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全碑를 통해본 삼국시대의 역사
비문의 정확성과 사료가치로의 중요성
조전비는 서기185년의 비문으로 1837년전의 비문으로 황건기의가 일어난
다음해로 사실상 삼국시기의 석비인 것이다.
중국속언에 초보자는 삼국연의를 읽고 중간자는 정사 삼국지를 읽고
고등자는 석비와 간독을 보라한다.
비각과 간독의 이해는 비교적 어렵다는 것인데 진실성이나 의존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문에는 숨겨진 역사세절이 남고 서예기법도 알 수 있어 조전비는 전명이
한합양령조전비로 1165자에 달한다.
합양은 현재 섬서성의 남부로 위남시 합양현으로 시경에도 등장하는 지명
으로 조전비는 당시 유행하던 송덕비로 공덕가송비이다.
당시 현령 조전이 합양현의 서리들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데 천석의 品秩이
낮은 縣令이나 전기적인 일생이다.
조전은 돈황의 효곡인으로 한조시 돈황은 매우 편벽낙후한 곳으로 이곳에서
자란 것이다.
비문의 일반적 격식에 의하면 우선 조성의 변천을 보는데 조전가족은 주왕실
의 후손들로 무왕멸상후 동생인 숙진탁이 조국에 봉지를 받은 것이라 한다.
이에 후에 성을 조라 하고 진한지제의 명신 조참과 한무제시 강토를 탁장한
자손의 일부가 관중의 우부풍현으로 이거한 것이라 한다.
그런후 후대가 지엽번성으로 서로 안정군 농서군 무도군 돈황군등으로 퍼져
조전은 돈황인이다.
삼국지의 개편의 1장1구에 조조는 한상 조참의 후손이라 하나 조전과는 근친
가족은 아니고 400년전의 일가라 한다.
조전은 당시 매년말 낙양에 가서 국가재정이나 관원의 감찰등을 겸한 우수한
관리로 중요한 직무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지방과 조정의 유대와 구통의 역할로 특히 먼곳인 돈황을 조정과
연결하여 관계를 강화시킨다.
조전의 직위는 량주치중 별가로 무장의 별부사마와 같은 역할로 사마의도
이직책부터 시작하여 승진한 것이다.
건녕2년 169년 이해 한영제가 즉위한 다음해로 조전은 효렴에 뽑혀 낭중
으로 배서역성무부사마가 된다.
이로서 관직에 나가 요원한 서역에서 관리가 되는데 서역은 동한시 반초가
개통하여 흉노를 몰아내고 반란을 평정하여 서역도호부를 다시 세우고 무기
교위가 된 것이다.
이에 서역의 50여국이 한에 귀부한 것인데 조전이 담임한 무부사마는 무기교
위의 속관이다.
그러나 부임후 곧 대사건이 생기는데 서역의 소륵국이 지금의 신강의 카스지
구로 내홍이 일어나 시부찬위로 동한조정에 납공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조전이 군대를 솔령하여 정벌에 나서 격렬히 전투하여 대첩을 한 것으
로 역도를 생포한 것이다.
그래서 서역의 저명인사가 되고 서역각국이 두려워하여 헌례를 하는데 비문
상 기록으로 보아 공로가 부개자 반초와 비견하게 된다.
후한서의 서역전에 보면 이러한 사건이 기재되어 건녕원년 소륵왕이 숙부인
화득을 살해하고 건녕3년에 량주자사인 맹타(맹달의 부친)가 돈황의 군사들
을 솔령하여 무사마 조관,서역장사 장안등을 통수하여 언기 구자 차사전후부
의 3만병사와 소륵을 토벌한 기사가 보인다.
그래서 비문과 시간이 맞고 내용도 같은데 통병장령중 무사마 조관이 즉
조전비의 주인공인 무부사마 조전이다.
이후 전사의 결과는 대승인데 후한서에는 3만병사가 오지 않아 철군한 것이
라 하는데 비문과 사서의 기록이 3곳이나 다르다.
화덕의 시군은 숙부살해로 나타나 사실상 비문이 사서보다 정확하여 조전비
는 소륵국의 내홍후 겨우 15년후의 기록으로 보다 정확한 것이다.
후한서는 남조의 류송시의 기록으로 300년이 지나서의 기록으로 정확도
가 낮은 것이다.
조관과 조전의 이름이 서로달라 바문이 더욱 정확하고 송덕비에 이름의 착오
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전은 호가 경완으로 량주인들은 성과 자를 연독하는 습관으로 사서상 한수
는 자가 문약인데 한약이라 부른 것이다.
조전도 조완으로 불러 完과 寬자는 닮아서 착오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후한서에는 화수를 생포한 것이라 하나 무공이반한 것이란 기록과 상반되어
동일사건의 큰 차이가 나타나 착오로 보인다.
그러나 사서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는데 조정이 서역에서 대승장으로 국왕을
생포한 것이라면 과장이 클 것이다.
후한서의 작자인 범엽은 한말시에서 먼 남조시기의 사가로 남겨진 자료를
근거로 편찬하여 한조의 자료를 찬개할 이유가 없다.
그가 본 자료는 아마도 정확했을 것으로 보아 비문의 내용과 다른데 송덕비
의 성질상 과장이나 溢美(일미)로 인한 것으로 보여 비문해석시 유의해야
한다.
후한서의 기사 말미에도 한군이 철군후에도 소륵왕의 살해가 연속되나 조정
은 통제가 불가능했다고 전한다.
합양현의 관리들은 이사건의 목격자는 아니어서 조전의 왕사를 구전으로
들어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과정은 사서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전비의
미단중 조전은 서역유공으로 우부풍의 괴리현 현령이 되는데 현재의 섬서성
흥평현이다.
당시 흥평현은 장안에서 근거리로 한말의 명장인 황보숭과 마등이 모두 괴리
후에 봉해진 곳이다.
조전은 변추출신으로 핵심지인 경기지역의 현령에 임직한 것은 대단한 일로
조전이 부임한후 사건이 생긴다.
즉 동생이 돌연 죽어 사직하고 고향에 7년간 은거한 것이라 하는데 모호한
표현으로 아마도 동한말의 당고지화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환관들과 사대부간에 대립으로 이응 두밀등이 그즈음에 살해된 것으로
나머지 관료들이 사직한 것이다.
그런데 조전은 권토중래하여 풍파속에서 벗어나 금고에서 벗어난 당인이
된 것이다.
조전의 사직은 이중증거법을 연용하여 후한서의 영제기에 답안이 있다.
희평5년 176년 윤5월 영창군태수인 조란이 상서하여 기시형으로 살해되는
데 조전이 복출한 광화6년 183년은 이사건이 일어난 7년전으로 조란이 피살
된 해로 후한서의 이현태자주에는 조란은 고향인 괴리로 압송되어 괴리감옥
에 같혔다고 한다.
그런후 살해당한 것이라 하여 괴리는 조전이 현령이던 곳으로 시간과 지리가
부합한다.
조란과 조전은 동성으로 아마도 조란이 조전의 동생임이 확실하고 사직한
원인으로 보인다.
특히 조전이 동생인 조란을 사형시킨 것으로 잔혹한 사태로 사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문생고리도 모두 연좌하여 면관시킨 것으로 조전도 7년간이
나 은둔한 것이다.
[출처] 동한시 조전비(1)비문의 사료가치와 동한말의 시대상|작성자 박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