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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한민구 |
월봉(月峰) 한기악(韓基岳)은 3·1독립선언문의 제작·배포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이며 동아일보 편집인·발행인, 조선일보·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그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과 민족운동의 구심체였던 신간회 창립을 주도했다. 동료 언론인 유광렬은 ‘내가 50년 동안 기자로서 본 바로는 주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이는 그뿐’이라고 자신의 저서 ‘기자 반세기’에 썼다. 이희승은 월봉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신문인으로서 동분서주하였는데 그것은 곧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의 언론인은 지사요, 독립운동가로서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준 의무라고 생각하여 불평 없이 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월봉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지사적인 언론인이었고, 기독교인이었으며, 논쟁에 말려들기를 신중하게 회피한 도덕가였다. 그는 사색인인 동시에 행동인이었다.”(‘한국언론인물지’)
월봉은 1898년 1월 14일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조림리(흥원창)에서 한정우(韓正愚)와 한양 조씨 사이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중종 때 사림파 선비로 중용된 조광조의 후손인 조종필(趙鍾弼)의 딸이다. 청주 한씨는 조선 초기에 고관 대작이 연이어 배출된 집안이다.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에 이어 월봉의 12대조인 한백겸(韓百謙)은 광해군 때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실학파의 선구자이다.
지도를 보면 월봉의 고향이 경기·충청·강원도의 3도 접경인 한강 상류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월봉산(月峰山)이 있으니, 그의 아호는 이곳에서 유래한 셈이다. 월봉의 조모는 왜군의 방화로 집을 잃은 마을사람들에게 한씨댁을 헐어 목재로 나누어 주고 한양으로 이사한다.
“이 무렵 세상은 점점 어지러워서 각처 의병은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근처 마을로 피란에 정신이 없고 총알은 대문, 중문을 뚫어 안기둥에 박히고 하루아침에 100여호 부락은 의병에게 통모하였다는 구실로 일군에 의해 방화되어 초토가 되고 동리서 좀 떨어진 산 밑에 있던 우리집만 남게 되어서 온 마을이 거처할 데가 없어 쩔쩔매게 되었다. 이때 증조모께서는 대영단을 내리시어 40여간 기와집을 내어 주시며 ‘서까래 하나씩이라도 가져다가 기둥 삼아 움이라도 파고 지내도록 하라’ 하셨다.”(한만년 ‘일업일생’)
한다면 하는 외유내강형
월봉은 소설가 현진건, 시인 이상화와 함께 ‘경성의 3대 미남’으로 꼽혔다. 그는 신문기자이면서도 술을 못해 상에 놓인 안주의 국물만 혼자서 다 마시는 통에 ‘한 국물’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희고 둥글납작한 얼굴, 빚어 붙인 듯한 코,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는 호치(皓齒)를 가졌었다. 그는 여기다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까지 가져 당시 경성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최상덕·소설가, 전 조선일보 기자)
월봉의 중앙학교 한 해 후배로서 오래 사귀어 온 이희승의 회고는 더욱 구체적이다.
“월봉은 미남자였다. 신언서판을 고루 갖춘 위에 탐스러운 얼굴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를 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심성이 부드러운 탓도 있겠지만 용의주도하며 예민한 이해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예의가 바르고 세심한 신사였다. 그를 가리켜 외유내강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심하면 혼신정력을 다하던 사람이었다.… 월봉의 언론인으로서의 생애에 대한 훌륭한 기록은 종석 유광렬, 동명 김을한, 고범 이서구, 성재 이관구, 천리구 김동성씨 등이 기왕에 써 놓은 것이 있어서 나 자신도 감회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월봉이 강의과감(剛毅果敢)한 언론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
월봉은 5대 독자이자 유복자였다. 때문에 손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는 할머니 생각에 그는 아무리 취해도 동료들에게 업혀서라도 반드시 집에 들어갔다.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 태기를 느끼지 못했던 그의 모친은 어느 지관으로부터 제절(除節·산소 앞 뜰)에 자손이 가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문상객들은 지관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지관의 예언대로 그의 자손들은 제절 앞에 가득하게 된다. 월봉은 1911년 의령 남씨와 결혼하여 3남1녀를 남겼다.
월봉의 장남 만춘(별세·경성제대 이공학부 졸업, 영국 노팅엄대 박사)씨는 연세대 이공대 학장, 대한전기학회 회장,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한 한국 전기공학의 원로였다. 그는 이순복씨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아들 민구(63·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미시간대 석사, 존스홉킨스대 박사)씨는 서울대 공대 학장, 전국공과대학장협의회 회장, 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한전기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김선애(57·이화여대 졸업, 뉴욕주립대 석사, 단국대 교육학 박사, 강남대 조교수)씨와 결혼했다. 딸 은구(59·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대림대 영어과 교수)씨는 동림인터텍스 대표인 서병일(59·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자손 번성
월봉의 차남 만년(작고·보성전문 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씨는 한국학 서적 출판에 공이 큰 일조각을 창사한 출판계 원로로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출판문화회관을 건립하는 등 ‘일업일생’으로 출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제1회 효령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의 맏딸 효숙(82·서울대 사대 영어과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이 둘째 동서, 안용팔 전 성모병원장(작고)이 셋째 동서다. 그는 4남1녀를 두었으며, 장남 성구(57·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이난숙(57·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차남 경구(55·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하버드대 인류학 박사)씨는 재외한인학회 회장, 한국국제이해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한국이민학회장을 맡고 있다. 부인 김시연(52·이화여대 사학과 졸업)씨가 일조각 사장을 맡고 있다. 3남 춘구(53·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박사)씨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김덕주 전 대법원장의 딸 수경(50)씨와 결혼했다. 4남 홍구(52·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워싱턴대 역사학 박사)씨는 서울대 교양학부 교수로 이관실씨와 결혼했다. 만년씨의 딸 승미(47·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하버드대 인류학 박사)씨는 대학학력고사 전국 차석을 차지한 재원으로 현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며 고려대 공대 교수인 김운경(52·하버드대 공학박사)씨와 결혼했다.
월봉의 3남 만청(77·서울대 의대 졸업, 방사선과 전문의, 서울대 의학박사, 하버드 의대 방사선과 팰로)씨는 서울대병원장, 아시아태평양 심혈관중재적방사선의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분쉬의학상을 수상했다. 김용완 전 전경련 회장의 딸 김봉애(73)씨와의 사이에 3녀를 두었으며 맏딸 숙현(45·연세대 심리학과 졸업, 파슨스스쿨디자인 MFA)씨는 이화산업㈜ 부회장인 조규완(48·오하이오대 수학과 졸업, 페어레디킨스대학 석사)씨와 결혼했다. 차녀 금현(44·이화여대 조형예술학 박사)씨는 콜로라도대학 객원교수로 풍원산업㈜ 대표인 백상익(47·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아이오와대 MBA)씨와 결혼했으며, 3녀 지현(43·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는 장재훈씨(보스턴대 경영학 석사)와 결혼하였다.
월봉의 딸 만증(81)씨는 윤여경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윤춘식(53·연세대 의대 졸업, 토론토대 소아과병원 연구교수, 중앙대 의대 박사)씨는 연세대 의대 교수로 조미원(41·이화여대 미대 졸업)씨와 결혼했으며, 딸 윤선식(56·이화여대 법대 졸업)씨는 경희대 산업공학과 교수인 이효성(57·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미시간대 박사)씨와 결혼하였고, 차남 윤호식(50·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씨는 미국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이다.
상하이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
월봉은 1914년 중앙중학을 졸업하고 보성전문으로 들어가 1917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나라 잃은 설움에 만주, 연해주 일대로 망명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상설, 이회영, 신채호, 이동녕으로부터 학업을 계속하라는 권유를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중앙학교의 동기동창 변영로 등 동기생들이 이미 가 있던 도쿄에서 메이지대학을 다녔지만 3·1만세운동에 앞서 있은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 준비 때문에 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월봉은 2·8 독립선언 후 3·1운동 준비를 위해 국내로 잠입해 송진우 중앙학교 교장을 도와 독립선언서 제작에 참여한다. 당시 최남선이 임규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썼으며 임규와 월봉은 이 선언문과 통고문을 일본의 정치인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신변이 위태로워진 월봉은 중국인 벙어리로 위장하여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원에 선출되며 4월 22일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에서 이시영 법무총장 밑의 법무위원 3인 중 1명으로 선임된다. 월봉의 임시정부 활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월봉의 손자 한용구 교수(성공회대·현대사)는 두 가지 요인을 들고 있다.(‘인물로 본 중앙 100년’)
첫째는 임시정부의 분열이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여파와 각성으로 이뤄졌으나 수립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배들은 파벌과 자리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더구나 월봉이 가장 존경했던 이회영, 신채호 등이 임시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 참여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월봉의 지기였던 언론인 유광렬의 회고에 의하면 이런 파벌 싸움이 여러 날 계속되자 월봉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내가 비록 나이 어린 청년이나 당신네들이 국민을 이끌고 나가는 처지로서 이럴 줄 몰랐다”고 통곡했다고 한다.
둘째 요인으로, 서울 장안에서는 월봉이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손위 처남 남상협을 통해 ‘조모 위독’이라는 거짓 전보를 치게 했다. 3대 독자에 유복자로 효심이 지극했던 월봉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19년 말경 일제의 체포를 무릅쓰고 귀국한다. 이때는 일제가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유화정책을 펴고 있던 때여서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구속하지 않고 방면하던 시기였다. 월봉도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희승의 회고에 의하면 이 무렵 월봉은 모교인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계동의 인촌댁 사랑채에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이때는 3·1운동의 재판에 관한 전략과 재판의 뒤처리로 이 사랑채에 민족적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월봉은 이들과 함께 그 뒷일을 처리하면서 자주 어울렸다.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일제는 1920년이 되자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민족신문 발간까지 허용하게 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박영효, 주주 대표는 김성수, 편집 감독에 유근 양기탁, 주간에 장덕수, 편집국장에 이상협, 논설반에 김명식·장덕준·박일규, 편집 간부에 김동성·진학문·한기악·민태원·염상섭·김정진·김형원·서승효 등이었다. 월봉은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기자, 편집국장 대리, 심지어는 잠시 발행인까지 맡아보는 등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1920년 7월에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대표자 중 1인으로 뽑힌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나온 월봉은 좀 더 행동적인 사람들이 모여 창간한 시대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옮긴다. 여기에는 벽초 홍명희 등이 있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월봉은 이 기간에도 사회활동을 벌였다. 민족자립자활을 목표로 하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기관지 ‘자활’ 발행인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3월에는 교육이 민족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라 생각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이종린·안재홍·박승철·최원순 등과 함께 대학 건립 운동을 벌인다.
1927년 초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망라한 민족유일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며, 월봉은 이상재·한용운·안재홍·홍명희·김준연·문일평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구국운동을 벌인다.
언론 통한 민족계몽운동
월봉은 이듬해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며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벌인다. 언론인 김을한은 ‘1925년부터 수년간은 언론인으로서 월봉의 황금시대였다’고 썼다. 그러나 이관구는 ‘황금시대라고는 하나 가지가지 고난을 겪은 시대’라고 다음과 같이 썼다.
“월봉 형은 따뜻하고 단아한 품성으로 동지들을 끄는 매력이 넘쳤거니와 불의에 굴하지 않고 부정을 싸워내는 강직 과감한 태도는 그야말로 민족전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서 그 직임을 완수케 한 이유였을 것이다. 비행 폭로기사의 출처를 추궁하는 일본 헌병의 협박을 보기 좋게 물리친 담력이라든지, 전남 하의도 소작 쟁의에 관한 기사 때문에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는 일본 앞잡이 박춘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빳빳이 세워두었다가 일갈 퇴치한 호기라든지, 또는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의 가끔 있는 주먹다짐에도 미소로 물리치게 한 기지라든지 갖가지의 일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일업일생’)
박춘금 권총사건은 당시 사회부 기자로 현장에서 목격한 김을한의 ‘인생잡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928년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에도 박춘금이가 동경으로부터 와서 전라도 일대의 작은 섬을 찾아 다니며 국유지라는 명목하에 도민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여 권총으로 공포를 발사하는 등 갖은 행악을 다 하므로 조선일보에서는 지국에서 그러한 기사가 오기만 하면 대서특필해서 박춘금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하루는 정작 박춘금이가 백주 조선일보사에 전 종로서 고등계주임이었던 일인 경부를 대동하고서 편집국장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그는 권총을 국장 책상 위에 꺼내놓고 기사를 취소하라고 대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월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를 않고 볼은 도홍색으로 상기된 채 ‘취소는 못하겠다’고 일관하니 독한 박춘금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박에게 고하 송진우 선생도 창피를 당한 일이 있었던 때이니만큼 약한 듯하나 실상은 강한 월봉에 대해서 우리들은 갈채를 보내었다.”
1930년 10월 월봉은 조선일보의 경영난 타개에 전념코자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업무이사가 된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난으로 식당 외상값도 갚지 못할 형편이었다. 월봉은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마련해 사원들에게 제공하다 결국 과로로 쓰러진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아들 만년씨의 기억이다.
“웬일인지 집에서 쌀과 간장, 된장을 퍼내고 매일 20~30명분의 저녁을 날라가고 저녁마다 10여명의 신문사 사원들이 식사를 하고 가고, 밤에는 노상 구수회의가 벌어지곤 했다. 얼마 후 선친께서는 병환으로 입원을 하게 되고, 집도 팔려서 우리는 왕십리 밖 안정사라는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했다.”(‘일업일생’)
월봉은 인촌의 배려로 그후 중앙학교에 근무하면서 일제 말 창씨개명에 반대하다가 1941년 6월 20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학교 사택에서 패혈심장판막증으로 별세하며 경기도 마석면 천마산 묘역에 안장된다.
내가 본 월봉 한기악 김관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전무이사 월봉 한기악 선생은 실학운동의 선구자 한백겸의 후예로서 조선독립청원서와 3·1독립선언통고문을 작성하여 일본 내각과 국회에 돌리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힘쓴 독립지사이다. 그후 귀국하여서는 조선·동아·시대일보 편집국장 등의 언론 활동과 신간회 활동으로 민족계몽 구국운동에 앞장서신 분이다. 순수하고 철저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월봉은 전형적 외유내강형의 지사이자 선비였다. 그분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 우리 문학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전’을 연재케 하는 강단과 안목을 지녔다. 일제의 압박이 어느 때보다 험하던 당시 신채호의 글을 동아일보에 받아, ‘조선사 연구초’ 등 단재의 주요 저작이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게 한 용기있는 선각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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