (마음의 구성요소=감정+지성+의지(知情意))
④영혼(감정+지성)은 있는데 의지(선택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가 없다
⑤느끼지만(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걸 어찌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
⑥인생반조의 질문:
ⓐ너의 인생이 네 뜻대로 되던가? 인생을 길게 보면 결국 네가 의도한 것처럼 이루어진 게 과연 얼마나 되던가? 자유의지, 선택의지를 말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냐?
ⓑ네가 죽고 싶어서 죽느냐? 네가 늙고 싶어 늙고, 네가 병에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렸느냐? 우리에게 생노병사를 거부할 자유가 있느냐? 생노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것을 의지대로 산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아지위카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아지위카는 숙명론이다. 인간은 태어난 대로, 주어진 대로 운명을 받아드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명대로 살아가라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귀족으로 태어나 편히 살고,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산다면 불평등한 게 아니냐? 아지위카는 여기에 답한다. 한 생만 보면 불평등한 것 같지만, 영원의 눈으로 보면 운명은 평등하다. 돌고 도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너희 귀족들이 이생에 누리고 살지만 다음 생에는 노예로 떨어질 확률이 높다. 그러니 귀족인 것을 자랑 말고 덕을 베풀라. 너희 노예들이여, 이생이 고달프더라도 노여워 말라. 다음 생에는 귀족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으니 억울해 하지 말라. 한 번 높이 올라 누렸으면 다음은 떨어질 확률이 높고, 한 번 낮아져 힘들었다면 다음은 높이 올라 누릴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이런 논리는 노예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기에 당시의 노예계급에게 인기가 있었다.
*우빠카의 인연: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법을 들을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향하던 중 이지위까였던 우빠까(Upaka)를 만난다. 그는 진리에 눈 뜬 분을 눈앞에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황금 같은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데도 알지 못한다. 현생에서 다행히 불법을 만난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고 닦지 아니한다면 우빠까와 다를 게 무엇인가? 눈이 열려 있고 귀가 뚫린 자라면 부처님께 다가와 묻지 않을 수 없으리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모든 욕심과 애착에서 해탈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법을 배웠습니까?”
“스스로 깨달은 자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無等等). 홀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수행자라면 바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법을 청했어야 마땅하리라. “오, 눈 뜬 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당신의 깨달음을 가르쳐 주소서.” 그러나 자만한 우빠까는 “그럼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라는 멍청한 질문 밖에 할 수 없었다. 우빠까는 왜 부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을까? 왜 설법을 청할 줄 몰랐을까? 부처님과의 만남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흘려보낸 사람을 무연중생(無緣衆生,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고 한다. 우빠까도 그런 사람일까?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가던 길을 재촉해서 가는 우빠까의 모습은 무연중생 같이 보인다. 그런데 경전에 보면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결국 부처님에게로 다시 돌아와 그 분의 제자가 되어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옷깃을 스쳐도 오백생의 인연이 있다고 했는데, 부처님이 설법하러 가시는 길에 최초로 마주친 우빠까에게 법의 인연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⑶자이니즘(Jainism): 자이나Jaina敎라 흔히 裸形外道나형외도라 한다. 불전에 니간타Nigantha교도라고 나온다.
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의지는 100% 자유의지이어야 한다. 100% 의지는 죽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자이나교는 인간은 자유의지가 업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어, 거의 없는 것과 같으니, 업에서 해탈하기 위해서 고행(苦行타파스tapas)이 요구된다고 했다.
②해탈(목샤moksa)를 이루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탈할 수 있어야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③의지를 일으키는 마음(정신, 의식)에 대해
자이니즘 불 교
實體(不生不滅의 영속체)가 있다 실체를 인정치 않음
의지가 있는 Jiva(의식의 활동성) 정신과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上向性)
몸(물질성을 띤 푸드갈라Pudgala)
(↓下向性)
현생現生은 전생前生의 결과이다 금생今生에 잘하면 금생에도 잘 될 수 있다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업의 세력(흔적)으로 부터의 해탈 번뇌로 부터의 해탈
④Jiva+Pudgala=대립적으로 활동한다.→활동=業발생→업의 흔적과 세력이 쌓임(더껑이)→
J와 P 분리→死
⑤Jiva가 다른 Pudgala와 붙는다→대립적 활동→業발생→업의 흔적 쌓임→떨어짐=죽음
⑥지속적인 반복으로 축척된 업의 흔적에 따라 전생에서 지은 업의 세력에 따라 이생에서의 삶의 질 즉, 행복과 불행이 좌우된다. Jiva의 의지적 활동에 따라 숙명이 결정된다.
⑦업의 흔적(세력)에 어떻게 구멍을 내어 떼어낼 수 있을까? Pudgala(육체)를 괴롭히면 Jiva를 둘러싸고 있는 업의 흔적(더껑이)를 떼어낼 수 있다. 이런 작업이 고행이다.
⑧문제점 :
ⓐ이생의 모든 것이 전생의 결과라면, 고행하는 것도 전생의 숙업에 의해 결정된 것 아닌가? 고행하려는 의지도 전생의 업에 기인한 것이라면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되지 않느냐?
ⓑ영속하는 불생불멸의 영혼(Jiva)이라면 전생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무엇이었나? 는 질문에 왜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그러면서 Jiva가 불생불멸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
⑨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haputta: 자이나교의 성인 마하비라(Mahavira,혹은 Vardhamana, BC599~527, 72세)를 말한다. 그는 부처님과 동시대 인물로 30세에 출가하고, 12년간 고행하여 케발라즈냐나kevalajnana(獨存智)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불전에는 6사외도 가운데 하나인 나형외도의 지도자라고 나온다. 당시 인도에는 6파 철학이 풍미하면서 학파마다 제 각각 다른 진리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보아왔듯이 각 파가 제 나름의 진리성이 있긴 하지만 논리적 결함이 드러나게 된다. 이에 회의론이 등장한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태도가 회의론자들의 입장이다. 진리 앞에 겸허 하라. 인간이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이에 유구하게 발전해온 인도종교사상이 회의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침묵에 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 대해 자이니즘은 회의론을 일단 인정한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지만 가정적으로 주장하면 되는 것 아니냐? 는 태도이다. 마하비라는 진리에 대해 상대주의적이다. 진리를 찾는데 절대적인 길은 없다는 것과 모든 견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므로 상대적이라는 것(syadvada, 여기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 군맹무상群盲撫象라는 우화가 나왔다)을 주장했다. 가령 내생이 존재하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나는 내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생이 있다고도 해도 좋고, 없다고 해도 좋으나, 내생이 있을 확률도 50%이고 없을 확률도 50%이다. 그러면 일단 내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내생이 좋은 삶일지 나쁜 삶일지가 문제이다. 내생에서 좋은 삶을 살고 싶으면 이생에서 덕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조건부로 가정하면서 논의를 진행시킨다.
*데와닷따의 후예들: 데와닷따는 엄격한 고행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자이나교의 고행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주장한 다섯 가지 계율은 무엇인가?
①비구들은 평생토록 산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②비구들은 평생토록 걸식해야 하며 식사초대(請食)를 받으면 죄가 된다.
③비구들은 평생토록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居士衣 재가 신자가 보시한 옷)를 입으면 죄가 된다.
④비구들은 평생토록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야 하며 먹으면 죄가 된다.
⑤비구들은 평생토록 나무 아래에서 거주해야 하며 집 안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부처님은 중도적인 실용주의를 권했다. 엄격한 계율을 주장하면 몸이 약한 스님들이 따라 하기 힘들고 건강을 해칠 수 있어 해탈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개인이 원한다면 엄격한 계율을 가지는 것은 무방하지만 대중 전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부처님의 중도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다.
①비구는 원에 따라 산림에 머물러도 좋고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
②비구는 원에 따라 걸식을 해도 좋고 식사초대(請食)에 응해도 좋다.
③비구는 원에 따라 분소의를 입어도 좋고 거사의(居士衣)를 입어도 좋다.
④8개월 동안은 나무 밑에서 좌와(坐臥)함을 인정한다.
⑤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죽였다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는 먹어도 좋다. 이것을 삼정육(三淨肉 먹어도 허물이 되지 않는 세 가지 종류의 고기)이라 한다.
데와닷따가 주장한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교단이 데와닷따가 죽은 후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계속 유지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당나라 구법승이었던 현장보다 앞서 인도를 순례했던 승려 법현(法顯, CE334~420)은 5세기에 네팔 국경 근처에서 데와닷따 교단과 만난 사실을 《불국기(佛國記)》에 적고 있다. 이것을 보면 데와닷따 교단이 불멸 후 거의 일천년 동안 건재했다는 말이니, 그들은 사이비가 아니라 나름대로 다르마에 근거한 불교의 한 부파였던 것이 분명하다. CE 5세기엔 부파불교시대의 말기이며 대승불교가 발흥하기 시작하던 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