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8>>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1. 시작하는 말
사도행전 20:28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인들은 줄기찬 핍박과 박해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사신 존재가 아닌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주님께 속했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의 핍박과 조롱을 이겨 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못한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야고보 4:4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빌 3:18에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 사이의 소송에 대한 교훈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사도를 비롯한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순종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교인들은 세상의 법과는 비교될 수 없는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사랑할 능력까지 받았으면서 세상의 법원에 제소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주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교인이, 믿지 않는 불의한 자들 사이에서 정의를 구하는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레트(C. K. Barrett)는 하나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짓이라고 주석했습니다. 벤겔(J. A. Bengel)은 “모욕을 당한 그리스도인의 위엄이 장엄한 말로 표현되었다.”라고 주석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안 믿는 사람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인격이나 도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안 믿는 고린도인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쟁과 비난과 시기와 음행 등을 하면서도, 오히려 세상 지혜와 말재주 등을 자랑했습니다. 또, 바울 자신이 세상 법정의 보호를 받은 적이 있고, 가이사에게 항소한 적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세상의 법 집행자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종교적인 의미이었습니다. 즉, 불의한 자란 안 믿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핫지(C. Hodge)는 “거룩한 자와 의로운 자라는 용어들이 인격적인 특성에 대한 언급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기 위한 술어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죄인과 불의한 자라는 용어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되는 이방인을 지칭하기 위한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자들이었고, 이방인들은 불의한 자들이었다. 비록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훨씬 나았을지라도 그러하다(참조: 갈 2:15).……이방인들이 단지 이방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불의한 자나 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성경에 따르면, 참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가장 큰 불의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교인 곧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이고, 반면에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불의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취지는 세상 법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형제들 사이에 생긴 문제는 어디까지나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세상 법정에 제소함으로써 교회의 위신과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의 영적 무지에 대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라고 탄식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에 입회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동료 교인들 사이의 지극히 작은 일조차도 판단하지 못해서 세상 법정에 제소까지 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인의 신분과 처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영적 존재인 타락한 천사나 악한 천사까지 판단할 것인데, 하물며 세상 일 같은 것을 판단 못해서 세상 법정에 제소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종교계나 자기 신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위 고위층이요 지도층이면 정당치 못한 돈을 먹거나, 아부와 아첨이나 음란한 짓으로 자기를 더럽히거나 망가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직자라면 벼슬이나 돈이나 이성을 탐하는 것이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요, 망가뜨리는 것이요, 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임을 알고 삼가 조심해야만 합니다. 성직자의 처신이란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1600년 9월 15일, 천하를 움켜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상인인 요다야 죠안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보답하고 싶은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시다 미쓰나리와 천하를 건 그 날의 전투에서 죠안은 이에야스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몇 번을 사양하던 조안은 거듭된 이에야스의 청에 대답했습니다. “들판에 널려 있는 시체를 치울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이 뜻밖의 대답에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체 때문에 악취와 전염병을 우려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들판의 시체들은 이내 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죠안은 거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자초지종을 보고 받은 이에야스는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역시, 오사카 장사꾼이다.” ‘상인에게 공짜는 없다.’는 신조를 지닌 죠안은 들판에 널려 있던 투구와 갑옷, 칼과 창을 모조리 수거해 팔아서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문병하 목사)
자기 신분을 알고 합당하게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발전하고, 평화로워지는 겁니다. 공산주의 통치자들로 인해 자국민이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수백만에서 수천만 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교인 곧 그리스도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대속 제물이 되신 존재가 아닙니까? 말 그대로 유일한 창조주이시자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 예수님은 영광스럽게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까? 교인이라면 대통령이 되든지 장관이 되든지 상인이 되든지 간에 ‘역시 예수쟁이다!'라는 평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고린도 교인이 소금과 빛의 혜택을 받아야 할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불의한 자인 안 믿는 재판관을 세우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나타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소송 당사자는 물론, 중재하지 못한 교인들로 수치심을 갖게 함으로써 깨닫게 하려고 한 충격 요법입니다. 지혜를 자랑하여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판단한 고린도 교인들 중에 형제 사이의 작은 일을 처리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어서 법정에까지 제소한 일을 핀잔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떤 이해관계 때문에 소송했다는 점입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세상 법정에 제소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가렸고, 또 교회의 품위를 떨어뜨렸고, 전도의 문을 막았습니다.
믿는 사람 사이의 소송의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사이에 소송을 한다는 그 자체, 그것도 세상 법정에 제소한 그 자체가 이미 양쪽 모두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표준에서 볼 때, 송사를 통해 자기 의를 인정받고, 믿음의 형제는 형벌을 받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 자기의 진실을 인정받고, 믿음의 형제는 형벌을 받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속고 마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행하고 속였습니다.
3. 맺음말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남을 사랑할 능력까지 받았으면서, 교인간의 문제로 불의한 자들의 법원에 제소하는 것은 경악할 일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분을 바로 알고,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교인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의 재판정에 입회할 것입니다. 또한, 타락한 천사들까지도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간의 하찮은 세상적인 일로 안 믿는 사람의 법정에 제소하는 것은 망신스런 일입니다. 재판에 누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이미 양쪽 다 패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형제 사이라면 불의를 행하거나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