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산수경석입니다.
베이비 오일을 먹였더니 너무 검어져서 사진으로는 앞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진 경계사이에서도 돌은 빛나며 지난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그 어두운 표면에 닿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내게 전하는 거지요.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질감, 그리고 울퉁불퉁하고 비정형적인 모양이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손으로 만져보면 부드럽기도, 거칠기도 한 이 돌의 표면은 마치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매끄럽고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균열과 흔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좌대는 자연과 사람의 합작품입니다. 탑처럼 온 몸을 쌓아왔던 나무를 깎아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세월을 먹어 여윈 돌을 얹혔지요.서로 작아지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오작교처럼 만납니다. 그래서 돌과 삶은 서로를 담아냅니다.
이 돌을 바라보며 삶을 떠올립니다. 돌을 좌대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마치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돌의 어느 면이 가장 안정적일지, 어떤 방향이 가장 자연스러울지 고민하는 시간은 내 삶의 중심을 잡으려 애쓰던 순간들을 닮아 있습니다. 좌대와 돌이 만나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되듯, 우리도 삶의 무수한 조각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돌에 난 금을 얼이라고 합니다. 얼을 사람들은 흠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이야기를 봅니다. 얼은 시간을 견뎌낸 흔적이고, 그 균열 속에는 세월이 흘러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금이 갔기 때문에 돌은 더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흠 없는 완전함을 추구하기보다는, 결점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빛을 바라보는 것도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돌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지 상상해 봅니다. 물과 바람이 다듬고, 태양과 밤이 번갈아가며 그 표면을 쓰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여기, 나와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내 삶의 조각들을 되짚어 봅니다.
삶은 돌과 같습니다. 단단하고 무거우며 때로는 그 무게에 짓눌릴 듯하지만, 그 속에는 셀 수 없는 시간과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돌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에 놓을지 선택하며,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돌 하나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말처럼, 우리 삶 또한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큰 그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돌을 삶에 비유하자면 돌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찾고, 좌대에 안정적으로 올려놓는 과정은 삶의 방향과 균형을 고민하는 일과도 같을 겁니다. 돌 하나에도 시간이 깃들어 있듯, 우리의 삶도 수많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균열이 생기고, 때로는 매끄럽게 다듬어지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일 것입니다.
삶을 커다란 병이라 비유한다면 하루의 에피소드는 그 병의 증상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드러나는 사소한 감정과 사건들은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를 한 달 혹은 일 년 동안의 패턴으로 묶으면 증후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몇 년, 몇십 년 동안 지속된 증상들을 엮어 보면 우리는 이를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의 신드롬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저는 제 삶에서 노년 신드롬의 증상과 증후를 서서히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시집과도 같습니다. 함의와 맥락, 상징이 빼곡히 들어찬 텍스트이지요. 때로는 이해될 듯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페이지를 넘깁니다. 삶이라는 시집은 때로는 장황하고 난해하며, 한 구절 속에 담긴 진의를 알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불편한 모호함과 까다로운 애매함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치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결핍이 있더라도 그것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삶의 색채를 우리는 퉁 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타인과 내가 점으로 부대끼면서도 선을 이루고, 이 선들이 모여 다시 면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라는 이름의 담합을 통해 서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생을 돌아보며 생각합니다. 과거의 순간들에서 왜 굳이 어깃장을 넣으며 시간을 낭비했는가? 굳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고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관계가 내밀하면서도 상호적인 개선 프로젝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관계란 그 자체로 되먹임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니까요.
삶의 연장선에서, 저는 돌을 마주할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듭니다. 돌은 단순히 고정된 물질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그 돌이 태어난 산지, 세월을 견뎌온 흔적, 그 표면의 질감과 형태,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돌을 보며 그 돌에 금이 갔는지, 파편이 남아 있는지 살핍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어도 금이 가거나 깨진 돌이라면 쉽게 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그 금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여다보아야 할까요?
마모된 돌의 흔적은 그 자체로 자연과 시간의 은유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듬어진 돌은 더 이상 날카롭거나 거칠지 않습니다. 둥글고 매끄러운 표면은 강물과 바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낸 예술입니다. 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그 주제가 돋보일지 고민하는 것은, 결국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기반을 찾는 일은 돌의 바닥을 고르는 일과 같습니다. 먼저 위아래와 앞뒤를 안정적으로 서 있는지 확인, 판단하고, 돌의 주제가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우리 삶의 방향과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지요.
돌 하나에도 시간과 공간이 스며들어 있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겹겹의 층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에피소드일 뿐이지만, 그 에피소드들이 쌓여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어떤 날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로 채워져도, 우리는 그것을 꿰어내어 큰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결국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고 받아들이는 과정임을요.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점으로 연결하며 살아갑니다. 타인과 내가 이어지는 선은 서로 다른 색과 무늬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이 모여 면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의 조화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조화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돌처럼 마모되고, 단단해지며, 자신만의 주제를 찾아가게 됩니다.
삶은 돌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단단하고 무겁지만, 그 속에 깃든 이야기는 무게를 넘어섭니다. 우리는 그 돌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돌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을 읽어내는 우리의 시선일 것입니다.
첫댓글 조팝 선생님~! 수석에 대한 사랑과 혜안이 대단하시군요, 풀어내는 이야기가 무릎을 치게 합니다. 폭풍우가 일었더라도 선생님 글을 읽다보면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아요. 안행수필 카페가 힐링의 장소로 발걸음이 잦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