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걷는 불암산 둘레길/전성훈
간밤에 뿌린 비가 새벽녘에도 소리 없이 간간히 내린다. 평소처럼 아침 기도와 체조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까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며 고심한다. 두세 번 거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6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1년 만에 불암산 둘레길을 찾는다.
집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불암산 둘레길은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시작하여 태릉 삼육대학교로 하산하는 둘레길 코스이다. 이번에는 그와는 반대 방향에서 출발한다. 예전에는 1호선 석계역에서 버스를 타고 삼육대학교 정거장에 내려 삼육대학교 캠퍼스를 가로질러 불암산을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탓에 불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별수 없이 공릉동 코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병원 부근 공릉동으로 가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자동차로 그곳까지 가서 둘레길로 들어선다.
공릉동 불암산 둘레길 입구에는 산사의 일주문을 본 따서 시멘트로 지은 볼품없는 우람한 정문이 있다. 품격과는 관계없이 현판 내용은 자못 대단하다. “공릉산 백세문”, 동네 이름에 빗대어 불암산을 공릉산으로 바꾸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백세까지 살라고 정기를 주는 문이라는 뜻 같다. 너무 과도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창한 정문을 지나면 길 폭이 거의 3미터 정도 되는 큰 길이 한 동안 계속된다. 시멘트 포장도로이기에 그다지 촉감은 좋지 않지만 길 양쪽에는 숲이 무성하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약 25분 정도 걸으니까 이정표가 보인다. 서울둘레길 당고개 방향과 불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다. 당고개 방향 둘레길로 들어선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이른 시각이다.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산을 찾은 사람들을 드문드문 만난다. 무릎 연골이 많이 닳아서 계단을 올라갈 때는 괜찮지만 내려갈 때는 신경을 쓰며 조심스럽게 걷는다. 중계동 백사(104번지)마을을 지나면서 보니 길옆에 흰색과 붉은 색의 접시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물을 함빡 머금은 청순한 접시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 두 팔을 벌려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산자락에는 땅주인인지 아니면 밭뙈기를 부쳐 먹는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상추와 깻잎, 가지와 호박 등 여름 채소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다.
백사마을을 지나자 작년 여름 이 숲길을 지나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숲속도서관이 보인다. 어느 한 가족이 물기를 닦았는지 쉼터에 배낭을 벗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주전부리를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적하고 조용한 숲에서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정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신여고 뒷산을 지나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있는 쉼터를 발견하고 쉬면서 물도 마시고 글을 쓴다. 나무로 만든 쉼터 테이블에는 장기판이 그려져 있다. 숲속에서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세월을 낚는 늙은이들의 신선놀이로는 그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불암산을 관리하는 노원구에서는 은행나무골 뒷산에 체험시설을 마련하고 힐링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는 전망대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니 산허리의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넓어진다. 수락산 정상, 도봉산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에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 그리고 저 멀리 잠실 롯데타워와 청계산까지 보인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하지만 오늘은 안개가 뿌옇게 끼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며 둘레길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많아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는 더 올 것 같지 않는다. 상계동 재현고등학교 뒷산에 우뚝 선 남근석, 그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집안의 대를 이어야한다는 숙명을 안고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며 아들을 간구했던 남근석, 삼신할미의 자비로 태어난 손 귀한 집 사내아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물끼를 먹어 지탱할 수 없는 정도로 무거워진 나뭇가지에서는 호드득 호드득 물방울이 떨어진다. 자연의 이치는 참으로 신비하다. 너무 많이 받아드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면 스스로 내어놓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자정작용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이 땅에서 먹고 또 먹고 먹을수록 더 먹으려고 발버둥치는 생명체는 위대한 인간뿐인가 보다. 어미 뱃속에서 빈손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돌아가는 유약한 존재인데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아 무한정 상대를 쫓고 쫓기는 게임을 즐기는지 모르겠다. 그 알량한 자존심과 끝 모르는 욕심과 욕망은 정녕 내려놓을 수 는 없는 것인가 보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사물이나 풍경이 달리 보인다. 대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 그대로인데 인식하는 위치나 방향에 따라 같은 물체가 다르게 느껴진다.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길이라도 갈 때는 오른쪽으로 올 때는 왼쪽으로 걸으면 그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된다.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세상 이치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가에 따라 상대방의 행동이나 사고에 대해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인정하게 된다. 사회에 도움이 되거나 필요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과 주관적인 사고의 균형 잡힌 자세와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 개인 뒤 여름을 부르는 청아한 숲의 모습을 보며 꿈을 꾸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이웃과 더불어 웃음을 나누며 살았으면 하는 철없는 아이 같은 허망한 꿈을 그려본다. (202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