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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경석 서재 원문보기 글쓴이: 박경석
전쟁기념관을 우러러보며
박경석
시인 소설가 (예)육군준장
1.역사적인 전쟁기념관 건립
용산 육군본부가 전두환 정부 시절 계룡시로 이전 함에 따라 그 장소에 여러가지 시설 설치가 검토 되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전쟁기념관 건립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생소한 전쟁기념관 건립에 대해 많은 이론이 등장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는 말이 떠 돌았으나 노태우는 결단을 내려 전쟁기념관으로 확정했다.
그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이 사업 추진 책임자로 예비역 이병형 중장(육사4기) 을 전쟁기념사업회장으로 임명 했다. 이병형 장군은 1사단장, 5군단장, 2군사령관을 역임한 탁웥한 전략가로 많은 장교들로부터 추앙 받는 지도자였다.
내가 월남전 파병 맹호부대 제1진 보병대대장에 선발되자 노태우 소령은 제일 먼저 진해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중인 나에게 전화로 축하 인사를 해왔다. 그는 전두환과 달리 만나면 꼭 '선배님' 호칭으로 경의를 표했고 내 지난 경력을 늘 부러워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맹호부대가 출전을 앞두고 수류탄 훈련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가슴으로 덮쳐 많은 부하를 살린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의 거사에 대해 노태우는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늘 자랑스러워 했었다.
특히 베트남 전선에서 강재구의 이름을 딴 맹호 在求大隊가 연전연승을 거두며 눈부신 전과를 올리자 자기가 중령으로 진급하면 꼭 재구대대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노태우 소령은 중령 진급이 늦어 내 후임 2대 대대장으로는 파월 할 수 없었지만 내 다음 다음 3대 재구대대장으로 참전할 수 있었다.
훗날,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면서 전역식 이임사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바로 맹호부대 재구대대장 근무할 당시였다"고 술회할 정도로 나와의 인연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나는 야인으로 문인이 되었고 노태우는 12.12 쿠데타에 가담했었지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는 국민에게 쿠데타의 죗값을 조금은 치렀다고 보았다. 다른 고약한 하나회 12.12주역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대통령 재직 중 그의 많은 업적은 국민으로부터 별로 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보이면서 '물태우'란 조롱 섞인 별칭까지 붙여졌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잘하고 있구나'하며 그의 행적을 지켜보았다. 북방 외교를 비롯한 8.5%의 경제성장, 서울올림픽 개최, 인천국제공항과 KTX 공사 발진 등은 빛나는 업적이다, 군인 노태우로서의 업적은 아무래도 전쟁기념관을 빠트릴 수 없다.그래서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 애국심 고양과 관광 명소로 빛나고 있지 않는가.
이병형 장군이 전쟁기념관 건립 책임자로 부임 하자 나를 불러 함께 일 하자며 사무처장 직을 권했다. 아마 노태우의 귀띔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이병형 장군을 직속상관으로 모신 직위가 무려 네번이었다. 그만큼 나는 그분을 존경했고 그분은 나를 신임했다. 나는 그분의 신중한 권유를 받아드릴수 없는 입장을 설명하며 그분이 주관하는 전쟁기념관 건립에 직위없이 다만 작가로서 봉사할 것을 제의해 승낙을 받았다.나는 당시 육군의 역사를 바로잡는 '대장정'에 몰입하고 있었다.진해 육군대학에서 군단방어를 강의하면서 미군 기록과 대조한 결과 심대한 오류를 발견했었다. 그 오류를 바로잡던 중 월남전 대대장으로 출진하게 되어 결론을 훗날에 미루고 있었다.
내가 전쟁기념관에서 한 일 가운데 몇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3편의 헌시(獻詩)로 건립된 세 곳의 시비(詩碑)이다. 당시 전쟁기념관 정문 입구 전쟁기념관 '서시(序詩'). 서쪽 회랑에 '조국', 호국추모실에 '추모시'가 그것이다.
한때 이 시 선정에 일부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박경석 시비에 대해 김영삼을 도왔던 것을 빗대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박경석 장군이 창작한 시만이 전쟁기념관에 부끄럼 없이 헌정(獻呈)할수 있다"라고 말해 불만층을 달랬다. 그후 내가 창작한 3편의 헌정시 가운데 '조국'은 한국의 명시로 선정되면서 국제PEN클럽 세계본부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전쟁기념관을 없애겠다는 말이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는 중앙박물관을 신축중인 전쟁기념관 건물에 옮기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 그자리에 광화문을 복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전쟁기념관 건물이 준공이 안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 정치군인에 대해 고도의 불신을 가지고 있던 김영삼으로서는 있을법한 정황이었다. 나와 이병형 전쟁기념사업회장은 대비책을 수립해 전쟁기념관 보존을 위한 세부 건의 자료를 만들었다. 나는 김영삼의 첫 대통령 출마시 선거 캠프내 국가안보위원회 육군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자문할 일이 생겨 대통령을 면접할 기회가 와, 이병형 장군과 함께 진지하게 전쟁기념관의 필요성을 보고해 마침내 중앙박물관 이전 계획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
결국 전쟁기념관 준공식 주재자는 김영삼 대통령이되었고 대통령 설득 과정에서 내가 요청해서 받아낸 '김영삼 대통령 휘호'는 전쟁기념관 1층 입구 홀에 게시하게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전쟁기념관 건립 업적 기념은 내가 지은 서시 시비 반대편 시비 전면에 '전쟁기념관' 현판 글씨로 남기게 했다. 1212 쿠데타 죄인의 글씨라고 반대가 강했지만 나는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관철 시켰다. 그러나 많은 세월 휘호 글쓴이 이름 없이 방치돼 오다가 나의 집념으로 10여 년이 훨씬 지난 후 시비 옆쪽에 '대통령 노태우'를 조각케 했다. 역사는 사실대로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역사관이다.
2.박경석 시 3편 전쟁기념관에 헌정
서 시
여기 맥맥히 흐르는 숭엄한 겨레의 숨결과 거룩한 호국의
발자취 살아 있어 경모의 정 뜨겁게 솟구치리
한핏줄 이어온 자존과 삶의 터전 지킨 영웅들 위훈으로
이 하늘 이 땅에 해와 달 고이 빛났어라
침략 물리친 선열의 얼 좇아 불뿝는 조국애 드넓게 떨치어
자랑스러운 민족사 영원토록 보전하리라
지은이 박경석
전쟁기념관 명칭 확정 경위 및 '서시' 해설
전쟁기념관 준공 이후에도 명칭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문인을 비롯하여 각계의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제기 한 것이다.
1993년 11월 30일. 나를 포함하여 8명의 토론자가 참여한 국방부 주관의 전쟁기념관 명칭 공청회에서 명칭 문제가 이슈로 대두되었다.반대론자들은 '기념이란 기린다는 뜻이지만 전쟁이란 있어서는 안될 지긋지긋한 것인데 전쟁을 기념할 수 없다' 는 주장이었다. 내가 사회를 맡아 회의를 이끌었디. 두 명의 발표자는 '기념은 결혼이나 독립 등 좋은 뜻을 갖는 데에만 사용해야 된다' 고 했다. 나는 그 주장은 옳은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기념이란 뜻은 오래도록 사적(史跡)을 전하여 잊지아니하게 함' 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을뿐만 아니라 나쁜 것이라도 교훈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기념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외국의 사례로 미국은 전사자를 추도하는 현충일을,'The memorial day',라고 하여 기념일로 부르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남경대학살과 같은 치욕의 슬픈 대사건도 '난징대학살기념일' 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때로는 승리도 하고 패배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외세를 물리쳐 승리했다는 증거이다.그러나 전쟁은 패배를 더 교훈으로 삼을 때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
전쟁기념관은 그러한 취지에서 민족의 자존과 숨진 선열의 위훈(偉勳)을 기리기 위해 존재한다. 참고적으로 밝힐 것은 세계 선진국 여러 나라의 전쟁관련 시설물에는 전쟁기념관 (War memorial)이라는 명칭을 상용화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명칭 보다도 전쟁기념관은 건립 이념과 합치된다.
나의 제의에 따라 8명의 주제발표자가 투표한 결과 결국 찬성 6명 반대 2명으로 전쟁기념관 명칭이 정해졌다.
'전쟁기념관' 명칭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제시한 대안은 '군사박물관','전쟁박물관'이었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박물관'이란 사전적 의미는 고고학 자료와 미술품, 역사적 유물, 그 밖의 학술적 자료를 널리 수집 보존 진열하고 일반에 전시하는 시설이라고 하는데 전시품 가운데 고고학 자료와 역사적 유물 등은 거의 없고 모두 상징적 의미를 갖는 진열품이므로 박물관이 될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물론 선진국 여러나라에는 전쟁기념관 외에 전쟁박물관(War Museum)또는 군사박물관(Military Museum)이 있다.그러나 분명히 우리 전쟁기념관과 다른 것은 사전적 의미의 박물, 즉 역사적 유물을 비롯한 고대 병기 및 학술자료의 진열이 대부분이다.우리나라에서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군사박물관이 이에 적격일 것이다. 따라서 용산에 있는 전쟁 시설물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시설물이 대부분이므로 전쟁기념관이 맞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전쟁기념관이 탄생하였다.
그후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당시 시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견 시인들을 선별, 서시 작시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영광스럽게도 본인으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나는 전쟁기념사업회 이병형 회장으로부터 전쟁기념관 정문 중앙에 건립하게 되는 시비에 헌정하게 될 '서시' 창작을 위촉받았다.
나는 '서시' 를 쓰기전에 약 보름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현충사를 비롯한 선열의 유적지를 답사했다.특히 '서시' 는 전쟁기념관의 현판격인 정문 중앙에 설치되는 것이므로 최대한 절제된 시문으로 해달라는 것이 국방부의 요청이었다. 참선하는 마음에서 온 정성을 다하여 쓴 '서시' 가 바로 다음 글이다.
'서시' 제1연~ 여기 맥맥히 흐르는 겨레의 숨결과 거룩한 호국의 발자취 살아있어 경모의 정 뜨겁게 솟구치리.
'서시' 제2연~ 한핏줄 이어온 자존과 삶의 터전 지킨 영웅들 위훈으로 이 땅에 해와 달 고이 빛났어라.
'서시' 제3연~ 침략 물리친 선열의 얼 좇아 불뿜는 조국애 드넓게 떨치어 자랑스러운 민족사 영원토록 보전하리라.
각 연의 의미는 따로 해설할 필요 없이 총론적인 의미로 함축 설명 하겠다. 역사를 이어온 선열에 대한 외경과 조국을 위해 숨져간 호국의 열사에게 경외의 뜻으로 '서시' 의 첫 부분을 열고 다음으로 국난을 극복하여 민족의 맥을 이은 영웅들의 공훈을 찬양 하면서 오늘날의 풍요와 행복이 선열 때문임을 강조했다. 끝으로 선열의 위훈을 기리며 그 거룩한 뜻에 따르겠다는 우리들의 각오를 천명했다.
즉 전쟁기념관은 선열의 얼을 기린다는 측면과 그로부터 위훈을 이어받아 조국을 위해 헌신 하겠다는 맹세로 끝을 마무리했다. 따라서 전쟁기념관은 현재의 국가보위와 앞으로의 조국수호를 다짐하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교육장이다. 전쟁을 잊고 있을 때 위기가 닥쳐온다. 항상 전쟁에 대비할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유비무환' 의 진리를 일깨워 줄 것이다.
이 글 끝에서 한가지 밝힐 것이 있다. 전쟁기념관 정문 중앙에 서있는 시비 '서시' 에 관한 것이다.이 시비에는 그동안 기이하게도 시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없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전쟁기념관이 준공되었지만 그무렵까지 정치군인의 입김이 통할 때 였으므로 나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다.즉 전쟁기념관에 먼저 세워진 시비 '조국' 도 박경석인데 또 시비 '서시' 에까지 박경석 이름을 조각할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려 10여 년간 시 제목과 작시자 이름없는 유일한 시비가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2004년 당시의 전쟁기념관장 김석원 장군은 이사회를 소집 심의케 하여 합의를 도출한 다음 제목 , '서시 ' 와 ' 지은이 '박경석 ' 을 시비에 조각케 했다.
더 첨부 한다면 원래 정문 중앙에 설치토록 게획되었으나 그간 구석에 쳐박혀 있던 것도 김석원 관장이 원래 위치인 정문 중앙에 옮겨 세웠다. 내 걸어온 험난했던 발자취처럼 이 시비도 험난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정치군인들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나의 진로를 가로막아 왔다. 나는 그럴수록 힘이 더 솟구쳤다. 더 의욕이 샘솟았다. 내가 지치지 않고 창작을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이들의 견제를 헤쳐나가야 되겠다는 의지와 도전정신 때문이었다.
지금 용산 삼각지 전쟁기념관 구 정문 안쪽에 있는 시비가 바로 그 시비이다. 서시의 주제인 시비 바깥쪽 '전쟁기념관' 글씨는 전쟁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건축공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썼다.
조 국
젊음은 충정의 의기로 횃불되어
저 역사의 대하 위에 비추이니
오 찬연하여라 아침의 나라
영롱하게 빛뿜는 영혼의 섬광
이어온 맥박 영원으로 향하고
여기 찾은 소망 자손에 전한다
반만 년 다시 누만 년을 위해
곳곳마다 눈부신 꽃무지개 피어올려
승리로 이어지는 축제 삼으리
내 한 몸 으스러져 한 줌 흙 되어도
온 누리에 떨치고 싶은
오직 하나뿐 어머니인 내 나라여
글 박경석
글씨 김기승
설명
전쟁기념관 서쪽 회랑 중앙에 위치한 시비 '조국'
조국을 위해 전사한 영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살아있는 장병 모두에게 조국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우리가 승리로 쟁취한 조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이 시비의 글씨로 쓴 김기승(原谷 金基昇1909~2000) 서예가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다. 시비의 글씨체는 한글 원곡체(原谷體)로 명명, 명필로 알려져 있고 이 글씨체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 '조국'은 2000년 한국의 명시로 선정되었다.
호국 추모당
호국추모당
하늘에서 내리 쏟는 저 신비로운 빛줄기를 보라
그 눈부신 햇살 속에 자랑찬 겨레의 숨결 흐르고
호국 위해 숨져간 선열의 얼 숭엄히 솟구친다
오 자손만대 이어갈 자유 조국 충성으로 수호하리
이제 우리 앞날 더욱 융성하게 훤히 트이는 새벽
젊음 바쳐 나라 빛내는 영광의 길로 힘차게 뛰자
참고 : 비석 하단 세 등분의 작은 글씨는 호국추모당 내부 조형
작품에 대한 나의 단평과 작가 이름을 밝혔다.
이 추모당은 기념관 중앙 돔 바로 아래에 있어 돔 정상에서 내
리 쏟는 햇빛은 보는 사람의 가슴 속 깊이 경외로움을 느끼게
하며 신비의 경지에 도달케 한다. 기념관 명소 가운데 한곳임.
추모시에는 내 이름을 조각하지 않았다.
3.전쟁기념관에서
조국에 바치는 기원
박경석
곱게 단장하여 다가서는
당신의 밝은 체취
세월 조바심의 눈빛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지금은 갈라진 산하
당신의 영혼 잃고 말았습니다
상속받은 천 년 역사의 장 찢기운
후손은 6월을 불태우고
상잔의 모진 상처 남겼습니다
강토의 허리에 철책 둘러
동족의 숨통 죄이고
지하에는 땅굴 빚어
속 가슴까지 뒤척이는 오늘은
차라리 비극입니다
당신의 유산을 간직하지 못하고
두동강낸 우리의 죄과는
표류하는 거센 물살에
내던진 겨레의 긍지였습니다
욕망의 화신으로 변한 당신의
착한 백성은 어제도 오늘도
제각기 탑 쌓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이제 명징한 당신의 훈도
다시 뜨거운 손길 내리소서
혼돈의 겨레 불쌍히 여기시고
지난날의 역사
통일 신라와 고구려의 기상
빛나는 고려 문화
이순신의 '殺身救國'
상속받은 그때의 자리에
돌아가게 하소서
마지막 교각을 붙들고
구원을 간구하는 심정으로
선진 통일 조국을 염원합니다
2019년 새해 아침
전쟁기념관에서
나는 매년 새해가 되면 첫 달 가운데 기상이 좋거나 의미 있는 날을 골라 아내와 함께 전쟁기념관을 찾는다. 맨 먼저 구 정문 안쪽 서시를 읽고 서쪽 회랑을 찾아 전사자 전우에 명복을 빈 후 시비 조국 앞에 다가가 소리내 읽는다. 가끔 개관 날이 아니면 그대로 돌아오지만 개관일에는 내부 샅샅이 살핀다. 잘 진열돼 있고 의미 있는 설명이 좋다. 이렇게 훌륭한 전쟁기념관은 어느 외국 전쟁기념관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장소도 접근성이 좋게 선정 돼있고 남향 건축도 좋다. 처음 설계 시 헐린 육군본부 본관이 서향이라 기념관이 서향으로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이병형 장군이 남향으로 변경케 했던 광경이 떠 올랐다. 노태우 이병형 이 두분은 이 지랑스러운 전쟁기념관 건립 선각자로 기린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우리나라 유명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즉 국위 선양에도 한 몫 단단이 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국민에게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국군의 존재 의미와 강군 육성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또한 국민 교육 현장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16년 새해 첫날 나는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아 한국전쟁을 회상하다가 동족상잔의 슬픈 현실을 떠올리며 '조국에 바치는 기원'을 썼다. 전쟁기념관을 우러러보며. [끝]
20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