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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 만덕산 깃대봉을 다녀와서 ㅡㅡ
산 행 지 - 강진 만덕산 깃대봉
산 행 일 -2020,03,25(수)
누 구 랑 - 지인들과(3명)
산행코스 -석문산 용문사주차장-용문산-바람재-만덕산깃대봉-필봉-옥련사-백련사-다산초당-주차장
이동거리 12km 소요시간 5시간20분 이동시간 5시간10분 휴식시간 10분 평균속력 2.26km/h
오름 1005m 내림 1018m 출발지해발 14m 도착지해발27m
ㅡㅡ 산 행 지 도 ㅡㅡ
ㅡㅡ 산 행 기 ㅡㅡ
전세계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기를 펴지못하고 안절부절하며 바이레스와의 전쟁중이다 어디에도 같이 모여 앉아 마음놓고 술한잔 할수도 없는 요즈음 매주말이면 먼산행을 다니다가 미륵산에만 다니다 보니 짜증도 나고 해서 지인들과 나들이 산행을 떠났다 봄바람 맞으며 오래만에 고속도로을 질주하는 맛이란 쾌감 그맛이로다
(06:10)통영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린다 차량들도 없고 속도는 마음대로 달려도 큰무리가 없을 정도로 차량들이 적은 편이라 달려보는것 부터가 속시원하다 오늘은 남도의 진달래을 구경하려 강진으로 간다 해남,강진에는 두륜산,주작산,덕룡산,달마산 등 많은 산이 있는데 앞에 말한 그산들은 모두 5~6정도 다녀온산이라 오늘은 딱한번밖에 다녀온기억이 없는 만덕산으로 간다 강진 만덕산(萬德山;408.8m)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리 인기있는 산이 아니였다 동네뒷산처럼 높지도 않고 크게 도드러져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덕룡산(433m)과 주작산(428m)이라는 빼어난 명산이 곁에 있어 더욱 그랬다 다산초당과 백련결사로 유명한 백련사를 품고있어 문화유적지 답사를 겸한 산행지 정도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몇년전 개설된 구름다리 덕에 만덕산은 새로운명소로 떠올랐다 산줄기의 아기자기한 암릉과 함께 바다와 인접한 조망 또한 걸출해 탐방객이 몰리고 있는산이다 2016년7월2일 만덕산과 석문을 연결하는 110m 구름다리가 개통됐다 이다리 덕분에 만덕산~덕룡산~주작산~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구간으로 떠올랐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종주산행도 이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09:00)석문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준비한다 날씨가 완연한 봄날이라 가벼운 차림으로 시작한다
(09:03)주차장에서 용문사로 올라간다 올라가는길은 새로 포장한 아스팔트길이 산듯해보여 기분이 업되는듯하다
(09;18)용문사는 두분의 토불을 모셔놓았다는 전설이 있는 절이다 용문사토불(龍門寺土佛)은 오래전부터 두 구(購)의 토불(土佛) 을 모시고 있다 별원(別院)에 모셔져 있는 두 구(購)의 토불(土佛)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로서 고려시대 토불양식을 잘보존하고 있다 또 두부처의 몸은 흙으로 빚어졌지만 양손은 나무로 깍아 작은선 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예부터 영험이 많은 토불로 전해지면서 전국에서 소원을 빌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1975년 불상에 금분을 입힌 개금(改金)작업으로 치장되어 인법당에 부처님을 모셔지고 있다 용문사는 절경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말 아름답고 경의로운 곳에 사찰구경만해도 만족할만한 절집이다 용문사 뒤편좌측에 나있는 희미한 등산로로 초입산행을 시작 합니다 조금 올라서니 부엉이 바위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엉이바위는 용문사 우측 야산의 등산로 150m 지점에 있는바위로 앞쪽의 탄탄하게 내려온 절벽은 부엉이의 털많은 가슴을 연상 시키고 위쪽의 다소 두루뭉실하게 솟아난곳은 부엉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바위이다 이바위는 용문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며 실제 부엉이가 이바위에 자주 와서 울어서 절의 스님들이 오래전에 부엉이 바위라고 이름을 붙렸다고 한다 절집에서 오르는 바위봉이 날카롭고 급경사라 초입부터 만덕산을 오를수 있는지 실험을 하는듯하다
(09;35)석문다리 삼거레에 올라서니 건너편 출렁다리가 왔다 가라고 손짖하는데 올라올것을 생각하니 꿈속의 출렁다리로 남겨두고 올라간다 바위틈바구니에 피어있는 진달래가 방긋웃으며 반긴다 생강나무꽃과 진달래꽃이 함께 어우러져 발길을 잡는다 곳곳에 기암괴석으로 눈길이 자주 가는 바람에 바위길에 위험이 도사린다 조심해서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오르고 내려 서야한다
(10:39)석문다리 2.6km지점에 이정표가 서있고 발아래는 천길 낭떨어지고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모습은 강인지 호수인지 분간하기 어러울만큼 잔잔하고 고요하다 강진만 간척지에도 푸른 보리밭이 시원하게 펼처져 있다 우리고장에서는 보리농사는 멀리간지 오래된 이야기 인데 이곳엔 보리농사를 짖는 농가가 많은 듯하다
(11:20)바람재에 내려선다 바램재에는 기도원350m/임도380m/석문다리4,186m/만덕산정상744m 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있고 주변은 한적하다 또 깃대봉을 향해 올라서는데 직벽같은 릿지코스도 일행을 괴롭혀주고 지루하지않은 산길이다 만덕산은 지네처럼 긴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산과 골산이 혼합된 형태지만 작은 암릉들이 톱날처럼 능선에 솟아있어 제법 험하다 봉우리들의 고도차이가 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 하다보면 쉽게 지친다 도상거리도 만만치 않다 만덕산 등산로는 뚜렸하지만 그흔한 나무계단이나 철계단 하나 없는 자연그대로의 길이다 얼마전에 설치한듯한 밧줄을 매달아 놓은 곳은 여러곳에 있다
(11;43)다산초당삼거리을 지나 험로인 코스에는 예전에 없던 밧줄이 매달려 있어 다소 안전하게 내려설수 있었다 바위들도 미끄러운 바위들이라 안전에 주의를 요하는 산이다
(12:00)만덕산깃대봉에 올라섭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백련사는 푸른숲속에 파묻혀있는듯 겨울에도 푸른동백숲에 워어싸여 있는 배련결사로 유명한 절집이다 정상에는 청렴봉(淸廉峰)은 전남공무원연수원이 이곳 산자락에 2020년 이전확정된것을 기념하고 다산의얼이 숨쉬는 청렴정신(淸廉正神)을 가다듬다 (2016년새해아침 강진군) 이런표지석도 같이 있다
만덕산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도암면 봉황리에 위치한 산이다(고도:408m). 남쪽사면에는 기암괴석과 절벽이 많이 있고 동백나무 등의 상록 활엽수가 많다. 특히 이 일대의 동백나무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귀향살이를 할 때 거주하던 다산 초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강진)에 "만덕산 앞 봉우리는 돌 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라는 고려의 승려 혜일(慧一)의 시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명이 고려 시대 이전부터 불렸음을 엿볼 수 있다. 동일 문헌에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萬德山)이라 한다."는 윤회(尹淮)의 기문이 소개되어 있다.
"청구도" 에 만덕산에 "석봉은 아름다운 연꽃 같도다(石峯如美蓉)"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에 만덕산에 백련사(白蓮寺)가 표기되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때에 세워지고 고려의 원묘대사가 중수하였는데, 무의대사 때에 이르러서는 법화도량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이러한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널리 알려져 이 산을 백련산(白蓮山)이라고도 부른다. "1872년지방지도" 에는 돌산의 모습과 함께 그 아래에 만덕사(萬德寺)가 묘사되어 있다. 관련 지명으로 만덕리(萬德里)가 있는데, 이것은 만덕사에서 유래하였다.
(12:30)깃대봉을 지나도 능선길은 계속연결되고 옥련사방향1.8km라는 길을 내려서다 보면 마지막에 웃똑하게 솟아있는 필봉이 내려다 보이고 끝가지 암릉으로 연결되는데 일행들 지쳐서 못간단다 양지바른자리 잡아 앉아 허기진 곱창를 고구마 한뿌리로 달래주며 고갈난 칼로리는 어느정도 충전이 된듯하다 갈길이 멀어 곧장일어서 울퉁불퉁한 바위능선길을 걷는데 등로 주변엔 진달래가 만개하여 화사한 봄기운을 마음껏누리며 걷지만 발밑에는 불안한 돌뿌리들이 도사리는 바위길이라 신경 곧두세워서 가야 한다 넓고 비스듬한 바위 위쪽에 "구시골창봉"이 있다 광물을 채취한후 복원을 하지 않고 방치된 직벽이 넘어다보니 천길 낭떨어지이고 흉물스런 모습으로 서있다 내려서는길목에 "강진광업"이정표가 있다 광산을 허가 해줄때는 복원할수 있는 대금을 미리 받아 두는줄 알고 있는데 복원이 안된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13;15)몇봉우리를 넘고 넘어 마지막 봉우리인 필봉에 올라서니 목적지 옥련사가 모습을 들려내 보인다 옥련사 410m/깃대봉1,39km을 알리는 이정목이 왜 그리도 반가운지 이제는 육산이라 편할줄알았는데 급경사로인데다가 바닥엔 잔돌이 있어 스틱이 없으면 내려서기 힘들정도로 급경사이다 미끄러지듯이 내려서니 작은 벌목지같은곳이 나타난다
(13:22)샘터이다 샘의 규모나 모습은 예전에 물을 마실만큼 깨끗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수량은 많은데 주변이 너무 지져분해 한모금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샘터부터는 나무로 다닥에 묻어놓은 나무계단과 통나무 계단을 해놓아 다소 내려서기가 편하다
(13;32)옥련사에 도착한다 옥련사(玉蓮寺)의 안내문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세상에 살았던 생애는 80년이 불가 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세월이 지날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그는 불교라는 한종교의 창시자이기에 앞서 우리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몸소체험하고 그 자각(自覺)을 선언한 최초의 인간이다 생명과 존재의 실상(實相)을 깨닫고 지혜와 자비의 길을 열어보인 구도자(求道者)였다 그는 신비의 장막에 가린 신이 아니고 인류의 역사안에 살았던 인간이었다 그가 일찌기 이지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진리(眞理)를 찾아 왕자의 자리도 박차고 출가(出家)하여 견디기 어러운 고행(苦行)의 끝에 지혜의 눈을 뜬 부처님은 사십구(49)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께 여러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해 몸소 자비를 구현한 부처님은 육신의 나이 여던(80세)으로 이 세상을 떠나 갔었지만 그 가르침은 어두운밤에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부처님은 큰힘이 있어 모든장애(障碍)와 마구니를 항복 받음으로 대웅(大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에는 본존불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일체중생의 마음과 몸의 괴로움을 지혜로서 구제 하여 주시는 문수보살(文殊菩薩)님을 모셨고 오른쪽에는 일체중생의 영원한 행복을 덕으로 실천 하도록 이끄신다는 보현보살(普菩普薩)님을 모셨다 옥련사는 약70년 전에 창건한 비구니 절이다 가람배치가 아득한맛은 떨어지지만 대웅전에 안치된 목조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188호)이 볼거리라 하는데 대웅전문은 굳게 닫혀 있어 참배도 못하고 내려서는데 훤개들이 떼를 지어 대들어서 혼줄이 나고서야 벗어 날수 있었다 무슨 절집에 많은 개를 키우는것은 참배객들을 오지마라는 것인지 ~~~~
이렇게 산행은 종료하고 차량회수하여 백련사로 올라간다 백련사 이곳의 동백꽃은 일부려 찾지 않는다 시선가는곳이면 어김없이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처음에는 너무 예뻐서 발걸음을 멈추지만 이내 익숙해 졌는지 어느새 그냥 지나처 버린다 누군가 예쁘게 만들어놓은 심궁 하트 거기에 더보태어 쌓아 올려놓은 동백꽃은 일부려 예쁘고 오므라진것을 찾는다 동백꽃으로 탑을 만들 심산인지 모르겠으나 나도 그리고 그뒤에 오는 사람들도 그곳에 하나둘씩 올려놓았다 계곡좌우로 빡빡하게 자라는 동백 나무에 빨간동백이 점점이 박혀있다 피어난다는 말은 이곳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그많은 꽃들이 피었다고 하기는 너무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절집을 찾는 이들이 몇 되지는 않지만 누구하나 절집 입구인 해탈문은 뒷전이다 이미 꽃이핀 길에서 해탈의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깨달아 가는것인지! 큰법당에 들려 참배하고 나와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긁은 기둥에서 구불구불자라는 가지는 일정한 정열로 보이며 가지런하다 소사나무의 억척스러움과는 다른 고고한 기품이 흐른다 백련사는 천년이 넘은 절집이다 신라시대 800년경에 무염국사가 만덕산이라는 산이름을 따라 만덕사라고 명하여 창건했다 이후 중건 중창을 반복하다가 고려 공민왕자가 백련사에 살았다고 할정도로 흥했지만 나라가 혼란해지고 폐허에 이르른다 절집옆 동백숲으로 들어선다 빛이 없으니 어두운것은 당연하지만 음하지 않다 밝은 햇살이 치렁치렁한 가지 사이로 삐죽이 들어오는 모습은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천년기념물제151호"로 굳이 이런칭호를 붙이지 않더라도 이곳 동백림은 귀하디 귀한 곳임을 몸으로 눈으로 깨닫게 된다 누구의것인지 알수없는 부도탑은 동백림이 내주는 기운을 받아서 고려시대부터 이제껏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걸까? 아니면 부도탑 주인의 덕으로 숲이 이토록 울창하게 유지되고 있는걸까?
다산초당을 들려 본다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곳이다 그중 가장 오랜기간(11년)을 머물며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후인 1801년(순조원년)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이재,고성사,보은산방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 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글읽기와 집필에 몰두 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등600권의 저서를 남겼다 당시의 저술할때 18인의제자들의 역할이 켰다 초당아래에 다산제자윤종진(尹種軫)의묘가 있다 이분은 다산선생이 초당에서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윤종진(尹種軫,1803~1879)선생을 묘신묘소이다 선생의자는 금계(금계)호는 순암(순암)이며 부친은 강진읍내에서 다산을 모셔온 윤규로(尹奎 魯)이다 다산선생께서는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겨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함은 물론 제자들을 문답식으로 지도하였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을 위해 순암호기(淳菴號記)를 직접 써 주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 가게 되자 순암은 18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해 평생 동안 차(茶)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차는 금릉다산향(金陵茶山香)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는 186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 하였으며 추사 김정희,백파 신현구와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순암총서(淳菴叢書)를 남겼다 부인인 광주(廣州)이씨(李氏)와 합봉이다 현재의 비문은 1914년 성균관박사이금(李嶔)이 썼다
초당마당에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란 연못이 있는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다가의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후 제자들에게 보낸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이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 내었다고 한다
이렇게 둘려보고 내려섭니다
오늘 만덕산 산행은 많은 덕을 쌓아야 종주할수 있다는데 험한 산릉선에서 득도는 못했지만 험한세상 살려면 어러운 고비도 숱하게 참고 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옛역사 ,문화 탐방을 겸한 산행이였다
ㅡㅡ 산 행 사 진 ㅡㅡ
용문사 안내표지석 여기서 산행들머리 입니다
용문사주변의 풍광들
용문사주변의 풍광들
용문사주변의 풍광들
용문사주변의 풍광들
용문사경내의 풍광들
용문사경내의 풍광들
석문 출렁다리가 보입니다
석문다리로 하산하는 삼거리
괴암들
흔들바위 같아 보입니다
석산의 절개지가 보입니다
생강나무꽃과 진달래가 잘 어우러 집니다
이름모르는 노란꽃
바람재
등로 주변의 괴석들1
등로 주변의 괴석들2
등로 주변의 괴석들3
다산초당 삼거리
등로 주변의 괴석들4
등로 주변의 괴석들5
오늘 동행해준 유일한 홍일점 민지네
먼길 운전하며 험한산에 동행해준 강사장 감사 합니다
두번째 오른 깃대봉
오늘 두사람 잼납니다
강진만 간척지 보리밭과 고요한 강진만의 잔잔한 모습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별하기 어러운 잔잔한 강진만
이렇게 밧줄구간이 20여곳에 있었다
마지막 필봉에서
버려진 샘터
옥련사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