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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7월 문산회 제164차 산행] ☆ 안양 삼성산 산행 *
2020년 07월 11일 (토요일)
* [산행코스] ▶ 관악역(1호선) 10:30 → 삼성초등학교→ 능선 237고지→ 전망대1 → 암봉[478m 제2전망대]→ 안부(염불암 갈림길)→ 삼막사[점심]→ 무너미고개→ 안양유원지
* [프롤로그] ― 가라앉지 않은 코로나 팬데믹 그리고 …
* 장마전선이 제주도와 부산에 상륙하여 많은 비를 내렸다. 10일 간밤에 부산 영도에는 252mm의 폭우가 내려 침수, 가옥 붕괴의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아직 장마권에 들지 않아, 우리가 만나는 시간에는 뜨거운 태양의 화살이 쏟아지는 백일(白日)이었다. 아직 코로나의 역풍(疫風)이 가시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두 건의 초상(初喪)을 치렀다. 한 분은 나라를 절멸의 위기에서 구출해낸 6·25 전쟁 영웅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돌아가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해 위기에 몰린 끝에 산속에 들어가 자살(自殺)한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일당 독재의 국정농단이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 국민들은 아픔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멘붕에 빠졌다.
* [6·25 전쟁,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 서거] *
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이 7월 10일 밤 별세했다. 1920년생인 백 장군은 올해 100세이시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살 나이에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선다!,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1950년 6월25일 서울에 있던 백선엽 장군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지만 이미 개성은 함락된 이후였다. 백 장군은 그해 8월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대구 북방 25㎞에 있었던 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전술적 마지막 요충지였다. 당시 윌턴 워커 장군은 백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다. 백 장군은 이곳 전투에서 국군이 밀리자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백 장군은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며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앞장설 테니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고 했다. 백 장군은 자신의 저서『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시체가 풍기는 냄새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사진] 6.25 전쟁 당시 부하들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1950년 10월 평양 남쪽 선교리에서 시가지 진입을 앞두고
미군 공지(空地) 연락 장교와 작전을 숙의 중인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당시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백선엽 장군은 영어로 직접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며 "어렸을 적 평양에 살아 길을 잘 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950년 10월19일 평양을 점령한 1사단은 김일성 집무실에 지휘소를 차렸다.
[더글라스 맥아더 총사령관과 함께] -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막아내 동부 전선 붕괴를 막아내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나섰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 미군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군인
예편 직후 주중(당시 대만) 대사로 부임한 백선엽 장군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낸 뒤 1969년 교통부장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일체의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다. 6·25 전쟁 초기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백 장군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선엽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2013년엔 명예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됐고,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됐다. 해방 이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대령)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군에 침투한 좌익·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숙군(肅軍) 작업을 총지휘했다.
2018년 11월 용산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백수(白壽) 행사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가 무릎을 꿇고 휠체어를 탄 백선엽 장군을 맞고 있다.
◇ 친일 논란과 대전 현충원 안장
현 여권 일각에선 20대 초반 일본군 장교 복무 전력을 들어 백 장군을 향해 '친일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백 장군을 국립현충원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백 장군은 1943년부터 만주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지만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다.
2020년 7월 15일, '6·25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결국 서울 동작동이 아닌 ‘대전 현충원’에 생전의 전투복을 입고 영면에 들었다. 장군의 100세 삶은 대한민국 자유·평화·번영의 역사 그 자체였다. 백 장군은 6·25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격을 기적적으로 막아냈다. "그때 패배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고 저나 여러분도 이 자리에 없을 것"(송영근 예비역 중장)이라는 추도사는 결코 의례적 공치사가 아니다. 오늘날 김 씨 왕조 폭정 아래서 노예로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보면서, 백선엽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자유·민주 기본 가치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는다.
◇ 구국의 영웅을 외면한 대통령과 정권
이런 호국 영웅의 마지막 길을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끝내 외면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영결식장에 여당 지도부는 한 명도 없었다. 국내 정치용 '친일' 프레임에 빠진 사람들이 앞뒤를 가리지 못한다. … 필자는 7월 14일 화요일 오후, 광화문에 설치된 <백선엽 장군 시민 분향소>를 찾아 하얀 국화 한 송이로 헌화하고, 장군의 불퇴전의 충정(忠貞)을 기리며 추모했다. 젊은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분향소는 초라할 만큼 하나의 작은 천막(天幕)에 불과하지만 연일 수만 명의 국민이 찾아와, 두세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며 참배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통령의 제1책무는 국가를 보위(保衛)하는 일이다. 대통령은 무엇으로 국가를 지키는가. 직접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갈 일은 없다. 대통령의 안보란 나라에 몸을 바친 호국 영령과 원로들께 최대한의 예우(禮遇)와 보상(報償)을 바치며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이다. 하와이에서 돌아온 호국영령들을 캄캄한 공항 비행기 속에 하룻밤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미리 서울공항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영령들을 맞이했어야 했다.
백선엽 장군 같은 구국의 영웅이 서거했을 때는 버선발로 뛰어가 빈소를 지키며 대통령이 헌정(獻呈)할 수 있는 국가 최고 무공훈장을 추서하고 몸소 장례위원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이자 국군통수권자가 해야 할 안보 행위의 시작과 끝이다. 그런 대통령을 보면서 60만 장병이 감격과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해주는 것, 사기(士氣)가 충천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대통령이 해야 할 안보의 시작과 끝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토방위에 있어서 예비역 병장이 아니라, 군 최고사령관인 현역이다. 이것을 모르는 대통령이 지금 우리나라 안보의 책임자다. 도대체 지금 문 정권의 행태는 무엇인가? 수많은 선열들과 용사들이 피흘려 이룩한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 [산행 들머리] — 전철 1호선 관악역, 뜨겁고 화사한 날씨
오전 10시 관악역(전철 1호선)에 대원들이 집결했다. 오늘 산행은 관악산 서쪽 지맥인 삼성산이다. 오늘 산행에는 김태식 회장, 호산아 고문, 채홍철 총무, 정진학, 이정식, 황병무, 이근무, 구미호 등의 대원이 참가했다. 최명주 대원은 서울대 정문 쪽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따라 올라와 삼막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늘은 정진학 대원이 1월에 이어 나와서 반가웠고 순홍빛 등산복을 차려 입은 구미호 대원이 오랜만에 나와서 반가웠다. 관악역에서 경수산업도로(1번국도) 횡단보도를 건너 안양 삼성초등학교 앞을 지나 산의 들머리에 도착했다. 나무테크 계단으로 시작되는 산길로 들어섰다. 초복(7.16)이 가까운 더운 날씨이지만, 산길은 울창한 숲길이어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완만한 경사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햇살은 뜨겁지만, 숲속의 부드럽고 신선한 바람결이 아주 시원하고 쾌적했다.
* [심성산으로 가는 능선 길] — 237고지에 바라보는 우뚝한 암봉
삼성산(삼막사)로 가는 능선 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서 평탄하게 산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가파르게 산을 오른다. 오전 11시 15분, 숲길을 벗어나 능선 239고지에 올라섰다. 이마 위, 건너편에 우뚝한 암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7월이 녹음이 넘실거리는 산록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367m)가 시선을 압도한다.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바위를 타고 오른다. 가파른 바위에 올라 우리가 올라가야 할 암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능선을 따라 산행을 하는 사이, 하늘에는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직산광선은 가려준다. 바위를 타고 오른다. 온몸에 땀이 솟는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윗길은 등산화가 잘 밀착되어 안전하게 걸어오를 수 있었다.
* [암봉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 — 제1전망대(나무테크)의 조망
암봉의 중간쯤에 나무테크 전망대(제1전망대)가 있다. 2단의 정방형 마루로 된 전망대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이 둘러쳐져 있어 운치를 더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조망(眺望)한다.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이지만 시야는 아주 좋았다. 미세먼지가 전혀 없는 깨끗한 날이다. 공기가 아주 맑아 서남쪽으로 수리산 아래의 안양이 눈에 들어오고 가까이 서쪽으로는 KTX 광명역 역세권 건물과 아파트군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제2경인고속도로에서 이어진 도로가 삼성산-관악산을 관통해 들어가는 풍경이다. 발아래에는 삼성산 줄기의 채석장 터에 자리잡은 경인교대 안양캠퍼스가 아담하다. 온통 짙푸른 초록으로 덮인 7월의 산야, 그 녹색의 대지에 여기저기 하얗게 빛나는 수도권 도시의 건물과 아파트 군들이 시야를 들어온다.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도시의 풍경이 평화롭다.
한남정맥 수리산과 안양 시가지
광명 KTX 역세권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
[경인교육대학교 안양캠퍼스] ― 왼쪽 멀리 강화도 마니산, 가운데 뒤에 인천 계양산
나무테크 제1전망대
* [오늘 산행의 최고봉, 367고지의 암봉] — 제2전망대의 조망
다시 암봉을 향해 오른다. 가파른 돌길을 지나 나무테크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은 가팔랐다. 중간에 잠시 간이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은 기역자로 꺾어져 올라간다. 오전 11시 35분 367m 암봉의 정상에 올랐다. ‘제2전망대’라는 표지판이 있는 암봉은 서쪽으로 바위봉우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그 옆의 능선에는 너른 공간이 있고 여러 개의 벤치도 있다. 대원들이 잠시 배낭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목을 축였다.
암봉 위에 올라가면 수도권 서부 지역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암봉 아래의 제1전망대에 바라본 풍경보다 훨씬 그 시야가 넓다. 고개를 들어보면 시흥시 일대와 그 너머에 서해 바다까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남서쪽으로 수리산 아래 안양 시가와 서북쪽으로 금천구 너머 광명과 목동 아파트 군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부천과 인천 시가지 위로 인천의 계양산이 우뚝하고 아무 멀리 강화도 마니산이 실루엣처럼 솟아있다. 북쪽으로 산 능선 안부 사이로 남산의 송신탑이 보이고 그 뒤로 북한산 보현봉-문수봉까지 아득하게 보인다.
암봉의 정상에서
안양시 삼성동, 광명 KTX 역세권 -- 제2경인고속도로→ 안양-성남고속도로 이어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일 부분과 멀리 뒤쪽으로 시흥시, 송도국제도시 그리고 서해 바다가 보인다
멀리 인천 계양산 그리고 아주 멀리 강화도 마니산까지 보인다
군포시 수리산 그리고 안양시가
낮 12시 정각, 안양유원지 쪽에 있는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안부의 갈림길을 지났다. 능선을 그대로 타면 삼성산-국기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삼막사로 가는 산허리 길을 따라 나아갔다. 산막사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벤치에서 잠식 휴식을 취하고 삼막사로 향했다.
안양유원지 방향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 [신라시대의 유서 깊은 고찰] — 삼성산 삼막사 불이문 ; 원효·의상·윤필의 도량(道場)
12시 30분, 삼막사 일주문인 불이문(不二門)이 도착했다. 불이문의 ‘불이(不二)’는 진리(眞理)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生)과 사(死),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이다.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일주문(전면 三星山 三幕寺 현퍈)
일주문 안쪽 [不二門 현판]
삼성산(三聖山) 삼막사(三幕寺)는 677년(문무왕 17)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尹弼) 등 세 분이 처음 막(幕)을 치고 수도를 한 것이 이 절의 기원이다. 그래서 절은 삼막사(三幕寺), 산 이름은 삼성산(三聖山)이라 하였다. 그 후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관음사(觀音寺)라 불렀는데, 고려 태조가 중수하고 다시 삼막사로 고쳤다.
조선 전기에는 무학(無學) 대사가 한양 천도(漢陽遷都)에 즈음하여 절을 중수하고 국운이 융성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는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하여, 남서울의 수찰(首刹)로서 서울 주변 4대 명찰의 하나로 꼽혔다. 현재 당우(堂宇)는 대웅전·명부전·망해루(望海樓)·대방(大房)·요사채·칠성각 등이 있다.
* [삼막사 송림 아래의 오찬(午餐)] —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
낮 12시 30분, 삼막사 절 앞의 도로를 가로질러, 일주문[不二門]을 지나 거대한 노송이 군락을 이루는 송림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로 만든 널찍한 들마루 위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 가지고 도시락을 내어 놓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식사를 했다. 채홍철 총무가 준비해 온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더운 가슴을 쓸어내렸다. 뜨거운 날씨,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의 막걸리 한잔은 그야말로 보약이 아닐 수 없다. 항암효과가 탁월하다는 방울토마토에서부터 황병무 대원의 유부초밥, 이정식 대원의 맛 있는 찐 고구마, 정진학 대원이 가져온 달고 시원한 수박, 무엇보다 홍일점 구미호의 정성이 어린 군만두, 구운 계란 그리고 맛깔스런 반찬과 김치 등등 풍성한 식단을 이루었다. 고맙고 유쾌한 식사였다.
오후 1시 35분, 일주문[불이문]을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삼막사에서 국기봉 가는 길을 경유하여 서울대 입구에서 올라오는 계곡, 무너미고개를 지나, 안양유원지로 내려왔다. 더운 날씨, 오늘 함께 산행한 모든 대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 [여성인권변호사, '착한 원순씨'] — 여비서 성추행 고소로 자살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7월 9일 밤,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북악산 숲속에서 자살했다. 앞서 7월 8일 시장의 전 여비서가 그로부터 4년 동안 성추행당한 사실을 서울경찰청에 고소했다. 고소 사실을 접하고 난 뒤 박 시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은 박원순 시장을 서울시가 주관하는 특별시장례, 그리고 성대하게 5일장으로 치러냈다. 분향소를 설치하고 추모와 애도의 분위기를 한껏 이끌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자살자는 운구가 동네로 들어오는 것부터 막았다.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천주교는 자살자의 공개 장례미사를 거부한다.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만이 주관할 수 있다는 교리에 따른 것이다. 염수정 서울주교가 박원순 시장을 조문한 것에 대해 지금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과 좌파 집권 세력들은, 자살(自殺) 정치인을 미화하고 기념하는가 하면, 또 선거 때가 되면 자살 정치인을 마치 이념적 마스코트 상징처럼 떠받들고 그의 뜻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선전선동을 한다. 자살이 추앙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구한말 때처럼 나라를 구하려고 자결(自決)을 했던 독립지사(獨立志士)들, 그리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고 본인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던 의인(義人)들, 이런 경우 말고는 없다.
좌파 정치인들의 자살은 양태는 비슷하다. 재임 기간 동안 스폰서 역할을 한 기업인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의 압박을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그리고 댓글조작 범인한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한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 이번의 경우, 여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해서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시장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동정을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추모와 추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걷잡을 수 없이 ‘정치인들의 연쇄 자살’이라는 베르테르 효과가 번지고 있는 것이 왜 그렇겠는가.
"인생은 정점(頂點)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마지막으로 평가한다."는 말이 있다. 삶이란 ‘유종(有終)의 미(美)’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권은 구국의 영웅을 외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젊은이들이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 광장에 <고 백선엽 장군의 시민 분향소>를 설치했다.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은 단칸 천막의 분향소지만 연일 수만 명의 추모객이 행렬을 이루었다. 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시민의 세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박원순 시장의 특별 분향소가 설치되어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여비서를 성추행하여 고소를 당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적 분열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실 풍경이다.
어떻게 하여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책임은 문재인 집권 세력에게 있다. 노골적으로 편가르기 정치를 해온 결과이다. 자기 편 사람은 어떠한 비리가 있어도 감싸고 미화하면서, 내 편이 아니면 적대적인 낙인을 찍고 독기어린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공언한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결국 '내 편 사람이 먼저다'였다. 갖은 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는 조국이나, 정의를 내세워 위안부 할머니의 고혈을 빨아온 윤미향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작금 조국의 비리를 덮기 위해 검찰 개혁을 한답시고 무도한 칼을 휘두르는 추미애 장관의 독기가 빛(?)을 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비행을 저지른 박원순 한 사람을 놓고 미화하고 추모하면서, 약하고 힘 없는 성적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권력의 아류들, 그 행태는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들이라고 할 수 없다. 성추행 피해자를 오히려 타박하는 움직임이 있고, 그래서 박원순과 문재인 정권에 배신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박원순 시장의 장례는 이렇듯 두 토막난 나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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