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7 장
무서워하는 종의 영 (2)
[註: 지금까지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 원문을 강해노트로 정리하면서 기본 원칙으로 구어체로 되어 있는 것을 문장체로 바꾸고, 내용을 요약하는 선에서 노트를 정리해왔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가 막바지에 가까울수록 문장의 구성이나 맥락, 흐름 등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부분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해노트부터는 어색한 문장이나 내용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부분 등을 자의적으로 수정, 삭제 또는 재배열하여 김성수 목사님의 신학적 설명이 더 깔끔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필자가 잘 못 이해하여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만일 이상한 내용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김 목사님의 원문 서적을 직접 읽어보시고 잘못을 바로 잡아주시기 바라며, 카페에 댓글로도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설교는 그 내용이나 성경해석의 관점, 교리 체계 등이 이제껏 있었던 그 어떤 신학자들도 보여주지 못했던 독보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이해의 경지가 시대를 통털어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탁월하고 독보적인 통찰력으로 성경해석의 신세계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되며, 매 주일마다 빠짐 없이 이어지는 설교는 세계적인 신학의 대가가 매 주일 공개하는 고귀한 신학 학술논문을 받아보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시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성경 연구에 몰두하시고 성경해석의 독보적 경지를 열어주신 목사님의 업적을 세상이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누군가는 언젠가는 목사님이 전 인생을 바쳐서 헌신한 결과로 맺어진 고귀한 목사님의 신학적 경지를 인정받게 하는 날이 오게 할 것으로 믿습니다. ]
- 요나도 광풍이 이는 바다에서 잠을 잤다. -> 저주의 스올 속에 빠져 죽는 예수의 모습. / 광풍이 이는데 잔다 ==> 광풍에 대해 상관없는 자가 된 것. ==> ‘이게 죽음이다’ 하면서 자는 것. / 그래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린다. -> “그래야 다른 이들이 살아” 말하는 것. / 그 삶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셨다. / “내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 예수님은 요나와 똑같이 배에서 주무신다. / “바다에 대해 죽는 거야, 그 바다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다나토스의 죽음이다” 말씀하신다. // 제자들은 광풍을 극복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강구하려고 주님을 이용한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네 믿음이 어디 있나?” 물으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 날이 참수당할 날인데 감옥에서 쿨쿨 잔다. 미련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 내일 참수 당하는데 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도 안 일어나서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발로 찰 때까지 잘 수 있나. / 이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저주의 립네(불 못)로 돌진하여 빠져 죽는 돼지 떼 이야기가 나온다. / 성경은 아주 일관성 있게 진행된다. 이 에피소드, 저 에피소드 막 붙여 놓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편집한 것이다. / 성경 내용을 똑똑 떼 내어서 교훈을 얻도록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은 전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두려움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의 속성이다. 그들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 빠져 죽는 돼지 떼, 뭔가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죽은 돼지 떼, 그들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다. -> 립네 얘기가 계속 이어지는 배경이다. / 사람들은 유황불못을 보아도 진짜 유황불못인 줄 모른다. 자기들의 꼬리 힘으로 열심히 살면 어떤 초월자가 그 속에서 왕성한 꼬리의 산물을 생산해 낸 이들의 차서를 매겨서 상을 주고 그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 그래서 그들은 겨루어 이겨내기 위해서 날마다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쟁하듯이 선교, 봉사, 성경공부를 하며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의 삶이다. / 그 자체가 지옥이며, 두려움의 불못이다. 그것이 어디서 흘러왔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답이 있다. 이것이 아들의 이야기이다. / 아들의 씨를 가진 자들이 과연 두려움으로 사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눅8: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다. 길가에 뿌린 것도 뿌린 자의 의도가 있다. 실수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이어서 뿌린 것이다.
(눅8:6-8)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지어다
- 종의 영과 그것으로 얻는 두려움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 씨(제라) ≈ 자손, 후손, 아들. / 창세기부터 일관되게 혼용해서 쓰고 있다. /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 [그 씨, 그 자손, 그 아들] = 하나님의 말씀. /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셨다. 아들은 말씀이다. -> 아들이 씨고 씨가 아들이고, 그 아들이 예수고 성경이다. / 그게 나다. / 그 씨가 우리를 아들로 만들어 낸다. / 그것을 이 비유에서 백이라고 표현한다. 백배라고 한다. 백 배(헤가톤 트 플라시온) -> 헤카톤 = 백. / ‘플라소’ = 빚다, 만들다. = (H:‘야차’)를 그대로 번역한 것. / [백 배] = [백이 되게 한다] / 백 배의 결실이 아니라 “백이 되게 하다, 백이 되다, 백으로 되다”라는 뜻. 백으로 결실하다, 백으로 빚어내다.
- 히브리인들: 백 = 완성, 뜻을 이룸, 아들, 언약의 성취 등으로 사용. / 히브리어로 성경이 기록될 때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다. / 숫자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부분이니 몇 군데 더 알아보자.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홍수 후 이 년” -> 무엇이 중요해서 이것을 기록했을까?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몇 년째에 성전(성막)이 완성되었나? 이 년이다. /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바로 앞 장: 셈은 히브리 온 자손의 조상이다. -> 하나님 아들들의 조상, 대표. 셈은 조상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 10장에는 셈의 아들 다섯이 나오는데 11장에는 하나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낳았다(‘아라드’)’는 여기서 하필 동사로 쓰였다. -> ‘아라드’ 동사가 “말씀으로 아들이 되게 하다”라는 뜻으로 성경에 쓰였다. -> 다섯 아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가 된 이는 아르박삿 하나밖에 없다는 뜻. 그런데 100세에 낳았다고 기록. -> 100의 때라는 뜻. 100세에 낳았다는 말이 아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약속의 후손 이삭도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았다고 기록.
(창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백 배나 얻었고”는 백으로 얻었다는 뜻. / 땅은(하 에레츠) 항상 성전을 의미. / 신약에서도 하 에레츠, 호게(헬라어: 성전)를 쓴다. / 성전에서 농사를 지어서 백으로 생산해 낸 것은 그가 약속의 아들이라는 말. /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백 배가 나오나? 그런 말은 아닐 것. / 성경이 과장해서 기록해 놓았을까? 농사 기법을 바꾸었더니 소출이 백 배 많아진 것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백, 진리, 완성 이런 말이다.
말씀이라는 씨는 반드시 백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면 ‘파라 호 호도스’. / ‘호 호도스’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제시하셨다. “내가 길이다”라고 하실 때의 그 ‘호 호도스’. / ‘파라’, 아주 멀리도 아니고 길 가운데도 아니고 옆에 떨어진다. -> 진리 가운데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떨어지면 공중의 새가 와서 홀랑 먹어 버린다. / 공중의 새 = 성전. / 새, 산, 하늘 -> 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성전이라고 쓴다. / [예수님, 진리]로 떨어지지 않으면 율법이 와서 홀랑 먹어 버린다는 말.
하나님이 바위에 떨어뜨린 사람이 있다. -> 바위 = 반석. / 반석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이 없는 반석은 율법이다. -> 결실을 못 맺는다는 뜻. / 성경은 예수라는 돌이 너희에게 떨어지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집의 주춧돌이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반석, 부딪치는 돌이 된다고 한다. / 거기에 같은 단어를 사용. 물이 없으면 그것이 거치는 반석이 된다. 율법이 되어서 그 돌에 맞아 죽는다. / 성경에서 간음한 자, 살인한 자 모두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 -> 그들은 (예수=말씀)을 율법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율법으로 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뜻이다. 돌로 찍어서 죽이라는 뜻이 아니다.
- 가시떨기는 무엇? 땅은 가시와 엉겅퀴만 낸다. 그것 역시 율법이다. / 그 씨가 가시떨기와 같이 자란다. -> 가시떨기로 씨가 자라면 율법으로 죽는다. / 지금 (씨/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돼지 떼 이야기, 광풍 이야기가 붙어 있다.
- 좋은 땅('호게 호 아가토스’) / ‘칼로스’=눈에 보이는 선, '아가토스’=선의 실체, 내용. / ‘아가토스’가 들어간 성전 = 진리가 된 어떤 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가면 ‘호게 호 아가토스’가 된다. / 바울도 “너희들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줄 모르느냐” 했다. 이것이 ‘호게 호 아가토스’이다. / 거기에 말씀이 진리로 떨어지면 그것이 백이 된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것이 진짜 씨. 백이 되는 씨이다. / 백이 안 되는 씨는 율법이다. 주님은 그 씨를 가진 ‘호게 호 아가토스’가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여기서 “지키어”는 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을 들어 마음으로 keep 한다는 뜻이다. / 착하고 좋은 마음이 ‘칼로스 카이 아가토스’이다. ‘아가토스’는 위의 것이고, 진짜 선이고, ‘칼로스’는 아래의 선이니까 아래의 것인 성전이나 성경이나 예수나 세상으로 위의 것을 알아 버리면 ‘칼로스 카이 아가토스’가 된다. 그것이 좋은 마음이다.
-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지 않고 좋은 땅, ‘호게 호 아가토스’ 안에 있는 씨라고 한다. 뿌려진 씨라고 하지 않는다. / 말씀이 진리로 안에 들어가면 그들이 ‘칼로스 카이 아가토스’, 좋은 마음이 되어 백으로 열매 맺는다. 결실한다, 아들이 된다.
- 진리의 영, 양자의 영의 침공을 받은 아들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되어서, 새 언약으로 주님이 말씀하신다. 새 마음, 좋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듣고 아들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 그 과정 속에 인내로 결실한다. 그 인내가 ‘휘포모네’이다. /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 아래 것 안에서 살아내야 하는 기간이 있다. ‘휘포’가 아래니까 그 전체를 ‘휘포모네’ 인내라고 한다.
- 살아 있는 것이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지 하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휘포모네’ 그냥 인내하는 것이다. / 인내라는 ‘아고’의 과정을 통과해서 아들로 결실하게 된다. / 말씀이라는 씨를 통해 아들이 되는 것을 ‘말씀의 씨의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아가페로 완성되는 것을 성경에서는 소금이라 한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할 때의 소금은 언약의 성취이다. / 말씀이 내 안에서 사랑으로 성취되는 것을 소금이라 하고,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빛이라 한다.
- 그 소금,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오면 그것을 씨, 말씀의 생명력이라 하고 그것이 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될 때 말씀의 영향력이라 한다. / 소금이면 반드시 빛이어야 한다. / 좋은 마음이 되어 씨를 마음으로 품고 아들이 되면 그들은 빛이 되어야 한다. -> 그래서 씨의 비유 다음에 바로 이어서 등불의 비유가 나온다. 그러면 비출 수 있다. / 내가 말씀을 마음으로 갖고 여러분에게 흘려주는 것이 비추는 것이다. /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빛이다. 세상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드러내 주는 빛이다. / 드러내고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붙든 것이 등불의 비유이다.
내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이 하는 질문:: 인간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배들이 내어놓았던 그 헌신과 삶은 무엇인가? -> 이것은 우매한 질문이다. / [내가 경계하고 경고하는 행위] = [진리도 알지 못한 채, 아래 것으로, 자기의 꼬리를 사용하여, 아래 사람들이 정의한 가치, 훌륭한 삶을 많이 내어놓고 생산해 내어, 그것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려 하고, 그것으로 내 천국을 쟁취하려고 하는 것, 그것으로 내 가치와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행위]. / 내 안에 진리를 사랑으로 품은 자들이 그것이 너무 소중해서 그 진리에 내 몸을 뺏기는 행위(=신앙의 선배들이 내어놓았던 헌신과 삶?)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공부하는 것, 열심을 내는 것이 행위인가?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는 것이 행위인가? 어떤 사람은 그것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마을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가야 하는 일이다. 그러한 헌신이 등불이요 빛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하신다. 내 백성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열심히 이루어내는 당연한 결과가 빛이다.
- 복음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들었으면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내 안에서 그것(소금,진리)이 되어야 한다. 그것(소금,진리)이 되면 당연히 내가 누리게 되고 누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같이 나누고 그 삶을 살게 된다(빛). / 이 4단계(들음, 앎, 소금, 빛)를 통과하지 않고, 듣고 앎에서 그친 이들이 십자가 복음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고 있다. -> 영지주의. / 그들은 막살아도 된다고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성경은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하셨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십자가, 피는 우상 숭배이다. 그것은 율법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그것은 내 밖에 말씀이 있는 것이다. / 씨가 백으로 결실을 맺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음 구절을 보자.
(눅8:16-18)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올바로 들으면 그 안에 있는 것이 감춰질 수가 없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아들의 영향력이다. 그 생명력은 반드시 빛으로, 영향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 그들은 말씀이라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아들로 탄생하게 되고, 다시 자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해서 위급한 형제들에게 씨를 흘려주는 삶을 살게 된다. / 등불 이야기 바로 다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이야기가 나온다. 형제들이 꾀가 많았는데 “누가 우리 엄마냐?” 묻는다. 거기서 도대체 무엇을 배울 것이 있는가? / 내가 등불이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어머니이고 그것이 씨를 가진 자이다. 그것이 아들이고 형제이다. /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냐는 질문에, “이것으로 내가 진리를 가르쳐 줄게” 하고 씨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를 부연 설명해 주신다.
(눅8:19-21)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착한 마음, 좋은 마음에 말씀의 씨가 떨어져 듣고, 마음으로 간직한 사람을 가리켜 “어머니이고 형제”라고 한다. / 어머니는 아들을 낳는 이이고, 히브리 사람들에게 형제는 위급한 상황에 있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 그를 건져내는 사람이다. / 둘이 같은 것을 소유하고 하나로 묶인 상태를 친구라고 한다. / 친구라는 단어는 부모와 부부 사이에서도 쓰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쓴다. / 친구가 되면 둘이(그것이) 하나가 된다. 그것이 형제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죽어 가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반쪽이 있는데 그게 신랑이다. 필요한 것을 전해 주어 그가 아들로 낳아주면 그것이 어머니이고 형제가 하는 일이다. / 씨, 말씀, 진리를 등불로 흘려주어 그들을 아들로 낳는 자들이 어머니이고 형제이다. / 여기서 “어머니와 형제가 예수님 밖에 서 있다.”고 표현한다. 안에 서야 한다. 길가에 떨어지면 안 된다. 밖에 서 있다는 것은 모형으로 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