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울타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솔향 남상선 / 수필가
지난 5월 중순에 한국효문화진흥원 봉사활동을 마치고 퇴근을 했다. 웬일인지 저녁식사 무렵부터 속이 메스껍더니 복통이 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증을 더해가는 것이 식은땀까지 나게 했다. 전에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 갔을 때 산통(産痛)보다 더 아픈 바로 그 요로결석증 통증임에 틀림없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부랴부랴 서둘러 목동 선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서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다음날 각종 검사를 받고 입원을 했다. 의사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 요로결석증도 급하지만 전립선에 문제가 있으니 조직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 했다.
대전에 사는 딸과 서울에 있는 아들이 놀라 뛰어왔다. 학교 출근도 못한 채 연가를 내고 부랴부랴 뛰어 온 것이었다. 1주일 내내 딸이, 출근 전에도, 퇴근 후에도 다녀갔다. 대견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드디어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날이 왔다. 서울 사는 아들, 대전 있는 딸이 초조한 낯빛으로 곁에 서 있었다. 무슨 선고라도 받는 듯한, 긴장한 순간이었다. 곁에 있는 자식들이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들딸이 울타리 같아 적이나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입을 얼었다. 중형선고를 받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 psa 수치가 235, 전립선 암 4기이지만 전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
필경 혹시나 했던 마음이 무너졌다. 안색이 변했다. 고개를 떨궜다. 흘낏 보니 자식들이 한숨만 쉬고 있었다. 낯빛이 사색이 된 채 어떤 말도 잊은 듯 했다.
낯빛이 안 좋은 자식들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한 마디 했다.
< 이 아비도 암 4기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처음은 낙심을 했다. 하지만 전립선암은 타 암과는 달라 수술 후 예후도 좋고, 착한 암이라 들었다. 이 아비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다. 나 이 병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해오던 모든 활동 정상으로 할 거다. 복통으로 응급실 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전립선암을 전이가 안 된 상황에서 알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너희들도 한숨만 쉬지 말고 힘내어라. >
아비의 말에 안심이 됐는지 애들의 한숨이 그쳤다. 안색까지 밝아졌다. 남매가 하는 말이 < 서울 큰 병원 가야 한다.>며 인터넷 검색에 바빴다. 천우신조인지 아산병원에 예약이 되었다. 전립선암에 1인자인 안한종 선생님 진료를 받게 된 것이었다. 날짜까지 8일 째로 잡혔으니 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정해진 날짜에 내원하여 진료를 받았다. 혼자 병원에 다녔더라면 서울 지리에 어두워 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게다가 복잡한 병원구조 건물 속에서 어지간히 더듬벅거리고 힘들었을 것이다.
‘ 자식의 울타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
대전서 서울까지 그 먼 병원 오고갈 때는 아들딸이 함께 했다. 진료 받을 때마다 곁에는 아들딸이 늘 그림자로 와 있었다. 여러 번 내는 연가에 학교장이나 교감, 동료교사들의 눈치도 봤을 것이다. 자식이지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려서는 남매가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사이좋게 이 아비한테 효도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마냥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검사를 받는 곳마다,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받을 때마다 내 곁에는 믿음직한 울타리가 있었다. 곁을 지키는 남매 울타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순간이 오버랩 되어 날 울리고 있었다.
결혼 4년 만에 낳은 아들이 가져다 준 농장지경(弄璋之慶 :아들 낳은 즐거움)으로 아내와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이 꼬마 6살 때, 세발자전거 타고 놀던 모습도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오지 않아 유괴당한 줄 알고 신고한 일도 생각났다. 실종신고로 대동 동사무소가 확성기 방송을 했다.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들 서울대학 합격소식으로 아내와 밥 먹다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아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 담임선생님 앞에 서울대합격증을 놓고 큰절을 시키던 모습도 보였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을 가르치기 위해 아들과 함께 선영에 갔다. 상석 위에 서울대합격증을 놓았다. 조상님께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모두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또 딸의 어렸을 때 모습이 살아났다. 대전 강재화산부인과에서 낳았을 때 숨이 고르지 못하고, 호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애를 태웠다. 원장님이 < 아기에겐 인큐베이터가 필요한데 그게 없다. >고 했다. 다급한 생각에 고3때 내반 학부형이었던 방소아과 원장님을 찾아갔다. 덕분에 딸이 위기에서 살아났다.
말하자면 딸애의 생명의 은인이 방소아과 원장님인 셈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계제가 될 때마다 < 우리 보라가 시집가기 전에 생명의 은인, 방소아과 원장님을 꼭 찾아뵈어야 하는데 ... > 하며 되뇌는 말을 종종 했다.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에 은행동 천변에 있는 방소아과를 찾았다. 하지만 이사로 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몇 년째 수소문으로 사시는 곳을 알아냈다. 날짜를 잡아 딸을 데리고 방원장님을 찾아뵈었다. 승용차 트렁크 속에는 처가에서 주신 참깨 1되, 숙모님이 주신 검정콩 1말, 마늘 1접, 옆에는 딸애가 실을 사다가 뜨개질로 만든 장갑 한 켤레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딸 생명의 은인을 찾아뵙는 게 왜 이리 좋은지 몰랐다. 원장님 내외분은 무척 좋아하셨다.
이렇게 자란 아들과 딸이 암 환자인 나를 지키고 있다. 아니, 울타리가 되어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고 있다.
나의 든든한 울타리 나의 분신이여 !
너희 남매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땐
농장지경으로, 농와지경으로 첫 기쁨을 주더니
이제 철들은 나이엔 울타리가 되어 날 든든하게 하는구나.
금쪽같은 내 새끼 두 남매야,
같은 엄마 젖 먹고 자란 것을 생각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따듯한 가슴으로 살아라.
내 울타리가 돼 준 것처럼 빈자들한테도 따뜻한 장갑이 되어라.
영민아, 보라야 !
많이 고맙다. 너무 든든하다. 하늘땅땅만큼 사랑한다.
‘ 자식의 울타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
첫댓글 효성스런 자녀분들의
아빠에대한 사랑이 갸륵하고 포근합니다,
걱정하고 사랑하는 자녀분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 힘을내십시오,
선생님께선 반드시 건강을 회복 하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선 누구보다 강하시니까요,
선생님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