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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의 빛 원문보기 글쓴이: 열린마음
17. 나, 우리 그리고 하나님
이야기는 다시 27년 전의 전도사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제가스 교회는 일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임을 해야 했다. 교회의 급성장이 주 원인이었다. 교회?갑자기 활기를 띄게 되자, 이런 분위기에는 익숙하지 못한 한 중심되는 가정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 것이었다.
비제가스 교회를 사임하자, 우리 가족은 정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중국인 고씨 누님 가정이 북미로 재이주하게 되면서 집이 팔리지를 않아서, 집이 팔릴 때까지만 그 집을 지켜준다는 조건으로 우리 가족은 그 집에 입주하게 되었다. 비제가스 마을에서는 가장 넓고 튼튼한 집이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숨은 이런 경우에는 이렿게 미리 준비해 두셨다(여호와 이레 –창22:14-).
고씨 누님은 북미에 정착하자, 가까이에 있는 독일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씨 누님은 영어를 못하는지라, 설교는 못 듣고 다만 기도처를 얻기 위해, 주일이면 대예배시간에는 반드시 참석하곤 했다. 그 해 부활절이 다가오던 어느 주일이었다. 광고 시간에 목사님이 신도들에게 부활을 상징하는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 오라고 말씀하셨다. 이 광고도 동행했던 아들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 이 자매님은 자기네 사업체인 중국식당 ‘카운터’에 앉아서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비제가스 교회에서 들은 것들을 종합해서 작품을 하나 만들어서 교회에 제출했다. 목사님이 작품의 뜻을 물으셨다. 이 자매님은 아들의 통역을 통해 작품의뜻을 설명했다. 목사님은 작품 설명을 들으시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설명이 끝나자, 이 자매님에게 그 교회에 입교를 권하시는 것이었다. 이 자매님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사양하면서
“저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교회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어느 교회건 친구만 생기면, 저는 친구 따라 그 교회로 당장 갈겁니다.”
하는 말로 사양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오늘 입교하고 내일 옮겨도 좋으니 입교하세요.”
이 자매님도 한 번 낸 말은 좀 해서는 거두는 성미가 아니었으나, 목사님의 너무나 끈질긴 권유에 굴해서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단 등록교인이 되자, 매주 한 차례씩 그 교회의 서기가 심방을 와서는 혹시 무슨 불편한 일은 없는지를 알아 가서는 교회가 보증을 서서, 어떤 어려운 일도 즉시 해결해 주었다.
그 교회에는 동양인도 여러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허락되나, 등록교인으로는 받아주지 아니했다. 동양인으로서 등록교인은 이 자매님이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뒤 이 자매님이 알젠틴에 다시 오셨을 때는, 나에게 감사한다면서 그 집을 내 이름으로 무상으로 명의를 이전해 주고 올라가셨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 마을의 중국인들의 눈에 불꽃이 튀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는 우리 동족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국제적으로 십자가를 져야하는 길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 마을에 정착한 우리 교민들은 거의 모두가 편물 하청일을 하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유대인 가게에서 털실을 얻어다, 짜서 납품하는 싻일이었다. 이런 품종은 한여름이면, 자동 ‘바캉스’에 들어간다. 한여름에 털옷을 찾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마을의 교포청년들은 가정 사정이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이민 와서 서툰 외국어로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서 가업을 도우면서,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막연하게 세상을 원망하면서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공을 차는 일이었다. 죄없는 가죽공에게 울분을 송두리째 쏟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도 한 두 번이 아니고 매일같이 되풀이 되다 보니, 지겹기도 했다. 이들을 지켜보던 나는 안타까왔다. 그래서 하루는 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희들, 기독교를 쉽게 그리고 짧은 시간에 알아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 하루 한 시간씩 해서6시간이면, 충분하다. 장소는 우리 집으로 해도 된다.”
지겨워만 보이던 이들의 얼굴에 동요의 기미가 보이는가 싶더니, 갑작이 분위기가 밝아지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지겹고 권태롭던 얼굴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나의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하기 단기 집중 교육’이 계획되었다.
나는 이들과의 약속대로, 한 주간 안에 이들이 ‘성령’을 받아, ‘거듭 나’는 단계까지 끌어 올려야 했다. 이들에게 아직 ‘성령’이라던가, ‘거듭 남’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결국은 ‘성령’을 통한 ‘거듭 남’에 있느니 만큼, ‘거듭 남’으로 귀착되지 않는 기독교 교육이란 무의미한 공론이요, 시간 낭비일뿐이다.
강의는 이들의 수준에 맞게 그리고 쉬운 말로 성서의 기본사상을 풀이해 나갔다. 너무나 뜻밖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 젊은이들은, 호기심은 흥분으로, 무관심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분위기가 양분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시간을 하루 앞둔, 다섯 번째 강의가 끝난 광고시간이었다. 나는 그 동안 내내 고심해 오던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최종 단안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몰린 것이었다. 그 문제란 역시 ‘성령’ 문제였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와의 성서 연구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틀에 박힌 ‘프로그램’을 따라, 사람이 정한 날, 사람이 정한 시간에 성령을 받게 된다는 강의는 그 동안은 없었고, 지금이 최초로 시도해 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만약 안 되면....?)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성서의 첫 마디 말씀은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라는 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수고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먼저’ 해주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물’이다. 은혜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이다. 갓난 아기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데도, 어머니가 일체를 다 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 지식이란 다만 ‘두려운(창3:10)’ 하나님일뿐이다. 두려워서 고개를 숙이고, 도망갈 길만 찾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가르쳐 주시는 길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먼저’ 가르쳐 주시는 지식을 ‘계시’라 했다. 그 ‘계시’의 내용이 ‘은혜’요, ‘믿음’이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죄 사함’과 ‘성령’을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다는 선언이다. 성령을 ‘은혜’로 ‘이미 주셨다’면, 어찌하여 신도들은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공허”해하며, 계속 ‘갈급’해하는가 ? 받아들이는 ‘수용’이 되질 않아서였다. 신도들이 느끼는 성령의 ‘감동’이란, 예수님이 나의 마음(영)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knock’일뿐으로, 여전히 예수님을 나의 ‘심령’ 밖에 세워두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결국 인간 쪽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 동안의 강의는, 이미 주신 성령을 받아들일 마음(영)의 준비를 위한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받아들이
는 ‘영접’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회 교육에는 이 ‘영접’ 방법 교육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영접’이란 마음에 받아들이는 ‘수용’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신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음이란 ‘혼’이며,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중심’(삼상16:7)이라는 ‘영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성’이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해온 것과 같은 집중 ‘영성 특별교육’이 필요했다 그 특별 교육이란, 신도들의 의식이 각자의 ‘영성’에 미치도록 지도하여, ‘영성’이 ‘의식화’되도록 하는 교육을 말한다. 만일 나의 이런 이론이 성서적이요 진리하면, 그 동안 강의를 들었던 청년들은 다음 시간에는 틀림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한다....?)
나의 고민은 여기까지 왔다. 하나님은 정말 ‘은혜’로우시고, 성서가 진리라면, ‘은혜’의 이론 대로 청년들은 틀림 없이 성령을 받게 되어야 할 것이었다. 만약 안 된다면, ‘은혜’는 거짓이며, 성서는 믿을만한 책이 되지 못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일이며,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결심하게 되었다. 만일 은혜의 이론 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청년들이 ‘은혜’로 성령을 받게 되지 못한다면,
(나는 목사직 그만둔다 !!)
나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그래서 미리 광고를 하기로 했다. ‘목사’의 생명을 걸고 하는 광고였다.
“내일은 여러분이 성령 받는 날이니, 그렇게 알고 마음에 준비를 해서 나오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다음 날 모였을 때는 분위기가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미리 준비해둔 내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강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드디어 결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 순서는 강의 내용의 진리성을 확인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확인하는 방법은, 다 함께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각자의 ‘영성’을 깊이 의식하면서, 그 ‘영성’을 예수님을 향해 돌려세우고는 ‘영성’의 문을 예수님을 향해 활짝 열면서
“내 심령을 주님을 향해 돌려 세웁니다. 내 심령의 문을 활짝 엽니다.
주님, 내 ‘심령’에 들어오셔서, 내 ‘심령’의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
내 ‘영’을 주님께 드립니다. 받아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5분 동안 다 함께 묵도를 드리도록 지시했다. 나의 지시를 따라 청년들은 고개를 숙이고 묵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실로 너무나 엄숙한 순간이었다. 묵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다들 성령에 취해 다른 얼굴들이 되어 있었다.
(후------!)
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성서는 과연 진리였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성령은 과연 ‘은혜’로 받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해서 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갔다.
진리는 ‘현상’에 관한 설명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있는 ‘현상’을 ‘나의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상’에 관한 바른 이해와 ‘수용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 날은 비행기를 타는 사람에게 특별한 용기가 필요치는 않으리라. 그러나 최초로 비행기에 올랐던 사람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죽음의 각오 없이는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 비록 죽게 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
기어코 해보고야 말겠다는 용기라면, 그것은 용기의 선을 넘어서 순교의 각오가 아닌가 ! 진리에 목숨을 걸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각오’요, ‘고독’이며, ‘용기’요, ‘믿음’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광’이었다.
만약 나의 인생이 순탄하지 못했다면, 이유는 진리를 위한 나의 모험심 때문이었다. 세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대로가 아니라, 숨겨진 진리를 찾아서 그 진리를 내 인생에 적용시켜 보겠다는 의욕 때문이었다. 이런 의욕을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피해갔다. 대중은 나를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는 시끄러운 존재” 라며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진리는 나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이 진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의 고난과 희생은 보상을 받고도 남는다.
이 진리, 이 축복, 이 희열, 이토록 넘치는 생명을 교민들과 나눠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해보면, 전통에 눈이 가려진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볼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민망한 심령들이었다.
기독교 ‘정예화 운동’은 이 시대의 요청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미 하셨던 일이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 이전에 민족적 ‘정예화 운동’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셨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정예화’ 된 일꾼들만을 하나님은 쓰셨다. 사사시대의 기드온 300명의 용사가 그 한 예이며, 아브람도 하나님께서는 75년을 기다려서 믿음의 조상으로 쓰셨다. 물 타 멀게 만들어서 분량만 늘린 식의 부흥이란 바른 기독교적 부흥은 아니다.
강의를 듣고 있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비교적 돋보이는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선량한 순종형으로, 평소 남들과 다투는 일 없이, 지혜롭게 살아 가는 평화주의적 지성파였다. 이 청년이 가장 크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매사를 내가 지시하는 대로 정확하게 따라 주었다.
이 청년은 자신 속에 변화의 낌새가 느껴지자, 더욱 바싹 달려붙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이 일만은 더 깊이 알아 봐야 하겠다며,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한 청년은 달랐다. 기준이라던가 원칙을 비웃으며,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며 살아 온 청년이었다. 이 청년이 복음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불쾌했던 것은, 그의 진심이 폭로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진심만은 ‘선량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유는, 그가 어떤 꺼림직한 일을 했을 때, 마음에 느껴지는 가책이, 자신의 진심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진심’이란 바로 ‘영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성’의 특징은 모든 부정적이고도 파괴적인 ‘악의 힘’인 ‘죄’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로마서1장18절에서 32절까지에 실려 있다. 이 청년은 당황하다 못해, 증오로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청년들이 이 반대자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마을 청년들은 사전 준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당하게 된 성령체험과 자신의 변화에 놀라면서도, 이 변화가 오히려 불편하고 두렵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 경험한 변화를 소화하지 못하고, 내심 도망갈 길만 찾고 있던 참이었다.
드디어 이들 다수와 지성파 청년 한 사람이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될 날이 오게 되었다. 그 많은 청년들을 상대로, 혼자서 조금도 굽힘 없이 하나 하나 정연한 이론으로 반격하면서 설득해 나갔다. 평소 남들과 다투는 일 없이 평화롭게만 살아 온 이 청년의 어디에 이런 숨은 힘이 있었던가 하고 다들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 청년은 드디어 기준을 찾은 것이었다. 강해야 할 때와 약해도 될 때, 주장해야 할 일과 양보해도 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벌써 젊은이들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다. 목회자는 신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지도만하면, 다음은 하나님이 친히 그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사랑으로 어린 ‘새싹들’을 만나시고,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겨냥한 교육은 결국 평신도 ‘정예화’ 교육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교회의 대형화는 반세기 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 임시로 유행했던 방식이었다. 그 때는 교회 지도자들은 서툴었고, 모든 점에서 미숙했던 때라, 사람의 머리 수로라도 교회당을 채워햐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평신도 정예화 시대이다. 아직도 교회의 대형화에만 마음이 쏠려있는 지도자가 만약 있다면, 그는 신도들을 정예화시킬 프로그램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지도자로 보면 틀림 없겠다.
정예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인격이다. 들은 지식을 소개하는 정도로서는 신도들을 정예화시킬 수 없다. 지도자 자신의 인격이 먼저 정예화 되어 있어야 한다. ‘영성’ 정예화라는 것은 ‘전인교육’을 뜻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신의 인격이 먼저 그
리스도 안‘(요15:5, 롬8:1)에 있는 인격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우러러 섬기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요15:5)’
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된’ 인격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경지를 복음의 ‘내면화’라 한다.
청년들 사이에서 불꽃이 튀고난 다음 날 새벽이었다. 요란한 대문 소리에 놀라, 온 가족이 깨어 일어났다. 나는 문을 열고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 청년의 아버지였다. 느닷 없이
“내 아들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 ?!”
하고 소리지르면서 당장 주먹이 날라 올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빛에서 안도를 느끼게 되었다.
(저런 눈으로는 사람을 치지 못한다.)
그의 눈은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 하나만은 동리가 떠나갈 듯이 요란했으나, 그는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손 안에서 사랑스럽게 굴던 아들 ! 이 세상 어디에 내어놓건 부끄럽지 않던 아들 ! 온 세상이 부러워하던 자랑스런 아들이었
다. 이런 아들이 밤사이에 ‘공룡’으로 ‘거듭 나’서,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만 것이었다. 아버지로서는 다만 멀거니 쳐다보기만 할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나에게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 펄펄 뛰면서 몇 마디 소리를 더 지르고는 이내 풀이 죽어서 돌아갔다.
나는 빈민촌 교회의 동역자였던 ‘아낄리나’ 자매님의 교회를 빌려서, 교민을 대상으로 다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깨끗한 교회당이었다. 신도 수는 청년 한 사람. 청년 한 사람을 앞에 앉쳐 두고 일요일 오후 2시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
라는 신념으로 교회 문부터 먼저 열고 본 것이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이었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뜻밖의 장정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채웠다.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이 뒤를 돌아 보고는 히죽히 웃었다. 이렇게 해서 ‘에덴교회’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 새신도들은 이 곳의 한인사회에서는 비교적 일찍 시작한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배운 사람들로서, 이들은 교회를 자기네 집보다 더 사랑했던 그 사랑이 상처를 입게 되자, 드디어 그 교회를 떠나야 했다. 교회에서 상처입은 마음은 다른 교회에서 치유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알젠틴 교민사회에서는 그런 교회가 쉽지 아니 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를 하나 새로 개척하기로 뜻을 모으고, 믿을만한 지도자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가운데 북미에 계신 K목사님이 알젠틴에 지교회를 하나 개척하실 뜻이 있으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교회에 참석하기로 뜻을 모으고는 계속 K목사님과 연락을 취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기를 일년을 끄는 동안, 이들은 드디어 지치게 되었다. 신도 대표가 북미로 직접 올라가서 K목사님의 사정을 알아보기도 하고, 재촉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미 선교계획 무기 연기 !”
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날라 왔다. 기다리기에 이미 지쳐 있던 이들은 훌훌 털고 미련 없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신도들 가운데서 한 무리가 우리 ‘에덴교회’로 온 것이었다. 나는 즉시 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교육에 들어갔다. 비제가스 청년들을 지도했던 교재를 더 보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각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바른 방법만 소개하면 되는 일이었다.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든 이유는, 바른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서, 자기 생각대로만 하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은 ‘무조건 신앙’이라 해서 무조건 열심만 내면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란, 실은 ‘주관의 객관화’라 해서,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미화시킨 하나의 ‘자화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신수준 이상의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민족마다 그들이 알고 섬기는 신이 모두 달랐다. 희랍인들의 신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란 모두가 희랍인들의 마음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신은 모두가 ‘우상’이다. 요한복음 17장15절에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신학박사 한 분이 알젠틴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이,
“목회에 성공해서 큰 교회를 세워서, 세인의 부러움을 사는 중년 목회자들이, 이제는 더 배워야 하겠다면서, 도미 유학을 서두나, 실은 다시(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하겠다는 때늦은 깨달음 때문이라”
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 그 동안은, 인간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우상화된 ‘자기자신’를 전해서 그렇게 큰 교회로 키웠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내 우상’을 전해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바른 교육이 우선해야 했다.
신도들이 우리 ‘에덴교회’에 막 재미를 들이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이K목사에게서 또 다른 소식이 날라왔다. “곧 내려간다.”라는 소식이었다. 그 순간 내 가슴에는 ‘철렁’하고 불길한 예감이 파문을 일으켰다. 불안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국외 선교라면 사전에 어느 정도의 준비는 갖춰진 다음에야 생각할 일이었다. 그런 일을 불과 한 달 사이에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아니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복선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어쩌면K목사 왕국의 세력 확장을 노린 지교회는 아닐런지....?)
만일 그렇다면, 그 동안 동지의식으로 뭉쳐있던 신도들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집단부터 먼저 깨야 한다. 그럴려면 시간을 끌면서 이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막바지에 가서 결정타를 치는 것이다. 그 결정타가 ‘무기연기’ 라는 통보이다. 그러면 이들은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가 교회를 선택해서 등록을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비록K목사님이 내려온다 해도 이들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등록한 교회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돌아오는 신도가 혹 있다손 치더라도 그 수는 소수일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무력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문을 열게 되는 교회는K목사님이 미국 시민권 소지자라는 개인 인기와 사모되는A선생님의 인기를 이용하여 사람을 모와도 된다는 계산은 아니었을까 ?
(그 때는 목사들마저도 ‘천당’은 못 가도 ‘미국’만은 가야하겠다고 눈에 불을 켰던 때였으니까.)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비록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조직을 갖지 못한 개체들이라, 무력할 것이다. 그 중에는 목사에게 충성하겠다며 접근해오는 아첨배도 있을 것이고, 신도들 사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노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내분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 해서 당장 그 교회를 떠날 사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느 교회로 가건 ‘말석’ 밖에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되면 다음 순서는 정치목사에게는 순풍에 돛단 격이 된다. 만약K목사의 속셈이 이렇다면, 앞으로 서게 될 교회는 우리 사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종교집단이 되고 만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담....?)
그러나 나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일단A선생님의 신앙적 인격을 계속 믿기로 했다. 그리고 가정적 불편에도 불구하고 별 잡음 없이 그 동안 가정을 이끌어 온K목사님의 신앙적 양심(?)을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남은 것은 신도들의 문제이다.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신도들이 따라 주지 않으면 헛 일이 되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 우리 교회로 온 신도들을 돌려보낸다...?)
우리 교회로 온 신도들을 돌려보내어서, 지금K목사님에게서 연락을 받은 그 집사님을 도와서 교회의 중심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무질서와 혼란은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 나의 선교 의미가 교민사회의 복음화에 있다면, 나는 이 모험에 뛰어드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민사회의 개척기이다. 이럴 때일수록 바른 시작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네 교회’니, ‘내 교회’니 하고 따질 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도들을 찾아가서, 그 ‘교회’로 다시 돌아가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바위에 대침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이들은 막 무가내였다.
“목사님, 우리는 과거에 그분들과 한 교회에서 이미 같이 지내 봤기 때문에, 그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할만한 인격들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싫습니다.”
물론 예측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해 나갔다.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나는 그 때 이들에게서 한 가지 오해를 사고 있었다. 그 오해란, 나에게 무슨 숨은 계획(북미로 이주할 계획)이 있어서 이 기회에 교회 문을 아예 닫을 심산이라는 오해였다. 그래서 하루는 한 신도가 물어 왔다.
“목사님은 우리를 그 교회로 돌려보내고 나서, 목사님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찾아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면 됩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나의 설득에 좀처럼 움직여 주려 하지 않았다. 드디어 신도들에게서 한 가지 타협안이 나왔다. 나도 그 교회로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들은 그 교회 안에서도 계속 나를 의지해야 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만일 목사님이 안 들어가시겠다면, 우리도 안 들어가요.”
이것이 결론이었다. 그러니 답은 내 손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을 깊이 생각했다. 신도들이 그 동안 교회를 통해 보고 배운 것은 ‘정치놀음’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라면 으례 ‘정치놀음장’으로만 알고 있었다. 교회정치로 상처입은 신도들이 치유받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나는 목사라는 이유로 당장 이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이들은 그 동안 목사에게 배반만 당했고, 목사에게 조종받는 신도들에 의해 상처입었기 때문에, 목사를 향한 증오심은 대단했다. 거기에다 내가 자기들 위에(?) 올라설 부목을 노려서 들어왔다는 오해는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길이 있다면 오직 하나, 죽음뿐이다. 누구의 피를 보건, 이들은 피를 보기 전에는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그 피는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흘려야 한다. 그렇다면 그 피흘림은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이들은 나의 피를 본 후에는 더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서 나는 다섯 번째의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죽음은, 아들이 태중에 있을 때의 일로서, 나의 인생과 아들의 목숨을 두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몰리게 되었을때, 내 인생을 버리고 아들의 목숨을 건지기로 결심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아들의 바른 믿음생활을 위해 아버지가 대신 죽는다는 각오로 새로 깨닭게 된 복음 진리에 내 몸을 내던졌던 때의 일이었고,
세 번째는, 광복절 연합 예배시, 조국을 위한 ‘회개 기도’를 결심했을 때의 일이었고,
네 번째는, 비제가스 교회에서 당할 고난을 알면서도, 그 교회로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였고, 지금은
다섯 번째로 교민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죽음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결심이 굳어지자, 나는 그 날 밤K목사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결정을 통고했다.
“우리 에덴교회 신도들이K목사님의 교회에 들어와서K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순간K목사님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어지면서 그늘을 지어 보이시었다. 나의 저의(底意)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아도, 내 실력으로 이 교회는 내것으로 꿀꺽 삼킬 수 있습니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
(아니면 일체를 초월해서 신앙 하나만을 생각하는 ‘순정파’로 봐야 할지 ? 만일 후자라면 더욱 곤란한 상대이고..... 어째튼 지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 동안 내가 쌓은 정치 경력으로도 이런 어린 애숭이 하나 요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드디어 K목사님은 얼굴을 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신도들 사이에는 벌써 내 문제로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정용화라는 사람은 고집스럽고 불편하다는 점에서 이미 소문이 나있었는지라, 교회에서 명예나 지위가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교회는 창립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문제가 ‘침례’였다. 그 교회의 등록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나는 해석하기를, 세례건 침례건 모두가 신앙고백의 표일뿐이다. 신앙 고백이란 일생에 한 번만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신도들은 매주 예배시에 신앙고백을 한다. 그것이 사도신경 암송이다. 침례가 과거의 세례를 무효화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세례는 그때의 신앙고백이었고, 침례는 지금의 신앙고백일뿐이다. 그래서 같은 침례교파 안에서도 어떤 파에서는 특별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미 침례를 받은 신도들에게도 침례예식을 다시 행하는 파도 있다. 그러나 침례교회의 정식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면, 그 ‘반드시’에 또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침례예식이 ‘우상화’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고백보다 ‘의식’이 앞설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짧은 기독교 역사로 보나, 길고도 오랜 유교의 권위주의적 전통으로 보나 ‘영혼의 구원’이라던가 ‘영적 생활’이라는 정신운동이 평신도들은 물론 목회자들에게마져도 여간 생소하고 거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도들은 ‘영적’이라는 내용을 외면하고 ‘의식’에만 치중할 위험성이 많다.
예수님은 ‘죄된’ 인간의 ‘영성’의 구원을 목적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의식’이 강조되면, 하나님이 목적하신 ‘영성’의 구원은 뒤로 밀려나고, 뜻없는 의식만 남는 하나의 종교집단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침례의 참 뜻을 살리려면, 먼저 ‘영성의 구원’을 위한 교육과 ‘영적 생활’을 위한 충분한 훈련이 앞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교육부장에 임명되어서 청년부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교회 청년회장으로 활동했던 경험과 서울에서 ‘연우회’를 지도한 경험 그리고 나 자신의 오래고도 암담했던 정신적 순례를 통해 얻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교회가 창립되고 나서, 이내 신도 친목 야외예배가 계획되었다. 여기 저기에서 모여든 신도들은 서로가 성함을 모르는 것은 물론, 겨우 안면정도 아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친목 야외예배가 계획된 것이었다. 현지에 도착하자, 신도들에게 명찰이 주어졌다. 나에게는 ‘정용화 집사’라는 명찰이 주어졌다. 이렇게 쓴 사람은 모목사의 아들로서, Y대 신과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지도 못하고, 장로라도 되어야 하겠다고 안간힘을 썼으나, 신도들의 신임을 얻질 못해, 장로 선출 때마다 매번 밀려나, 그의 눈은 언제나 불안과 초조를 감추질 못하는 중년 집사였다. 이 사람에게는 나의 존재가 눈의 가시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침례교파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력만 인정되면, 목사로 세우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 교회의 부목으로 발탁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용화가 건재하는 한,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명찰을 본 과거의 에덴교회 신도들의 눈에 불꽃이 튀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당장K목사에게 달려가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K목사님은
“신도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로 발을 뺐다. 그 여신도는 나에게 달려와서 펄펄 뛰면서 말하기를
“아아니, 그러면 목회가 도대체 뭐예요 ? 목회란 신앙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사는 법을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일 아녜요 ? 그리고 목회자는 앞서서 이런 일을 실제로, 생활을 통해 모범을 보이는 분 아녜요 ? 그런데 목회자가 그런 책임을 회피한다면, K목사님의 목회관은 도대체 뭐예요 ? 북미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도 괜찮았나요 ? 네 ? 정목사님 말씀 좀 해보세요.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
나는 말 없이 미소만 보일뿐이었다.
K목사와 신도들 사이는 날이 갈수록 껄끄러워져 가기 시작했가. 어떤 제직회 때는 마치 폭약이 터지는 소리 같은 극언이 집사들 입에서 튀어 나오게 되면, K목사님은 답할 말을 찾질 못해 쩔쩔 매는 것이었다.
신도들은 심지어A선생의 근황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A선생님은K목사의 아내이기에 앞서, K목사의 믿음의 선배요, 믿음의 어머니시다. 그런 믿음을 보면서 자란K목사라는 사람의 인격이 기껏 이 정도라면, A선생님의 근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드디어 신도들은A선생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언제 내려오신다는 약속은 아직 없었지만, 조만간 한 번은 내려오실 것이다. 만난게 되면 물어볼 것이 많았다. 도대체 K목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교시에는K목사님이 질문도 자주 하셨다. 그런데 그 질문이라는 것이 언제나 복선이 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답하면
“틀렸어! 저렇게 답해야 해.”
하고 핀잔을 주시고, 저렇게 답하면 또
“틀렸어! 이렇게 답해야 해.”
하고 또 핀잔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도들은K목사님의 질문이 나오게 되면, 문제의 정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의 저의를 찾기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또 한 경우는 ‘죄인’의 남용이었다. K목사님은 신도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라지만, 짧은 우리의 기독교 역사로 볼 때는 ‘죄인’이라는 말은 죄의 ‘변명’이거나, 죄의 ‘정당화’를 위한 구실로 이용될 가능성이 많았다. K목사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어떤 신도의 염려스러운 점을 상의하려 하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마땅찮다는 태도로
“정목사는 그러면 죄인이요 ? 죄인 아니요 ?”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로마서1장17절의 정신도 배우지 않고서 신학박사까지 된 사람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바울의 로마서의 정신도 가르치지 않고서, 박사 학위를 주는 그 교파의 신학을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튼 이런 지도자 밑에서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에덴교회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A선생님을 먼저 만나 본 다음, 가부간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한 가정이 그때까지 기다리질 못하고 조기 탈락을 하고 말았다. 그 가정은 우리의 통합에 극력 반대했던 가정이었다. 자기 발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고, 나의 강권에 못 이겨서 끌려 들어온 가정이라, 이들의 낙오에는 내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이 가정을 위해 이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때 마침 청년회 하기 수양회가 준비 중에 있었다. 청년회장은 교회생활의 경험은 전연 없는 초신자였다. 그래서 하나 하나 가르치면서 일을 시켜야 했다. 이런 사람이 하기 수양회 준비를 맡게 되었으니, 어려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몰아부치면서
“나가서 배워 와!”
하고는 내쫓았다. 며칠 후, 싱글거리는 얼굴로 나타나서는
“목사임예, 아라심더.”
하면서 구해온 자료들을 내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경상도 태생이었다. 마지막 문제가 ‘주제’였다. 주제만은 두 손을 들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주제는 내 몫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주제 강사는 물론 ‘K’목사님이었다. 이 번 수양회가 나로서는 청년들을 위한 마지막 기회인지라,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했다. 먼저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자존심’을 가르쳐야 했다. 다수에 관심하지 않으시고 ‘나 하나’가 ‘모두’인양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가르치고,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받은 신도들이 모여 단체(교회)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에게 가장 크게 영광이 된다는 뜻에서
‘나, 우리 그리고 하나님’
이라는 도식으로 주제를 정해 보았다. 사도 바울 역시 일찍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 순서를 따랐으니까. K목사님은 신학박사이기 때문에 이 주제를 보면 당장 알아차리라 믿으면서도, 회장에게
“인쇄하기 전에 반드시 주제 강사이신K목사님에게 보이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고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끝난 청년회 하기수양회는 ‘라모스 메히아’에 위치한 미국인 학교 ‘꼴레히고 와드’에서 첫 날을 맞게 되었다. 드넓은 공간에 최현대식 시설을 골로루 갖춘 그 곳은 학교라기 보다는 휴양지라는 인상을 더 짙게 풍기는 평온한 환경이었다.
첫 주제강의 시간이었다. K목사님이 나오시더니 청년들이 드고 있는 ‘프로그램’을 높이 쳐들어 보이시면서 득의 만만한 낮빛에다 큰 소리로
“이 주제 틀렸어. 회장이 나에게 와서 이 주제가 어떻냐고 묻기에 ‘암 좋다!’ 하고 말은 했지만, 실은 이 주제 틀렸어. ‘하나님 우리 그리고 나’ 이렇게 되야 해!”
하고는 나를 돌아보면서 활짝 웃었다.
(몰랐지.....?)
라는 태도였다.
(어쩌면 저토록 치사하게 정치(?)를 해야 할까........?) 나는 속으로 분노했다.
(K목사가 감히 나를 빠뜨릴 함정을 마련하다니 ? 그 함정에 자기가 빠질 줄을 모르고. K목사의 저런 신앙사상은 겸손을 미덕으로 한 도덕사상이며, ‘구원’과 ‘의’를 목적하는 기독교 사상은 아니다. 그래서 교회를 희생시켜서, 자기를 위한K왕국 건설만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강의는 주제와는 무관한 말들로 시간을 때웠다. 마지막 광고시간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주제의 취지 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K목사님은 뜻밖의 반격(?)이다 싶었는지, 할 말을 잃고는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고만 있었다.
이 번 수양회에는 세 사람의 강사가 동원되었다. 한 사람은 주제강사인K목사, 또 한 사람은U.B.F.의 여선교사, 그리고 나였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나고 나면, 청년들은 어떤 지도자도 받아주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청년들과 나는 이토록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찌하여 이들을 떠나야 하는가 ? 첫째는 당회장이신K목사님이 나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내가 떠나기를 바라기 때문이요, 둘째는 장년층이 정용화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반대하기 때문이며, 세째는 청년들이 아직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리기 때문에, 아무리 반대하고 반항한다 해도 장년층이 이미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의 반대요 반항이며, 결국은 그 울타리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며, 마지막은 나의 강권에 못이겨 따라 들어온 한 가정의 낙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일어날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도록 나는 손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의 후임자는 내 손으로 직접 선정하기로 했다. U.B.F. 신학이 침례교신학과 가까운 것 같아 보여서, U.B.F. 여선교사 한 사람을 모셔오기로 했다. 그녀는 이미 다른 교회의 성경교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민사회 전체를 두고 볼 때는 침례교회의 사정이 더 급한 상황이라, 나는 모셔오기로 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남성보다는 여성이 유리하다. 그래서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수양회를 통해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고 나면, 청년들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덜 생소하여,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될 것이고, 선교사님 역시 그런 상황에서 “나 몰라라”하고 팽개쳐 두고 돌아갈 수만은 없을 것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선교사님은 이렇게 해서, 이 교회에 묶이게 되었고, 부군되는 선교사님이 뒤따라 이민 와서는 강단을 맡게 되었고, 그 후 귀국하여 신학공부를 마치고 안수받고 정식 담임목사가 되었다.)
마지막 날 밤이었다. 다들 잠자리에 들고난 때를 타서 나는K목사님을 모시고 나가, 인적없는 잔디밭 한가운데에 앉았다. 서론은 생략하고 본론만 내놓았다.
“나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K목사님이야 말로 이 때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흘렀다. 서로가 너무나 잘 아는 사이인지라, 다른 말은 더 필요치 아니했다. 그러나 당회장의 입장에서 이런 때에 한 마디의 말도 없댔어야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인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
하고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당신 때문이요.” 라고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토록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회적으로 말했다.
“신도들 사이의 화해 노력에 저는 실패했습니다.”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우리는 곧 자리를 떳다.
수양회 기간 동안 나는 새벽시간을 맡았다. 청년들은 가장 깊은 속마음인 ‘영성’이 깨우침을 받았다는 점에서 흥분해 했고, 여선교사님은 누구보다 자기가 참석하기를 잘했다면서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U.B.F. 신학에서는 인간의 ‘영적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점으로 해서 ‘영적 죄’에 발목이 잡혀서, 선교사들의 선교실적이 애매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했다. 그런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번에 참석한 여선교사로, 그녀는 나의 강의에서 인간의 ‘영성’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기가 참석하기를 잘 했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K목사님은 이 기회에 ‘정용화’라는 사람을 좀 더 깊이 알아봐야 하겠다는 뜻에서인지, 매시간마다 진지한 태도로 자리를 지키셨다. 이 번 수양회는 인상깊고 만족스런 집회였다고 다들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내가 원래 목적했던 수준에는 많이 미달해 있었다. 세 사람의 강사가 펼치는 강의는 통일성이 없이 모두가 각각으로, 청년들의 집중을 흩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침례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는 교회에 발을 끊었다. 다음 주 목요일이었다. 교회 서기가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정 목사님, 제명해도 되겠습니까 ?”
하고 물어왔다. 혹시 다시 나타날까봐, 신속히 제명을 통고하려 온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법적으로는 제적되었고, 뒷마무리는 깨끗이 끝난 듯이 보였다. 눈에 가시 같던 존재가 자기 발로 나갔으니, 교회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청년들이 차돌처럼 뭉쳐서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K목사님이 아니다. 정목사님이시다. 찾아내라 !”
K목사님은 사태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K목사님은 서둘러 미국에 있는 한 지교회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명목은 특별집회였다. 강사 목사님은 복음이 아니라, 미국을 팔아서 청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너무나 완강한 반항에 드디어K목사님은 자신의 마지막 카드 미국이었다. 를 내어놓는 길 밖에 없었다. 그 마지막 카드 역시
“날 이용하여 너희들 미국 가도록 하라.”
청년들은 내일이라도 당장 미국으로 떠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청년들의 불길은 가까스로 잡은 것 같았으나, 한 번 눈뜬 영혼의 불길은 쉽게 잡아지질 아니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마지막으로 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겠다면서, 회원 전원이 그 먼 길을 몰려와서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청년들의 불길은 가까스로 잡았는가 했는데, 다른 곳에서 더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면서 중년 여성층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장년층은 중년층과 청년층에서 떠받들어 모셔줄 때만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으며, 만약 중년층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머리수로서 맞먹자고 나올 때는 수에 있어서는 열세인 장년층은 역부족인 것이다. 그때에야 장년층에서 “앗차 !” 하고 깨닫게 된 것이, 정용화 목사가 그 동안 자기들의 방파제 역할을 해서, 자기들을 지켜주었는데도 그 점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때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신도 대표가 또 다시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집에 없었다. 그래서 아네에게 전갈만 주고 돌아갔다. 물론 다시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과연K목사를 설득해서 나를 복적시킬 힘이 있을까 ? 그럴 힘은 없다 ! 이미 이빨 빠진 사자일뿐인데....!)
그래서 나는 이들의 전갈을 무시하고 말았다.
K목사는 내가 의외로 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은 사실에 새삼 놀라고 두려웠는지, 이 기회에 나를 완전히 매장시키고 말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또 다시 미국에 지원요청을 했다. 이 번에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극약 처방’을 쓰기로 하셨다. 내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내가 데리고 들어간 한 가정이 그 교회를 떠난 데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이라는 것을K목사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가정을 포섭하여 교회로 대려가고, 나는 고립시킨다는 작전이었다. 그 가정 포섭에는 보통 힘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가정에서는 신앙적으로는 부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남편쪽에서 비록 움직여준다 해도 부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수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부인에게 영향력을 끼칠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여인들 사이에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인물이라면 여성들의 우상이요, 권위의 대명사인K목사 자신의 부인A선생이면 틀림 없다는 결론이었다.
구실은 또 다시 특별집회였다. A선생님이 인도하시는 특별집회에는 틀림없이 이 부인이 나올 것이며, 그 때 잡아서 설복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그 가정이 교회로 다시 나오게 되면, 나는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정용화라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은 편인데, 이 기회에 손발 묶어서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사모님을 불러 내린 것이었다.
집회 첫 날, 이 부인의 얼굴이 보이질 아니했다. 둘째 날을 기다렸다. 둘째 날에도 보이질 아니했다. 세째 날까지 기다려서 종래 얼굴을 보이질 않을 때는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다. 더 기다릴 일이 아니라, 쳐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날에도 종래 얼굴이 보이질 아니했다. 다음 날이었다. 이 가정에 한 친구가 와서, 전갈을 주었다.
“내일 이 집에A선생님이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선생님은 누구건 가서 만나야 하는 어른이시며, A선생님이 친히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라 합니다. 그런 어른이 이례적으로 이 집만은 친히 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만나실 때, 결례가 없도록 특별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이 집 사람들이 그렇게까지도 위대한 존재인 줄은 미쳐 몰랐는데, 정말 부럽군요, 부러워.”
이 집 주인과는 평소 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였는지라, 진심을 농 섞어서 말하고 있었다. 부인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례적 심방이라면, 이 번에 내려오신 목적은 특별 집회가 아니라, 우리 가정을 겨냥한 행차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진작 오시질 않고, 어찌하여 이제서야....? 우리가 집회에 혹시 나올까 하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종래 얼굴을 보이질 않자, K목사님이 더 기다리질 못하고A선생님을 모시고 오기로 한 것은 아닐까 ? 그 동안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떠난 가정도 여러 가정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정들은 모두 “나 몰라”라 하시고는 어찌하여 우리 가정만A선생님이 미국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친히 심방을 오신다는 것일까...? 우리 한 가정의 존재 가치가 그토록 크단 말인가 ? 그릴 리는 없다. 내가 그 동안 피아노를 맡아서 쳤지만, K목사님이 별로 대수롭게 여기시는 것 같지도 아니했다. 그리고 아빠(남편)만 해도 평소 별로 말이 없는 사람으로, K목사님에게나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인물도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그 귀하신 몸이 직접 내려오셔서 친히 심방을 오신다는 걸까....? 모를 일이다.….내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다음 날이었다. 이 집에서는 새벽부터 온 집이 광이 나도록 쓸고 닦고 치장을 하고 꽃을 사오고 하며, 귀빈을 맞을 준비에 부산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밖에서 차 멎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벨’이 울렸다. 당도한 것이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인사 말을 서론으로 간략히 끝내고는 당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교회로 다시 나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목사로서는 마땅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목사는 제외하고 !!’ 라는 단서가 붙었다.
이 부인은 갑자기 전신에 얼음을 쓴 것 같은 한기를 느끼면서, 멍해진 정신이 되어서, A선생님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는 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애절한 심정이 되어서.... 그러나 A선생님은 K목사님의 말을 들으셨는지 못 들으셨는지 전연 별세계의 사람 같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가정을 위해, 그 교회를 떠난 목사님을 배반하라는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그 유혹에A선생님이 감히 동조하시다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부인은A선생님의 그 뻔뻔스런 얼굴을 보면서 분노와 함께 구역질이 솟구쳤다. 이것이 우리 나라 목회자들이 말하는 소위 ‘교회정치’란 말인가 ? 그렇다면 배반과 거짓이 능한 목회자일수록 우리 나라에서는 성공한단 말인가...?
미국에서 친히 내려오셔야 할 만큼 중요한 행차였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말 한 마디 없으실까 ? 그렇다면A선생님은 이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 그래서A선생님은 말은 않고, 다만 압력만 넣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K목사님이 설복한다는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단 말이 아닌가….?!
그 순간A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K목사님은 이 집 남편을 달래는 말로 계속 교회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그 말에 진심에서인지, 아니면 건성에서인지는 모르나, 남편이 멍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여보 !!”
칼날 같은 외마디 소리에 남편은 “으............ㅇ ?” 하며 놀란 장탉 같은 눈이 되어서 부인을 쳐다봤다. 이러기를 몇 차례가 거듭되자,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일이 제대로 풀릴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인지K목사님은 이 집 남편을 데리고 건너 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man to man’ 작전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Living’에는 A선생님과 부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모든것이 얼어붙은 무거운 분위기였다. 부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A선생님의 발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A선생님은 변질되셨습니다.”
그 순간A선생님은 온 몸을 부르르 떨으셨다.
(세상에 이런 당돌한 여자 보았나, 내가 감히 눈구인데.....!)
하고 생각하셨으리라. 부인은 무거운 입술로 말을 이었다.
“정목사님을 한 번 만나주세요. 제발 부탁예요. 연락은 제가 드릴께요.”
“네, 만나도록 해야지요. 그 동안 나의 수기도 보급해주셨으니 만나도록 해야지요.”
“그러면 내일 만나도록 해주세요. 정목사님께 연락은 제가 드릴께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A선생님은 부인에게 호텔 주소를 건네 주셨다. 이렇게 진행된 오늘의 만남은 승패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K목사님의 설득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았으나, 내용이 처음부터 전연 ‘Game’이 되지 않을 ‘억지 놀음’이었는지라, 실패는 기정 사실이었다. K목사님은 ‘Living’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아빠’를 설득하고 있었다. K목사님은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아니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아빠’를 놓지 않고 더욱 끈질기게 설득을 계속하고 있었다. A선생님은K목사님에게 바싹 붙어서서 꼬집으면서,
(다 틀린 일을 뭘 그러느냐!!)
면서 빨리 돌아가자고 재촉하셨다. K목사님 내외분을 돌려보내고, 부인은 자리에 돌아와 앉자, 모든것이 끝난 것 같은 적막이 온 집을 채웠다.
“후----- ! 다 끝났다.”
혹시나 했던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져 버린 허탈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일A선생님이 정목사님을 만나시게 되면, 혹시 또 무슨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꼬리를 물었다.
다음 날이었다. 나는 어제의 일이 궁금하여 아침 일찍 그 집을 찾아갔다. 어제의 사건 진행은 물론 예측했던 대로였다. 그러나A선생이 날 만나시겠다는 약속만은 뜻밖이었다.
(내가A선생님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태산 같은 부담이실텐데............? 그러나 그녀는 미국이라는 큰 세계가 키운 여성지도자라, 나 같은 애숭이 하나 요리하는 일쯤은 별 불편 없이 구슬려 넘길 수도 있으리라...........)
“목사님, 빨리 가보세요.”
그녀는 재촉했다. 아내는 이민 초기에 읽고 그토록 감명을 받았던A선생님을 오늘은 면전에서 뵙게 된다는 놀라움에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서둘러A선생님이 머물고 계시는 호텔에 도착하자, 즉시 Interphone으로 연락을 드렸다. 갑자기 수회기에서 귀를 찌르는 칼날 같은 목소리가 내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어요. 오기 전에 전화로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말했는데 왜 그냥 왔어요! 지금은 안 돼요!”
“그러면 언제쯤 뵐 수 있겠습니까 ?”
“그건 아직 몰라요! 어째튼 지금은 안 되요!”
지금은 안 된다가 아니라, 만나지 않겠다는 거절이 칼날 같은 목소리가 충분히 말하고 있었다. 만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그 가정으로 나는 힘없이 돌아갔다.
“목사님, 벌써 오셨어요 ? 아.......니.......? 이렇게 빨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양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초조한 낯빛으로 나의 눈치를 캐고 있었다.
“지금은 만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언제 만나자는 약속은 하셨어요 ?”
“칼날 같은 목소리는 당장 찔러 죽일 기세이던데, 약속은 무슨 약속을 해요 ?”
이 한 마디에 그녀는 발끈하며 당장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후.......!”
하고 길게 한숨을 토했다. 뒤이어 어깨가 내려 앉으면서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누구를 마음에서 청산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할 말을 잃고서, 속으로 가슴을 뜯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양을 탈취하여 싸움에 희생제물로 삼으려 하다니?!
나의 입김이, 미국에 계신 그토록 귀하신 어른을 이 곳 남미까지 불러내릴 힘이 있었단 말인가 ? 그것은 아니다. 이들은 ‘정용화’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느라 지금 고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손에는 성서를 들고, 혀에는 성구를 올린다 해서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 마귀가 예수를 유혹할 때도 성구를 인용했으니까(마4:6).
지금 지나간 일을 새삼 들추는 것은 아니다. 이미 끝난 일을 다시 기억해내자는 것도 아니다. 사모의 ‘내조’란 남편과 무조건 한 길을 간다 해서 내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해서, 민주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는 ‘정실주의’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A선생님의 무분별하고도 무조건적인 추종은K목사님을 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말았다.
A선생님이 어찌하여 이런 유감스런 인격으로 내려앉게 되었을까 ? 원인은 사람 키우는 일을 하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A선생님의 ‘변질’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띄우는 일을 하지 아니 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 주목적이다. 죄인을 ‘구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까지 자라도록, 사람을 키우는 일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다(엡4:13-15). 그래서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키우시는 일만 하시고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그 동안의A선생님의 그토록 요란했던 선교행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가 ? A선생 자신의 ‘우상화’에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지난 날의 ‘순교 정신’을 앞세워서, 지금은 이미 딴 인격으로 ‘변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때 그 정신의 사람인 양, 사람들 앞에서 자신를 드높여왔다는 말이다.
A선생님이 신도들의 눈을 띄우는 일을 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녀의 교육방침은 바로 ‘우민정책’으로서, 우민정책은 지도자를 쉽게 ‘우상화’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인간 우상화를 용납하는 ‘정서’가 있어 보인다. 이로 인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가 쉽게 성공을 거두어서, 전국민이 주려 죽게 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정부의 각료들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보인 ‘아첨’으로 해서, 청와대를 쉽게 ‘독재’의 아성으로 탈바꿈시켜서는I.M.F.까지 끌어 들여오게 된 것이었다.
이런 ‘경향’, 이런 ‘민족 정서’가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를 또한 쉽게 ‘우상화’하기에 이른다. 지도자가 일단 우상화되고 나면, 그는 우민정책을 펴서, 민주주의의 뿌리부터 썩히는 일을 하여, 신도들을 정신적으로 주려(갈급하여) 죽게 만든다.
우상은 하나님의 원수일뿐만 아니라, 이렇게 인류의 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켜야 할 법(십계명)을 주실 때, 가장 먼저 주신 법이 ‘우상’을 금하라는 법이었다.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인 예언자들에게도 최대의 적이 ‘우상’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우상들이 거의 모두가 ‘정신화’ 되어 있기 때문에, 가려내기가 그만큼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현대판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양심적인 지도자 밑에서 세심한 특별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런 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오늘 날의 교회 교사들은 이미 ‘정신적 우상’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후회’는 결코 ‘회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론상으로야, 후회가 물론 회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정서가 이런 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려 하질 않는다. 특히 교회생활을 통해, ‘용서’라던가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해 온 신도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기색을 약간만 보이면, 신도들은 그 후회를 곧 ‘회개’로 간주하고는, 그 일을 곧 잊으려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후회’는 결코 ‘회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A선생님이 ‘변질’을 지적당한 순간, 그녀는 틀림없이 ‘후회’하셨으리라, 그녀가 온 몸을 떨으셨을 때는,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A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그 때처럼 크게 후회한 적은 없으셨으리라. 뿐만 아니라, 그때 당한 모욕감은 그후 결코 잊을 수 없으셨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A선생님은 회개는커녕, 보다 더 큰 죄인 ‘증오심’에 자신의 온 몸을 내맡기셨다. 그러면 그 순간의 ‘후회’에서 그녀가 얻은 것운 무엇이었을까 ? 앞으로는 보다 신중을 기해서 이런 봉변을 다시는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다짐 외에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약 회개할 인격이었다면, ‘변질’을 지적당한 순간 ‘회개’했을 것이고, 설령 그 때는 정신을 잃어서 못했다손 치더라도, 다음 날 나를 만나기까지는 24시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에 그녀는 회개했을 것이고, 나를 만났을 때는, 내가 가르친 신도에 의해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여, 회개하게 된 사실을 나에게 감사했어야 옳았다.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회개’다. ‘회개’에서 기독교 신앙은 시작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난 다음 ‘복음’을 믿으라(막1:15)하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이전에
는 ‘세례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 운동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셨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생략한 신앙, 회개를 건너 뛴 복음선교란 ‘기만’이요, 자기 ‘우상화’를 위한 노력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죄를 범하고 나서, 그 범행이 들어날 때는, 그 죄를 우선은 후회한다. 그러면서도 회개는 하려하질 않는다. 다만, 처벌만을 면해보겠다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거짓말까지 동원한다. 그런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때는 달리 방법을 써서라도, 기어코 처벌만은 면해보겠다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이 성군 ‘다윗’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나서,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틀림 없이 ‘후회’ 했으리라. 그러나 다윗은 보다 지능적인 수법으로 그의 범행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드디어 우리아를 죽이기에 이른다.
작은 죄를 범하고 나서 그 죄를 숨길 수 없을 때는, 더 큰 죄를 지어서라도 기어코 숨겨 보겠다는 것이 인간이라 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서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자, 즉시 ‘회개’했다. 그러나A선생님이 회개하셨다는 소식은 아직 듣질 못했다. 회개를 유언으로 남기셨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다. 이런 지도자들에 의해 알젠틴의 교민들은 계속 멍들어 왔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끊임 없는 ‘선택’의 갱신 생활이며, ‘결단’의 갱신 생뢀이라는 점이다. 신앙을 위한 선택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흑백’ 논리로,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계며, 둘째 단계는 두 개의 ‘선’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인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단계에서는, 물론 ‘선’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인 두 개의 ‘선’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에는, 둘 다 ‘선’이라는 이유로, 어느 것을 택하건 무관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큰 선만을 택해야 하며, 만약 작은 선을 택할 경우에는, 그 작은 ‘선’은 경우에 따라서는 (죄와의) 타협을 뜻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A선생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A선생님이 옥중에서 죽기로 작정하고 ‘믿음’을 지켰을 때는A선생님은 순교의 정신으로 분명히 ‘선’을 택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선은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질 수도 있었다. A선생은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분
명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단계였다. ‘악’과 ‘악’, 두 개의 악 가운데서, 악이라는 이유로 그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선한(?) ‘중립주의’는 결국 ‘자기기만’이라는 죄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기때
문이었다. 그래서 목회자가 자기 앞에 ‘악’이 놓여질 경우, 그것이 ‘악’이라는 이유로 지지하지만 않으면, 그의 ‘초월적’(?)인 태도는 곧 ‘선’이 되는 듯이 계속 얼버무려 가는 것이다.
지금 어느 특정 목회자를, 용서하는 마음 없이, 과거를 들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사람은 지난 날의 과오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나 순진한(?)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교민들로 인해 지금도 계속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을 끝내자는 뜻에서, 아픔의 원인 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