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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와 해외의 무장독립투쟁 - 총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준위은채 휘좌단두)
이인영(이준영)·허위·이은찬·채응언과, 이동휘·김좌진·신채호·김두봉이다.
竣(마칠 준) 蔿(애기풀 위) 殷(은나라 은) 蔡(성 채)
輝(빛날 휘) 佐(도울 좌) 丹(붉을 단) 枓(두공 두)
'竣蔿殷蔡(준위은채)'는 을사늑약과 강제합방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 정책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의병장인 이인영(李麟榮)·허위(許蔿)·이은찬(李殷瓚)·채응언(蔡應彦)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인영은 이준영(李竣榮)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이 시기의 의병 항쟁은 크게 세 가지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발생했습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조선 침략의 선봉대 역할을 한 일본의 낭인 지식인들의 칼날 앞에 처참하게 살육당하고 뒤이어 11월 15일 일본과 결탁한 친일 내각이 단발령을 발표하자, 전국 각지에서 복수보형(復讐保形 : 명성 황후에 대해 복수하고 형체를 보존한다)의 기치를 앞세운 '반일본 반단발령'의 의병운동이 불붙듯 일어났습니다. 이 제1차 의병운동은 고종 황제가 일본의 위협을 피해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1896년) 후, 발표한 '의병 해산과 관군 소환령'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이인영은 의병장 유인석·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허위는 경북 김천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습니다.
제2차 의병 항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일본군에 맞서 일어난 의병 운동입니다. 당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용감하게 맞선 의병들은 유생(儒生)과 농민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참판 벼슬까지 지낸 민종식(閔宗植)이 지휘한 의병부대와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최익현이 이끈 호남 의병부대 그리고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린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등이 이때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표적인 의병들이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1907년을 기점으로 일어난 제3차 의병 항쟁은, 이전의 의병들보다 훨씬 대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강제 해산당한 병사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무기와 전술 능력이 한층 강화되었고, 또한 의병의 참여 범위도 유생과 농민에서 군인, 노동자, 도시 빈민, 승려, 포수 등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의병 항쟁이 일어난 지역도 북쪽으로는 함남 갑산에서부터 남쪽의 경북 영천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있었습니다. 가히 일본에 대항하는 전면적인 '인민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의병 항쟁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무기와 전술 등에서 전력이 한층 강화되자, 각 지역의 의병장들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서울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는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드디어 1907년 11월경 전국의 의병장들이 이끄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의병부대가 경기도 양주에 모여 '13도 창의군'이라는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합니다. 당시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 되고, 허위는 군사장을 맡았으며, 이은찬은 이인영 부대의 중군(中軍)을 지휘했습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의 선봉장이 된 허위는 의병부대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이미 의병의 서울 진격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퇴합니다. 더욱이 부친상을 당한 총대장 이인영이 효도(孝道)가 충의(忠義)보다 앞선다는 유학의 명분(?)을 내세워 의병부대에 대해 해산을 지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후방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해, 허위의 선봉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동대문에서 청량리 교차로에 이르는 거리를 '왕산로(旺山路)'라고 부르는데, 이 거리의 명칭은 허위의 서울 진격을 기념하여 그의 호(號)인 왕산(旺山)을 딴 것입니다.
여하튼 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각 지역의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대규모 전면전이 결정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게릴라전(유격전)으로 형태를 바꾸어 항쟁을 계속해 나갑니다.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로 있다가 군대 해산과 동시에 의병 항쟁에 참여한 채응언은 평안도·함경도 일대에서 게릴라전(유격전)을 통해 일본 경찰과 헌병부대를 괴롭히며 수많은 전과를 올린 인물입니다. 그는 강제합방 이후인 1913년까지 황해도 일대 일본 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공격해 타격을 가하는 등 격렬한 항일 의병투쟁을 벌였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일신의 편안과 목숨까지 내던진 이들 의병장들의 운명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최후는 조선의 운명만큼이나 비극적이었습니다.
이인영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09년 경성감옥에서 처형당했고, 허위 역시 경기도 영평에서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된 후 1908년 사형을 당했으며, 이은찬은 조선인 밀정의 음모로 간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910년 강제합방 이후에도 의병 항쟁을 놓지 않았던 채응언은 1915년 전투 도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일본 낭인 지식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 본격화한 의병 항쟁은 한반도 이남지역을 중심 무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제합방 직전인 1909년 일본은 소위 '남한 대토벌'이라는 군사 작전을 개시해 의병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렇듯 일본군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으로 인해 한반도 이남 지역의 의병 부대는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더욱이 강제합방 이후 일본은 경찰·헌병·군대를 총동원한 무단감시통치체제를 세우고, 산간 오지에까지 헌병 분견소를 설치하고 순사들을 파견하여 일본에 대한 어떤 저항과 불만도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억눌렀습니다.
또한 재향군인회·일본 거류민단·소방서 등과 같은 보조 감시통치기구를 각 지역마다 만들어 조선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았습니다. 이렇듯 일본 군·경과 민간 통치기구에 의한 무차별적인 탄압과 감시가 자리를 잡아나가자, 국내에서의 항일 운동과 무력 투쟁은 더욱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항일 조직은 점차 비밀 결사체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무력 투쟁은 상대적으로 일본 군·경의 감시와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한반도 북부 및 간도와 연해주 지역으로 그 중심 무대를 옮겨가게 됩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아직 간도와 연해주 지역까지 일본군의 마수가 뻗치지 못했기 때문에, 무장 투쟁을 항일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항일 인사와 의병들이 대거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輝佐丹枓(휘좌단두)'는 당시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끈 이동휘(李東輝)·김좌진(金佐鎭)·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김두봉(金枓奉)을 이르는 말입니다.
1899년 한양에서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령(參領 : 지금의 소령 계급에 해당)을 지낸 이동휘는 개화운동에도 참여한 개화파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던 중,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봉기를 계획하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도움으로 풀려난 이동휘는 함경도 일대를 돌면서 교육 계몽과 학교 설립에 힘을 쏟았습니다.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신민회 내부의 강경파로 '항일 투쟁'을 부르짖었습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망명해, 만주 일대에 사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해 일본과의 무력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신채호와 손잡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광복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곳은 독립군이 사용하는 각종 무기를 공급하는 전략적 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띠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설립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血戰)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총장, 국무총리의 요직을 지냈으나 좌파적 성향이 강해 민족주의 우파인 이승만·안창호와 대립했으며, 이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문제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 후 항일 독립투쟁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1935년 머나 먼 타지인 시베리아에서 병사(病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맹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김좌진(金佐鎭)은 안동 김씨 명문가의 자손으로 15살 때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킬 정도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17살(1905년) 때 한양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기울어가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고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신념을 다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군자금을 모집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되고,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비밀 항일결사조직인 광복단(光復團)에서 활동하기도 한 김좌진은 1918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갑니다. 이곳에서 김좌진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정의단을 기반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본거지를 확보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그는 군정부를 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합니다. 북로군정서에서 총사령관을 맡은 김좌진은 청년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훈련과 병사들에 대한 군사훈련 및 무기입수에 힘쓰는 한편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습니다. 1920년 당시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는 총병력 1,600여 명에 기관총 7문과 소총으로 중무장한 최정예 독립부대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치밀한 작전 계획으로 김좌진과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일본군 1만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3,3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청산리 전투'입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저자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독특한 역사관을 제시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단재 신채호는 일본 제국주의와의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혁명가의 삶을 산 인물입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반일 논설을 쓰기 시작했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우리 역사 속의 영웅적 인물과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여러 논문을 발표해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907년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든 신채호는 1910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중국 망명 이후 신채호는 우리 고대사의 중심무대였던 남만주·북만주·연해주 그리고 백두산을 두루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의 자주성과 독립관을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 그는 한때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다가,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간 후부터는 비밀 항일운동조직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고 지휘했습니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는 무정부주의 사상을 신봉하기 시작해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론을 주창하기도 하고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독립 활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타이완으로 가다가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복역하는 도중, 신채호는 우리 역사서에 한 획을 그은 책인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옥사(獄死)하기까지,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며 가출옥을 거부하고 또 일본 제국주의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며 빳빳이 선 채 세수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김두봉(金枓奉)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조선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좌파 세력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3·1운동 이전까지 한글학자로 이름을 알린 김두봉은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던 그는 평생을 좌파와 우파 혹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는 일에 몸을 바쳤습니다. 1935년에 중국 난징(南京)에서 한국독립당·조선의열단·미주대한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 등 5개 정당과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민족통일전선 정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나 1942년 중국 화북(華北)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 및 독립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인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은 반일 무력 투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김두봉은 민족혁명당에서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여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중책을 맡았고,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실질적인 책임자인 주석(主席)직에 올라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에 나서도록 앞장서 싸웠습니다. 김두봉은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 남아 조선신민당을 조직해 민족통일전선의 신념을 펼치려고 했으나, 극심한 좌·우 대립과 남북 대결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1958년 조선노동당에서 제명당하고, 3년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81 松江歌辭 燕巖稗官 송강가사 연암패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과, 연암 박지원의 패관문학이 있다.
松(소나무 송) 江(강 강) 歌(노래 가) 辭(말씀 사)
燕(제비 연) 巖(바위 암) 稗(피 패) 官(벼슬 관)
82 豪宅班村 貧家木覓 호택반촌 빈가목멱
권세가의 호화주택은 반촌(班村)에 있고, 가난한 선비의 집은 목멱(木覓)에 있다.
豪(호걸 호) 宅(집 택) 班(나눌 반) 村(마을 촌)
貧(가난할 빈) 家(집 가) 木(나무 목) 覓(찾을 멱)
83 龜浚醫寶 每銓魚譜 구준의보 매전어보
구암 허준은 동의보감을, 매심재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지었다.
龜(거북 구) 浚(깊을 준) 醫(의원 의) 寶(보배 보)
每(매양 매) 銓(저울질할 전) 魚(물고기 어) 譜(족보 보)
84 北進孝宗 南伐從茂 북진효종 남벌종무
효종은 북쪽 대륙으로 나아가고자 했고, 이종무는 남쪽 해상을 정벌했다.
北(북녘 북) 進(나아갈 진) 孝(효도 효) 宗(마루 종)
南(남녘 남) 伐(칠 벌) 從(좇을 종) 茂(무성할 무)
85 性理尤烈 陽明齊斗 성리우열 양명제두
성리학의 우암 송시열이요, 양명학의 하곡 정제두이다.
性(성품 성) 理(다스릴 리) 尤(더욱 우) 烈(매울 렬)
陽(볕 양) 明(밝을 명) 齊(가지런할 제) 斗(말 두)
86 再記宣顯 西黨改故 재기선현 서당개고
선조와 현종실록을 다시 쓴 것은, 서인(西人) 당파가 옛일을 고친 것이다.
再(다시 재) 記(기록할 기) 宣(베풀 선) 顯(나타날 현)
西(서녘 서) 黨(무리 당) 改(고칠 개) 故(옛일 고)
87 尹鑴獨解 貶斥亂賊 윤휴독해 폄척난적
윤휴가 주자학의 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하자, 유학을 어지럽힌 도적이라고 하여 벼슬을 깎아 내리고 내쫓았다.
尹(성 윤) 鑴(솥 휴) 獨(홀로 독) 解(풀 해)
貶(낮출 폄) 斥(물리칠 척) 亂(어지러울 란) 賊(도둑 적)
88 楚姬閨怨 允摯遺稿 초희규원 윤지유고
허난설헌의 규원가와, 임윤지당의 윤지당유고가 있다.
楚(초나라 초) 姬(계집 희) 閨(안방 규) 怨(원망할 원)
允(맏 윤) 摯(잡을 지) 遺(남길 유) 稿(볏짚 고)
89 抄啓文臣 辛亥通共 초계문신 신해통공
젊은 문신들을 국왕에게 보고하고, 신해년에는 상업의 자유를 허용했다.抄(뽑을 초) 啓(열 계) 文(글월 문) 臣(신하 신)
辛(매울 신) 亥(돼지 해) 通(통할 통) 共(한 가지 공)
90 轆轤滑輪 蒼甕雉臺 녹로활륜 창옹치대
녹로와 거중기의 활륜(滑輪 : 도르래)이요, 창룡문의 옹성과 치성·장대가 있다.
轆(도르래 녹) 轤(도르래 로) 滑(미끄러울 활) 輪(바퀴 륜)
蒼(푸를 창) 甕(독 옹) 雉(꿩 치) 臺(대 대)
91 勢道閥閱 安東豊壤 세도벌열 안동풍양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양반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이다.
勢(형세 세) 道(길 도) 閥(문벌 벌) 閱(검열할 열)
安(편안 안) 東(동녘 동) 豊(풍성할 풍) 壤(땅 양)
92 出仕逸蔭 試驗兩職 출사일음 시험양직
벼슬길에는 유일(遺逸)과 문음(門蔭)이 있고, 과거시험에는 문반직(文班職)과 무반직(武班職)이 있다.
出(날 출) 仕(섬길 사) 逸(편안할 일) 蔭(그늘 음)
試(시험 시) 驗(시험 험) 兩(두 량) 職(직분 직)
93 彌勒濟世 鄭鑑救民 미륵제세 정감구민
미륵불은 세상을 구제하고, 정감록의 진인은 백성을 구원한다.
彌(미륵 미) 勒(굴레 륵) 濟(건널 제) 世(인간 세)
鄭(나라 정) 鑑(거울 감) 救(구원할 구) 民(백성 민)
94 紀編綱目 燃藜室述 기편강목 연려실술
기전체·편년체·강목체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있다.
紀(벼리 기) 編(엮을 편) 綱(벼리 강) 目(눈 목)
燃(탈 연) 藜(명아주 려) 室(집 실) 述(펼 술)
95 數錫算夏 寃鏡奎兼 수석산하 원경규겸
수학의 최석정과 산학의 홍정하요, 무원록의 최치운·구택규·구윤명이다.
數(셈 수) 錫(주석 석) 算(셈 산) 夏(여름 하)
寃(원통할 원) 鏡(거울 경) 奎(별 규) 兼(겸할 겸)
96 謙齋敾景 蕙園風俗 겸재선경 혜원풍속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이다.
謙(겸손할 겸) 齋(재계할 재) 敾(글 잘 쓸 선) 景(볕 경)
蕙(풀 이름 혜) 園(동산 원) 風(바람 풍) 俗(풍속 속)
97 譯貿蓄財 彦卞炫禎 역무축재 언변현정
역관무역으로 재산을 모으니, 홍순언·변승업·장현·현상정이다.
譯(번역할 역) 貿(바꿀 무) 蓄(모을 축) 財(재물 재)
彦(선비 언) 卞(성 변) 炫(밝을 현) 禎(상서로울 정)
98 巨商稼圃 甲富鑛昌 거상가포 갑부광창
큰 상인은 임상옥이요, 큰 부자는 금광왕 최창학이다.
巨(클 거) 商(장사 상) 稼(심을 가) 圃(채마밭 포)
甲(갑옷 갑) 富(부자 부) 鑛(쇳돌 광) 昌(창성할 창)
99 鐘閣市廛 梨牌樓賈 종각시전 이패누고
종각의 시전이요, 이현·칠패·누원의 사상도고이다.
鐘(쇠북 종) 閣(집 각) 市(저자 시) 廛(가게 전)
梨(배나무 이) 牌(패 패) 樓(다락 루) 賈(장사 고)
100 源波內津 客兒褓負 원파내진 객아보부
덕원 원산장·봉산 은파장·안성 읍내장·은진 강경장이요, 객주와 중도아 그리고 보부상이다.
源(근원 원) 波(물결 파) 內(안 내) 津(나루 진)
客(손 객) 兒(아이 아) 褓(포대기 보) 負(질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