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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좌 -17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第四 菩薩品. 2. 아뇩보리 3. 광엄동자와 도량
지금부터 다섯 번째 유마경 경전 산림법회를 봉행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십시오.
큰스님께 법을 청하는 청법게를 올리겠습니다.
請法偈(청법게)
此經甚深意 大衆心渴仰 唯願大法師 廣爲衆生說
차경심심의 대중심갈앙 유원대법사 광위중생설
此經甚深意 大衆心渴仰 唯願大法師 廣爲衆生說
此經甚深意 大衆心渴仰 唯願大法師 廣爲衆生說
잠시 입정이 있겠습니다.
유마힐 소설경. 第四 菩薩品. 미륵보살의 受記 중에서 아뇩보리라고 하는 두 번째 과목을 앞서 조금 말씀드렸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최상의 깨달음. 저는 늘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을 합니다. 正智 = 바른 지혜. 또는 正覺 = 바른 깨달음. 또는 正道 = 바른 도. 이렇게도 표현을 하는 보리. 아뇩보리입니다.
2. 아뇩보리
若彌勒(약미륵)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皆亦應得(개역응득)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卽菩提相(즉보리상)이니라 若彌勒(약미륵)이
得滅度者(득멸도자)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亦當滅度(역당멸도)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諸佛(제불)이 知一切衆生(지일체중생)이
畢竟寂滅(필경적멸)하야 卽涅槃相(즉열반상)이라
不復更滅(불부갱멸)이니 是故(시고)로 彌勒(미륵)이여
無以此法(무이차법)으로 誘諸天子(유제천자)니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실무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며
亦無退者(역무퇴자)니라
彌勒(미륵)아 當令此諸天子(당영차제천자)로
捨於分別菩提之見(사어분별보리지견)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菩提者(보리자)는 不可以身得(불가이신득)이며
不可以心得(불가이심득)이라
寂滅(적멸)이 是菩提(시보리)니 滅諸相故(멸제상고)며
不觀(불관)이 是菩提(시보리)니 離諸緣故(이제연고)며
不行(불행)이 是菩提(시보리)니 無憶念故(무억념고)며
斷(단)이 是菩提(시보리)니 捨諸見故(사제견고)며
離(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諸妄想故(이제망상고)며
障(장)이 是菩提(시보리)니 障諸願故(장제원고)며
不入(불입)이 是菩提(시보리)니 無貪着故(무탐착고)며
順(순)이 是菩提(시보리)니 順於如故(순어여고)며
住(주)가 是菩提(시보리)니 住法性故(주법성고)며
至(지)가 是菩提(시보리)니 至實際故(지실제고)며
不二(불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意法故(이의법고)며
等(등)이 是菩提(시보리)니 等虛空故(등허공고)며
無爲(무위)가 是菩提(시보리)니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며
知(지)가 是菩提(시보리)니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며
不會(불회)가 是菩提(시보리)니 諸入不會故(제입불회고)며
不合(불합)이 是菩提(시보리)니 離煩惱習故(이번뇌습고)며
無處(무처)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形色故(무형색고)며
假名(가명)이 是菩提(시보리)니 名字空故(명자공고)며
如化(여화)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取捨故(무취사고)며
無亂(무난)이 是菩提(시보리)니 常自靜故(상자정고)며
善寂(선적)이 是菩提(시보리)니 性淸淨故(성청정고)며
無取(무취)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攀緣故(이반연고)며
無異(무이)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等故(제법등고)며
無比(무비)가 是菩提(시보리)가 無可喩故(무가유고)며
微妙(미묘)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제법)을
難知故(난지고)니라
世尊(세존)이시여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二百天子(이백천자)가 得無生法忍(득무생법인)일새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若彌勒(약미륵)이, 만약 미륵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진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皆亦應得(개역응득)이리니, 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수기는 깨달음을 얻어야 다음에 부처가 된다. 라고 말할 수가 있고, 그 깨달음의 실상은 미륵보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일체중생도 역시 다 얻는 일이다. 어쩌면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一切衆生도 皆亦應得. 틀림없이, 應자는 빈틈없이, 추호의 의혹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卽菩提相(즉보리상)이니라.
이것 대단한 말입니다. 일체중생 그대로가 곧 깨달음의 모습이다ㆍ일체중생 그대로가 곧 도의 모습이다ㆍ일체중생 그대로가 지혜의 모습이다. 중생을 업 많은 존재ㆍ죄 많은 존재ㆍ무슨 하나님의 종으로써, 물질보다도 정말 더 싸구려, 이런 사람에 대한 격을 비하시키는 어떤 타 종교나 또는 방편불교에서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 반해서 이 대승불교, 유마힐 거사의 최상승의 법문은 일체중생 그대로가 菩提相이다 그랬어요. 깨달음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지 부처라고 하든지ㆍ보리라고 하든지ㆍ중생이라고 하든지 변함은 없습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달리 달라진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말은 이런 말ㆍ저런 말 갖다 붙일 수가 있는데, 그러나 그 실상은 늘 그대로의 그 모습입니다. 그 대로의 그 모습에서 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잘 뜯어보면 너무너무 아주 고귀한 존재이고ㆍ더 이상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이들은 언필칭 欠少什麽(흠소심마)오? 지금 보고ㆍ듣고ㆍ느끼고ㆍ화낼 줄 알고ㆍ웃을 줄 알고ㆍ울 줄 알고ㆍ모든 것을 잘도 느끼고 있는 그 능력 그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欠少什麽오?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뭐가 부족하기에 그렇게 밖을 향해서 찾아 돌아다니느냐? 이렇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래서 이 유마경은 그 안목이 아주 고준하기 때문에 선불교, 선사 스님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의 법문에 많이 인용하고 있지요. 一切衆生이 卽菩提相이다. 이 이상 더 상승의 법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若彌勒(약미륵)이 得滅度者(득멸도자)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亦當滅度(역당멸도)니, 만약 보살이 멸도를, 제도를 얻었을 진댄 일체중생도 또한 제도를 다 얻어. 미륵이 깨달았다면 중생도 깨달았고ㆍ우리가 근본적으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 궁극적 차원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미륵이 아니라 부처님ㆍ누구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그 어떤 높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궁극적 차원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미륵이 제도를 얻었다면 일체중생도 역시 제도를 얻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 諸佛(제불)이 知一切衆生(지일체중생)이, 제불이 알고 있는 사실은 일체중생이 畢竟寂滅(필경적멸)해서 卽涅槃相(즉열반상)이라.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고 不復更滅(불부갱멸)이니, 더 이상 다시 열반할 까닭이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畢竟에 寂滅한 모습입니다. 그대로 열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시 열반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사람의 안목 여하에 따라서 그것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성인은 어떤 눈을 갖춰야 하는가? 인간을 보는 안목이 첫째 정확해야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일체생명ㆍ일체존재를 꿰뚫어 보는 그 안목이 정확해야 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고 일체생명을, 그리고 모든 존재를 잘못된 안목으로ㆍ삐뚤어진 안목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정말 제대로 된 성인이 아니다. 라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십시오. 諸佛들은 뭐라고요? 一切衆生이 畢竟에 다 寂滅입니다. 그대로 열반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열반을 얻을 까닭이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禪語錄句(선어록구)하고 말이 조금 달라서 그렇지, 뭐 거의 이런 것은 표현도
禪語錄 수준 그대로입니다.
是故(시고)로 彌勒(미륵)이여 無以此法(무이차법)으로,
이것은 此法하는 것은, 일생에 보리를 얻는. 그래서 不退轉地(불퇴전지)에 이르는 이런 이치, 그런 것 가지고서 誘諸天子(유제천자)니, 여러 천자들을 유혹하지 말라. 兜率天王(도솔천왕)과 그 眷屬(권속)들이라고 앞에 나와 있지요? (16강) 여러 도솔천왕과 그 권속들을 유혹하지 말라. 말을 하자니 편의상 미륵보살이 일생에 보리를 얻어서 더 이상 퇴전하지 아니하고 다음에 부처가 된다. 라고 하는 이런 설계를 하고는 있지만, 그런 어떤 假說(가설)가지고, 가설입니다. 유마경의 안목에서 보면 그런 것이 다 가설이거든요. 그런 假說가지고 더 이상 천자나 그 권속들을 유혹하지 말라.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실무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며,
실로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본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을 다시 더 발할 까닭이 있느냐? 기존의 불성인간.
이미 우리는 다 갖추고 있는 그 존재. 그래서 亦無退者(역무퇴자)라.
또한 더 이상 물러설 자리도 없는데 무슨 不退轉地니 뭐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 미륵보살이 올랐다느니 하는 그런 소리, 다 엉터리 소리다 이 겁니다.
彌勒(미륵)아 當令此諸天子(당영차제천자)로,
마땅히 이 천자 들로 하여금 捨於分別菩提之見(사어분별보리지견)이니,
보리를 분별하는 그런 소견들을 버리게 할지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보리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보리의 실상ㆍ깨달음의 실상ㆍ지혜의 실상을 쭉~ 이야기를 합니다.
菩提者(보리자)는, 보리라고 하는 것은 不可以身得(불가이신득)이며, 가히 몸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不可以心得(불가이심득)이라. 또한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寂滅(적멸)이 是菩提(시보리)니, 적멸이 곧 보리다. 滅諸相故(멸제상고)다. 적멸이라고 하는 것을 왜 보리라고 하느냐? 모든 현상을 다 뛰어넘은, 모든 현상을 초월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諸相을 멸하는 까닭이다.
不觀(불관)이 是菩提(시보리)여. 보지 않는 것이, 관찰하지 않는 것이 보리다. 보통 우리가 연기를 관하고, 일체 觀하는 것이, 觀法이 많찮아요. 여기는
離諸緣故(이제연고)며, 모든 인연을 다 초월한 것이다. 모든 인연을 다 떠나 있는 것이 보리다. 그랬어요. 不觀이 是菩提다.
不行(불행)이 是菩提(시보리)여. 행하지 않는 것이 보리다.
無憶念故(무억념고)며, 憶念함이 없는 까닭이다. 그랬습니다. 무엇을 듣고ㆍ기억하고ㆍ그것을 다시 사유하고ㆍ그것을 실천에 옮기고ㆍ보리라고 하는, 정말 보리라고 하는 깨달음의 그 자리에는 그런 것이 붙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不行이 是菩提다.
斷(단)이 是菩提(시보리)니, 끊는다. 고 하는 것이 보리니
捨諸見故(사제견고)며, 모든 見을 버리는 까닭이다. 보리라고 하는 그 자리에는 일체 견해를 다 버린다.
離(이)가 是菩提(시보리)니, 떠나는 것 보리니 離諸妄想故(이제망상고).
모든 망상을 떠나는 故다.
障(장)이 是菩提(시보리)니, 障이 보리니 보리에는 障諸願故(장제원고)다.
모든 원을 장애하는 연고다. 願이라는 것도 필요가 없는 자리다.
不入(불입)이 是菩提(시보리)니 無貪着故(무탐착고)다.
無貪이 없는 까닭이다.
順(순)이 是菩提(시보리)니, 순할 順자가 이 보리이니 順於故(순어여고)다.
如를 순하는 까닭이다. 여여한 그 자리를 순하기 때문에 順하는 것도 보리입니다. 장애도 보리다. 해석하기에 달렸다.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할 줄 알면, 이 세상에 천지만물 그 어느 것 하나 보리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까지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住(주)가 是菩提(시보리)니, 머무는 것이 보리니 住法性故(주법성고)며,
법성에 머무는 까닭이다. 이것을 반대로, 머물지 않는 것이 이 보리니 번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至(지)가 是菩提(시보리)니, 이르는 것이 이 보리이니
至實際故(지실제고)며, 實際에 이르는 까닭이다.
不二(불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意法故(이의법고)며, 意와 法을 떠난 까닭이다. 意와 法. 그러니까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하면, 의의 상대는 법이지요? 이 모든 것을 떠나 있는 것이 보리기 때문에 그래서 意와 法이 둘이 아니다. 또 평등할 等자.
等(등)이 是菩提(시보리)니 等虛空故(등허공고)며, 허공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無爲(무위)가 是菩提(시보리)니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며,
生ㆍ住ㆍ滅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 無爲지요.
知(지)가 是菩提(시보리)니, 안다고 하는 것이 보리니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며, 衆生의 心行을 요달 해서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不會(불회)가 是菩提(시보리)니, 모르는 것이 보리다.
諸入은 不會故(제입불회고)라. 육입은 아무 것도 몰라. 그것만으론 몰라. 그래서 不會가 이 보리다. 그랬어요. 육입은 앎이 없는 까닭이다.
不合(불합)이 是菩提(시보리)니 離煩惱習故(이번뇌습고)며,
번뇌와 습기. ←이것을 떠나있다. 번뇌 습기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不合이 보리라고 할 수가 있다.
無處(무처)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形色故(무형색고)며,
형색이 없는 까닭이다.
假名(가명)이 是菩提(시보리)니 名字空故(명자공고)며,
명자가 공한 까닭이다.
如化(여화)가, 환화와 같은 것이 是菩提(시보리)니 無取捨故(무취사고)며,
取捨가 없는 까닭이다. 환영인데 취하고 버릴 것이 없지요.
환상이고ㆍ만든 것이고ㆍ조작배기인데 그것 뭐 취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取捨가 없다 이 말입니다.
無亂(무난). 어지러움 없는 것이 是菩提(시보리)니, 이 보리이니
常自靜故(상자정고)라. 항상 스스로 고요한 까닭이다
善寂(선적). 아주ㆍ아주 고요한 것. 잘 고요한 것 是菩提(시보리)니, 그것이 보리이니 性淸淨故(성청정고)라. 성품이 본래 청정한 까닭이다.
無取(무취). 취할 것이 없는 것이 是菩提(시보리)니,
보리이니 離攀緣故(이반연고)며, 반연을 떠난 연고다.
無異(무이)가 是菩提(시보리)니, 이 보리이니 諸法等故(제법등고)며, 제법이 평등한 까닭이다. 다름이 없는 것. 그것이 보리다. 그것은 모든 법이 평등한 까닭이다.
無比(무비)가 是菩提(시보리), 이 보리이니 無可喩故(무가유고)며,
무엇에도 비유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微妙(미묘)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제법)이 難知故(난지고)니라.
알기 어려운 까닭이다. 아주 심심 미묘해서 알기 어려운 경지가 보리이기도 하다 하는 것입니다.
보리를 아주 다 각도로 설명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리를 “무엇이 보리다.” 라고 하기보다 “보리는 이런 것이기도 하고ㆍ이런 것이기도 하고ㆍ이런 것이기도 하고,” 바꾸어서 해석하면 그 해석이 더 정확해지지요. 예를 들어서 거꾸로 보리는 미묘한 것이다ㆍ보리는 무비한 것이다ㆍ보리는 무의한 것이다ㆍ보리는 무취한 것이다ㆍ보리는 선적이요ㆍ보리는 무난이요ㆍ여화요ㆍ가명이요ㆍ무처요ㆍ불합이요ㆍ불회요ㆍ지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뜻이 더욱 뜻이 선명해지리라고 봅니다.
世尊(세존)이시여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 법을 설할 때에 二百天子(이백천자)가 得無生法忍(득무생법인)일새. 200천자가 무생 법인을 얻었을 세.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그러므로 저도 그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미륵보살이 이렇게 자기의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법문이 정말 너무 화려하다가 못해서 아주 현란하다고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한 호흡에 척~~ 읽어보십시오. 중간에 설명하지 말고요. 그러면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설법이 아주 뛰어나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광엄동자와 도량 그랬어요.
이것이 도량이란 뭐냐? 도량을 이야기 하면서 불교인의 수행덕목을 여기서 낱낱이 말 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도량은 물론 우리가 지금 이 자리도 도량입니다. 그 도량의 근원은 뭡니까? 부다가야에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성도한 그 자리를 도량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보리도량ㆍ깨달음의 도량,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그 후 불교적인 어떤 일로 만들어진 어떤 장소는 무조건 전부 도량입니다. 토굴도 도량이요ㆍ중간절도 도량이요ㆍ작은 절도 도량이요ㆍ큰 절도 도량이요. 심지어 야단법석을 펴도 그것 역시 도량입니다. 왜냐?
불교는 목탁이든ㆍ죽비든ㆍ뭐가 됐든지 불교적인 이름하에 만들어진 모든 사물ㆍ모든 행사ㆍ모든 일들은, 심지어 옷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불교라고 하는 이름하에 만들어진 것은 전부 깨달음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도량에서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해서 목탁도 있고ㆍ죽비도 있고ㆍ요령도 있고ㆍ비구도 있고ㆍ비구니도 있고ㆍ청신사ㆍ청신녀 다 있는 것이지요. 불교 미술도 있고ㆍ불교 음악도 있고ㆍ일체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큰 강물을 이루고 드디어 큰 바다를 이루듯이 그렇게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불교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굽어보면 大海와 같은 것이지요. 큰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그 무엇 하나 도량 아닌 것이 없다. 왜냐? 깨달음으로 향하고 있고ㆍ깨달음을 위한 것이니까요. 목탁이고ㆍ죽비고 그 무엇 하나도, 아무리 미미한 염주하나라도, 결국은 깨달음에서 나왔고,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깨달음의 도량 아닌 것이 없다. 사찰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는 무조건 “禪佛場(선불장)” 이러지 않습니까? 禪佛場. 그리고 道場(도량). 광엄동자를 통해서 도량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또 현란한 유마거사의 명 법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광엄동자와 도량
佛告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光嚴(광엄)이 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出毘耶離大城(출비야리대성)이러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方入城(방입성)커늘 我卽爲作禮(아즉위작례)하고
而問言居士(이문언거사)여 從何所來(종하소래)닛고
答我言(답아언)하대 吾從道場來(오종도량래)니다
我問道場者(아문도량자)는 何所是(하소시)닛고
答曰直心(답왈직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虛假故(무허가고)며
發行(발행)이 是道場(시도량)이니 能辨事故(능변사고)며
深心(심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增益功德故(증익공덕고)며
菩提心(보리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錯謬故(무착류고)며
布施(보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不望報故(불망보고)며
持戒(지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得願具故(득원구고)며
忍辱(인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於諸衆生(어제중생)에
心無碍故(심무애고)며 精進(정진)이 是道場(시도량)이니
不懈怠故(불해태고)며 禪定(선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心調柔故(심조유고)며 智慧(지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現見諸法故(현견제법고)며
慈(자)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等衆生故(등중생고)며
悲(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忍疲苦故(인피고고)며
喜(희)가 是道場(시도량)이니 悅樂法故(열락법고)며
捨(사)가 是道場(시도량)이니 憎愛斷故(증애단고)며
神通(신통)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成就六通故(성취육통고)며
解脫(해탈)이 是道場(시도량)이니 能背捨故(능배사고)며
方便(방편)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敎化衆生故(교화중생)며
四攝(사섭)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攝衆生故(섭중생고)며
多聞(다문)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如聞行故(여문행고)며
伏心(복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正觀諸法故(정관제법고)며
三十七品(삼십칠품)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捨有爲法故(사유위법고)며
四諦(사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不誑世間故(불광세간고)며
緣起(연기)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明(무명)으로
乃至老死(내지노사)가 皆無盡故(개무진고)며
諸煩惱(제번뇌)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知如實故(지여실고)며
衆生(중생)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知無我故(지무아고)며
一切法(일체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知諸法空故(지제법공고)며
降魔(항마)가 是道場(시도량)이니 不傾動故(불경동고)며
三界(삼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所趣故(무소취고)며
獅子吼(사자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所畏故(무소외고)며
力無畏(역무외)와 不共法(불공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諸過故(무제과고)며 三明(삼명)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餘碍故(무여애고)며
一念(일념)에 知一切法(지일체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成就一切智故(성취일체지고)라 如是善男子(여시선남자)여
菩薩(보살)이 若應諸波羅密(약응제바라밀)하야
敎化衆生(교화중생)하면 諸有所作(제유소작)과
擧足下足(거족하족)이 當知皆從道場來(당지개종도량래)하야
住於佛法矣(주어불법의)니라 說是法時(설시법시)에
五百天人(오백천인)이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일새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佛告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하사대,
부처님이 광엄동자에게 말씀하시기를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을 하라.
光嚴(광엄)이 白佛言(백불언)하사대, 광엄이 백 불언 하시기를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세존이시여 저도 또한 그 분에게 나아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왜냐하면 기억하건데 제가 옛날 出毘耶離大城(출비야리대성)이러니,
비야리 대 성을 나오고 있었습니다.
時(시)에, 그때 維摩詰(유마힐)이 方入城(방입성).
바야흐로 성을 들어오려고 하고, 나는 성을 나가고 그러다가 마주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我卽爲作禮(아즉위작례)하고, 곧 예배를 올리고 거사에게 물어 말하되 而問言居士(이문언거사)여, 묻기를 거사여 從何所來(종하소래)닛고? 어디서부터 오십니까? 答我言(답아언)하대, 저에게 그 분이 대답하기를 吾從道場來(오종도량래)니다. 나는 도량으로부터 온다.
참~ 이렇게 불법삼매에 들어있으면, 화장실에 갔다 와도 “어디서 옵니까?” 하면 “도량에서 온다.” 이래야 됩니다. 그저 자나 깨나 도량이어야 합니다. 사실 거기 가서 화두 안 될 이유가 없고, 염불 못할 필요가 없고, 무슨 경전 한 구절 사유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 속에서 다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나는 도량에서부터 온다.”
我問道場者(아문도량자)는 何所是(하소시)닛고?
제가 또 묻기를 도량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答曰直心(답왈직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다.
하~~ 줄그어야 됩니다. 이것도 중요한 말이고 유명한 말입니다. 直心이 是道場이다. 곧은 마음이 이 도량이다. 그랬어요. 이 直心이라고 하는 말은 그 반대되는 입장들을 설명을 해야 直心이 조금 드러납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면 곧은 마음ㆍ本心대로, 이런 뜻도 됩니다. 또 어떤 데는 無諂曲(무첨곡)ㆍ不諂曲. 구부려지지 않는 것. 無虛假故(무허가고)며, 여기는 虛假라고 했잖아요. 거짓이 없는 것ㆍ조작이 없는 것ㆍ얄팍한 머리 쓰지 않는 것. “머리 굴린다.” 이러지요? 그런 것 전혀 없는 상태 그대로 곧이 곧 대로, 곧이 곧 대로의 마음ㆍ순박한 마음ㆍ순수한 마음ㆍ조금도 티가 없는 마음. 直心이 이 도량이니 헛되고 거짓됨이 없는 연고다.
發行(발행). 이것은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是道場(시도량)이다. 실천이 이 도량이다. 여기서 도량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일체 수행 덕목을 쭉~ 나열합니다. 곧은 마음이 있어야지요, 실천이 있어야지요. 能辦事故(능판사고)며, 모든 일을 판단하는 겁니다. 실천. 일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밥을 짓는 사람이라면 밥을 짓는 것이 바로 도량입니다. 發行이니까요. 실천이니까요. 그 한 가지 일을 완성시키잖아요. 辦事라고 하는 것은 일을 완성 하는 겁니다.
深心(심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깊은 마음이 이 도량이니
增益功德故(증익공덕고)며, 功德을 增益한다. 더욱더 공덕이 불어나게 한다. 우리가 경전 한 구절을 공부해도 그 마음이 얼마나 깊이ㆍ깊이 젖어드는가? 얼마나 깊이 젖어드는 마음으로 한 구절 경전을 가슴에 새기는가? 하는 데에 따라서 그 감동ㆍ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深心을 많이 강조하지요. 같은 이해의 마음이라도 깊어야 增益功德이됩니다.
功德을 增益하게 하는 겁니다.
菩提心(보리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錯謬故(무착류고)며,
錯謬가 없는 연고다. 여기서 보리심을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릇되고 잘못 됨이 없는 까닭이다. 보리심에 그런 것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布施(보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不望報故(불망보고)며,
그 과보를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면서 보시의 어떤, 보시하는데 대한 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보시를 하더라도 거기에는 조건과 어떤 이해 해주기를 바란다든지ㆍ과보를 바란다든지ㆍ이유를 내세운다든지, 이런 것이 없어야 된다. 저는 금강경 이야기할 때,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를 주로 많이 하지 않습니까? 왜 걸식을 금강경 앞에다가 등장 시켰는가? 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걸식하러 나가서 7가식을 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기껏 딱 밥 두 숟갈을 부처님한테 드립니다. 두 숟갈 이상 안 줘요. 저 태국 같은데도 걸식하는 것을 봐도 그래요. 7가식을 하니까 두 숟갈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일곱 집을 도니까, 그것도 많지요. 조금 주겠습니까? 푹푹 두 숟갈을 줘 봐요. 그것 서 너 집만 돌면 한 발우대 되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정말 부처님한테 밥 두 숟가락 주고 거기에 무슨 과보를 바랄 것이며ㆍ무슨 이유를 달 것이며ㆍ무슨 조건이 있을 것이며ㆍ우리 아들 잘되게 해달라고 기껏 밥 두 숟가락 놓고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것이 보시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無住相布施라는 것이 그런 정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걸식이 그 앞에 등장하고, 그 뒤로 끊임없이 無住相ㆍ無住相ㆍ無住相布施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런 표현을 가끔 하는데요. 여기도 布施가 是道場이니 不望報故라. 그 과보를 결코 바라지 않는 연고다. 그렇습니다. 바라지 아니하고 주면 그 공덕은 영원히 가고, 바라고 주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됩니다. 만 원을 보시해놓고 바라는 마음은 백만 원ㆍ천만 원이면 그것 얼마나 마이너스입니까?
持戒(지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得故(득원구고)다.
원을 구족한 연고다. 願具를 얻는 연고다. 그랬어요. 원을 아주 제대로 구족하게 얻는 연고다. 그러니까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뭐든지 다 잘 이루어져요.
忍辱(인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於諸衆生(어제중생)에, 모든 중생에게心無碍故(심무애고)다. 그렇지요. 정말 인욕심만 있으면 그 어떤 중생도 나에게 상처주지 않습니다. 무슨 해코지를 하더라도 나에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욕심이 없을 때, ‘아~ 저놈은 꼴 보기 싫고, 나를 늘 괴롭히고, 왜 저런 인간이 있는가?’ 싶고, 늘 내 마음에 장애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인욕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忍辱이 是道場이니 모든 중생에게 心無碍故라. 표현이 참 좋습니다.
精進(정진)이 是道場(시도량)이니 不懈怠故(불해태고)라.
精進ㆍ精進. 그렇습니다. 정진이 그대로 도량이지요. 깨달음의 도량입니다. 인욕 하나만으로도 깨달음의 도량이요ㆍ보시 하나만으로도ㆍ지계 하나만으로도...
禪定(선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心調柔故(심조유고)라.
선정이 뭡니까? 안정 아니겠어요? 일단 “선정” 하면 마음이 편안하게 아주 요지부동이 되는 것. 그래서 마음이 들뜨거나 어떤 감정에 휩쓸리거나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心調柔故라고 했지 않습니까? 아주 조화롭고 부드럽게 되는 것. 또
智慧(지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現見諸法故(현견제법고)라.
諸法을 있는 그대로, 現見이라고 하는 것은요? 그대로, 드러나는 대로 보는 것. 실상을 실상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을 現見이라고 그럽니다. 지혜가 없으면 그렇지 않지요. 달리 뭔가 거기에 다른 마음이 개입되어 가지고, 어떤 색깔을 칠해놓고 보는 것입니다. 안경을 쓰고 보게 되는 것이지요.
慈(자)가, 자비희사가 나오지요? 慈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等衆生故(등중생고)라. 중생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연고다.
悲(비). 연민심이지요?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忍疲苦故(인피고고)라. 피곤하고 괴로운 것을 잘 참아. 정말 아픈 사람ㆍ괴로운 사람ㆍ어려운 사람ㆍ힘든 사람ㆍ가난한 사람ㆍ병고에 시달리는 사람ㆍ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돌보는 마음이 이것이 연민심이라야 됩니다.
悲心이라야 됩니다. 그런데는 내가 피곤하다ㆍ힘들다ㆍ괴롭다ㆍ아이고 간병하기 힘들다. 그것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忍疲苦입니다.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잘 참는 연고다. 그것이 연민심이 있으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저 돌보고ㆍ돌보고, 자기마음이야ㆍ자기 몸이야 어떻게 망가지든 말든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겁니다. 보살심은 그런 것입니다.
喜(희)가 是道場(시도량)이니 悅樂法故(열락법고)라.
법을 즐기고 법을 기뻐하는 연고다.
捨(사)가 是道場(시도량)이니 憎愛斷故(증애단고)라.
증애가 끊어진 까닭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다 버린 까닭이다.
神通(신통)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成就六通故(성취육통고)라.
육신통을 성취한 연고다.
解脫(해탈)이 是道場(시도량)이니 能背捨故(능배사고)라.
背捨를 능히 배사하는 연고다. 背捨는 “팔 배사” 라고 해서 “팔해탈”을, 解脫을 새롭게 번역하면, 신역에는 背捨라고 번역합니다. 능히 해탈하는 연고다. 등지고 버리는 연고다. 해탈이나 뜻이 비슷하지요? 背捨 = 등지고 버린다. 벗어난다. 비슷합니다.
方便(방편)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敎化衆生故(교화중생)라.
중생들을 방편으로 교화하는 연고다.
四攝(사섭)이, 布施ㆍ愛語ㆍ利行ㆍ同事(보시 애어 이행 동사)가
是道場(시도량)이니 攝衆生故(섭중생고)라.
중생들을 포섭하는 까닭이다.
多聞(다문) = 책 읽고 법문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겁니다.
多聞이, 是道場(시도량)이니 如聞行故(여문행고)라. 들은 대로 행하는 겁니다. 백 마디 들으면 한 마디 정도는 그래도 귀에 남을 수가 있고, 천 마디 들으면 열 마디는 귀에 남으니까 하나 정도는 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如聞行故입니다. 들은 대로 행하는 연고다.
伏心(복심)이 是道場(시도량)이니 正觀諸法故(정관제법고)라.
다른 모든 존재ㆍ모든 이치를 바르게 관찰하는 연고다. 이것이 마음이 항복 돼있어야ㆍ항복된 마음이라야ㆍ제대로 된 마음이라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三十七品(삼십칠품)이 是道場(시도량)이니,
삼십칠 조도품이 이 도량이니 捨有爲法故(사유위법고)라. 유위법을 버리는 연고다.
四諦(사제). 苦集滅道(고집멸도) 사성제가 是道場(시도량)이니
不誑世間故(불광세간고)라. 세간을 속이지 않는 연고다. 그렇지요. 일단 우리가 기본적으로 苦集滅道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괴로운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 괴로운 것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하면 끊을 것인가? 끊을 것인가?ㆍ말 것인가? 이렇게 발전 된 것이 소위 사성제 이야기인데, 세간을 속이지 않는 연고다. 괴로운데 괜히 “괴롭지 않다ㆍ괴롭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緣起(연기)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明(무명)으로 乃至老死(내지노사)가,
無明→ 行(행)→ 識(식)→ 名色(명색)→ 六入(육입)→ 觸(촉)→ 受(수)→ 愛(애)→ 取(취)→ 有(유)→ 生(생)→ 老死(노사). 이것이 皆無盡故(개무진고)이라. 계속 三世의 인과로 우리가 해석을 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그것이 반복되고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모두가 다함이 없는 연고다.
諸煩惱(제번뇌)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知如實故(지여실고)다.
모든 번뇌가 도량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번뇌로써 모든 것을 이루어요. 번뇌 없으면 지혜도 불가능 합니다. 如實함을 아는 연고다.
衆生(중생)이 是道場(시도량)이니, 여기는 중생이 그대로 도량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만, 知無我故(지무아고)다. 無我임을 아는 연고다.
一切法(일체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知諸法空故(지제법공고)며,
모든 법이, 왜 일체법이 도량입니까? 아 일체 법에서 공한 줄을 아니까요.
그러니까 거기서 얼마든지 깨닫지요. 부연해서 설명하기로 하면 전부 이치에 딱ㆍ딱 맞게 되어있습니다.
降魔(항마)가 是道場(시도량)이니, 마군의 항복받는 것이 바로 도량입니다. 不傾動故(불경동고)다. 그러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다.
三界(삼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所趣故(무소취고)라.
삼계에 갈 것 없어요. 거기는 갈 바가 없는 곳이다. 도저히 갈 곳이 못 된다 이 뜻입니다.
獅子吼(사자후)가 是道場(시도량)이니 無所畏故(무소외고)라.
獅子吼 = 부처님의 설법을 獅子吼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당하지요. 깨달은 사람의 말씀은 너무나도 당당합니다. 누구에게도 전혀 꿇일 것이 없고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연고다.
力無畏(역무외) = 十力ㆍ四無所畏. 不共法(불공법) = 18불공법. 이런 들것이 모두 是道場(시도량)이니 無諸過故(무제과고)라.
그런 것을 수행하면 일체 허물을 다 떠납니다. 그래서 모든 허물이 없는 까닭이다.
三明(삼명)이 是道場(시도량)이니 無餘碍故(무여애고)다.
나머지의 장애가 없는 연고다.
一念(일념)에 知一切法(지일체법)이 是道場(시도량)이니,
일념에 일체 법을 아는 것이 이것이 다 도량이니 成就一切智故(성취일체지고)다. 일체 지혜를 성취하는 연고다. 지혜가 도대체 뭔가? 일단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지혜지요. 그런 것들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如是善男子(여시선남자)여, 이와 같이 선남자야
菩薩(보살)이 若應諸波羅密(약응제바라밀)하야,
보살이 만약에 모든 바라밀에 맞추어서, 이 “모든 바라밀” 이것이 육바라밀만 바라밀이 아니고, 도량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 법을 아는 것. 삼명ㆍ십력ㆍ사무소외ㆍ18불공법ㆍ사자후ㆍ삼계ㆍ항마마ㆍ일체법ㆍ중생ㆍ모든 번뇌ㆍ삼십칠조도품ㆍ항심ㆍ다문ㆍ방편ㆍ사섭법ㆍ ←이것이 전부 바라밀입니다. 저 언덕에 건너가는 좋은 방편입니다. 방편 아닌 것이 없습니다. 중생 그대로가 방편입니다. 번뇌 그대로가 좋은 방편입니다. 아~, 이것이 대단한 것이지요? 直心에서부터 출발을 해가지고 여기에 나열한, 말하자면
“수행하는데 있어서 일체 덕목을 다 나열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수행덕목을 여기 다 나열해 놨어요. 여기에 벗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직심이니ㆍ발행이니ㆍ심심이니ㆍ보리심이니ㆍ보시니ㆍ지계니ㆍ정진ㆍ선정ㆍ지혜ㆍ자ㆍ비ㆍ희ㆍ사, 온갖 수행덕목이 여기 다 갖춰져 있습니다.
만약에 이 모든 바라밀에 맞추어서 敎化衆生(교화중생)하면, 중생을 교화할 것 같으면 諸有所作(제유소작)과 擧足下足(거족하족)이,
모든 하는 일, 무엇이든지 이 사람이 하는 일 전부가, 그리고 擧足下足, 발을 들던지 발을 놓던지 간에 當知皆從道場來(당지개종도량래)하야,
마땅히 알아라. 모두가 도량으로부터 오는 일이고, 도량에서 머무는 일이고, 도량에서 앉고ㆍ눕고ㆍ서고ㆍ자고, 일체 行住坐臥 語黙動靜(행주좌와 어묵동정)을 도량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住於佛法矣(주어불법의)니라. 불법에 머무는 것이 되느니라. 참 정말, 설법 현란합니다. 화려하고요. 어느 경전에도, 화엄경이 한 번 법문 명제를 하나 들면 열 가지로 반복합니다만 여기는 열 가지 훨씬 넘습니다. 보통 20가지ㆍ30가지 나오고 있습니다.
說是法時(설시법시)에, 이 법을 설할 때에
五百天人(오백천인)이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일새, 500천인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을세.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지세보살과 마왕파순 여기도 온갖 그런 수행 덕목도 많이 소개되고 좋은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마왕파순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과연 마왕파순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댓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