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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대바빌론이 무너졌다는 천사의 소리와 하느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는 징벌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8,1-2.21-23; 19,1-3.9ㄱㄴ
나 요한은 1 큰 권한을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졌습니다.
2 그가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1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22 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23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상인들이 땅의 세력가였기 때문이며
모든 민족들이 너의 마술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19,1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2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
3 그들이 또 말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묵시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으며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는 억압의 굴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슬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믿음 안에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한 이들은 이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말로 표현하십니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심판과 벌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다랐을 때,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파괴될 것이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완성과 구원의 날,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파괴와 징벌의 날이 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역사의 끝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누구에게는 조금 이르게 올 수도, 누구에게는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죽음으로 맞는 마지막 날이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면 그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의술의 발달로 인해 임사 체험자, 근사 체험자, 죽음 유사 체험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때가 되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해 맥박이 그치고 숨이 멎는 순간, 의료진들이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로 들어섰는데, 유능한 의료진으로 인해 심폐소생술이 성공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많은 임사 체험자들이 죽음 이후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체외 이탈을 해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먼저 떠난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났답니다.
세상 강렬하고 환한 빛의 통로를 본답니다. 아마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크신 분의 현존을 느낀답니다. 그분이 마중나와 계셨답니다. 그분을 뵙는 순간 그간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상처와 두려움, 고통과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답니다.
그래서 임사 체험자들은 하나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고.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다리요 통로라고.
요즘 예수님께서는 계속 종말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공포스런 분위기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까무러칠 것이겠지만,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신앙인들을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7-28)
보십시오. 평생 주님 안에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날은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황공스럽게도 몸소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실 주님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각자 개인의 죽음은 개인 차원에서의 또 다른 종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울며 슬퍼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는 순간이며, 그분 나라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언은 모호하게 쓰였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 세계에서 프리 크라임이라는 혁신적인 범죄 예방 시스템을 채택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시스템은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할 수 있는 프리코그(Precogs)로 알려진 세 명의 심령술사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가끔 헤로인에 찌든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예지능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전을 통해 경찰은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잠재적 범죄자를 체포하여 도시에서 살인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프리 크라임 경찰 반장인 앤더튼은 이 시스템을 확고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예언에 따르면 그가 36시간 이내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충격을 받고 자신이 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앤더튼은 도망자가 되어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속한 프리 크라임 팀의 체포를 피하면서 앤더튼은 시스템의 무오류성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는 프리 크라임의 창시자인 이리스 박사로부터 시스템이 때때로 지배적인 예측과 다른 결과를 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앤더튼도 그러한 오류를 발견함으로써 모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권의 보호를 위해 더 많은 범죄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고한 죄인이 벌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프리 크라임 팀은 이 오류를 깊이 숨기고 있었고 그 책임자인 버제스에 의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앤더튼이 제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앤더튼은 자유 의지로 예언되어 있던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요나에 의해 한 달 뒤 멸망하기로 되어 있던 니네베가 멸망하지 않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십니다. 만약 예언이 명확하면 그것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생깁니다. 버제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디나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사람들의 재산 등을 가로챘던 사이비 교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왜 예언은 모호한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예언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채널에 보니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적이 없다’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 지구 멸망의 이야기는 예언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이사야 7,14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 합니다. 미카 예언서 5,1에서는 그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분명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 수백 년 전에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예언은 모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처한 남 유다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씀 안에서 나온 예언들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악한 이들에게 명확한 사실로 인지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많은 이들을 미혹하게 될 것입니다. 악한 이들은 아무리 좋은 것도 악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예언이 온전하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는 교회나 성령 충만한 이들의 해석에 의해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악인들 가운데 보내며 이렇게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9-10)
악인들이 예언을 듣고 깨치면 큰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헤로데를 방문했을 때 헤로데는 예언을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렇게 도움을 받았지만, 헤로데는 그 지식으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예언을 악인들에게 해석해 주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언제 세상이 멸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명확한 표징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이방인들의 시대가 있을 것이고 그 시대가 다 찰 때가 올 것이란 예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5-26)
현재 이스라엘은 재건되고 있습니다. 아랍 민족들이 다 들고일어나도 지금의 이스라엘을 어찌할 힘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이 무엇이든 거의 휩쓸다시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께 완벽히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정말 완벽한 마지막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언제나 ‘회개’에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여 살았습니다. 회개는 에덴동산에서처럼 십일조를 봉헌하고 선교로 하느님 백성을 탄생시키는 본래의 일로 회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이들에겐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닌 희망이 날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서의 형성 과정과 각 권의 개요’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려주듯이, 성서 입문을 통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술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고, 음악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듯이, 성서의 형성에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언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고, 경고와 위로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회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언문학은 하느님의 정의, 자비, 공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특히 불의와 억압에 반대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의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종종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와 회복이며,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임을 강조합니다. 장차 올 구원자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예언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인생과 신앙,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지혜문학의 시작과 중심은 하느님을 경외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르고 정직한 삶, 즉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서야 함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이를 극복하는 지혜로서 인내와 신뢰를 가르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한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들 속에서도 지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지혜문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과 의로움으로 삶을 살아가며, 삶의 일시적 본질을 깨닫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 충만한 인생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묵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시련 속에서 희망을 전하고, 최후의 승리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이며, 끝까지 인내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의미하며,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줍니다. 강력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촉구합니다. 비유적인 언어와 환상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앙을 경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신앙인들이 이 싸움에서 영적 무장을 통해 승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Catherine Laboure)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806-1876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Catharina Laboure, 또는 가타리나)는 프랑스의 디종(Dijon) 근교 팽-레-무티에(Fain-les-Moutiers)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조에 라부레(Zoe Labou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고 또 언니인 루이자(Louisa)가 파리(Paris)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자 어린 나이에 삼촌의 카페에서 일을 하며 가사 일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라 읽고 쓰는 것조차 배울 수가 없었다.
14살 때부터 수도성소를 느낀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언니를 뒤따라 1830년 샤티용쉬르센(Chatillon-sur-Seine)에 있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의 파리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여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지원기를 마친 그녀는 파리의 뤼 뒤박(Rue du Bac)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도원 성당에서 일련의 성모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 환시에서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하셨음을 표시하고 공경하는 메달을 만들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그녀의 고해신부인 알라델(Aladel) 신부는 이 메달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파리의 켈랑 대주교로부터 받고, 1832년에 처음으로 1500개의 만든 것이 즉시 백만 개의 메달로 불어나면서부터 유명한 기적의 메달이 된 것이다.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는 파리의 대주교가 임명한 특별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836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 결과 기적의 메달은 급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831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의 앙기앵(Enghien) 요양원에서 천한 일을 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였고, 고해신부에게만 자신의 환시를 늘 말씀드리고 지도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야고보 (James)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마르케(Marche)
활동연도 : +1476년
같은이름 :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성 야고보(Jacobus)는 이탈리아의 간갈라(Gangala) 집안 출신으로 마르케 지방 안코나(Ancona)의 몬테브란도네(Montebrandone)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16년에 아시시(Assisi)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치고, 피에졸레(Fiesole)에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5월 20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29세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토스카나(Toscana), 움브리아(Umbria) 그리고 마르케 지방 등을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잤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 사본을 만드는데 보냈으며, 항상 다 헤어진 의복만을 입고 지냈다.
또한 그는 작은 형제회와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간의 화합을 위하여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밀라노(Milano)의 주교로도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였다.
1476년 11월 28일 나폴리(Napoli)에서 선종한 그는 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르치아의 야고보(1391 - 1476)는 이탈리아 몬떼 브란도네에서 태어났다.
페루지아에서 3년간 수학하고 피렌체에서 가르치다가 뽀르치웅꿀라에서 작은형제회 착복을 하였다.
그리고 수련기를 까르첼리의 은둔소에서 보냈다. 그의 수도 생활은 엄격한 보속의 연속이었고
모든 점에서 사부 성 프란치스꼬를 본받으려 하였고 선교사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독일에서 성공하였다.
십자군 원정때 투르크인들을 거스려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와 함께 설교하였다.
5 만 여명의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고 20만 여명의 무신론자들을 영세시켰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여러가지 합당한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는 여러 교황의 사절로 유럽 제국을 여행하며 기도하였다.
베네딕또 13 세가 시성하였으며 그의 썩지 않는 유해는 나폴리에 보존되어 있다.
성 스테파노 (Stephen)
활동년도 : 715-765년
신분 : 은수자,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비잔틴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박해가 거세게 휘몰아칠 때,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성화 공경의 옹호자로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최초 지도자였다. 그는 원래 칼케돈(Chalcedon) 근방 성 아욱센티우스 산(Mount Saint Auxentius)의 은수자였으나, 성화 공경과 연루되어 3년 동안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의 프로콘네수스(Proconnesus) 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곧장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황제상이 새겨진 동전을 하나 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여기에 박힌 황제상이 수모를 당한다면 참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 모친이신 마리아의 상을 불 속에 처넣다니요?” 이런 말을 한 뒤에 그는 동전을 마루에 내팽개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이렇게 갇힌 수도자 수효가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황제는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그의 부하들이 성 스테파누스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베드로(Petrus), 성 안드레아(Andreas) 등의 수도자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함께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