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2017.11.26 14:22
지난번 수고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안상(眼象)이 있는 기단석 사진은 ..
<원주 법천사지 건물 기단석> < 수항초교에 있는 수항사지 기단석>
( 이 석물들은 무엇일까??)
집을 짓는데는 맨 아래의 사진의 둥근돌이 기초석의 주춧돌로 안상이 그려져 있는데 수다사지에서는 3단형
둥근 돌이라면 위 아래에 둥근 몰드가 돌아가고 가운데 안상의 조각을 한 주춧돌이다.
그러기에 위의 사진의 안상이 새겨진 2단형 석물을 뒤집어 주춧돌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쓰던 물건을
재 사용한 것입니다. 또한 안상의 눈을 그린 眼자인데 주춧돌로 흙에 묻힌다면 이것은 필히 재사용이란 점입니다.
건축분에서 석 자재가 들어가는 곳은 주춧돌과 외부 하단석및 계단, 난간석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진의 문양은 양식적이고 구조적인 석물은 아닌듯 합니다.
이러한 석물이 건축분이나 어떠한 곳이던가 있다면 그것은 아래의 그림처럼 집의 현관 로비의 계단 양측
마구리용 장식품일듯 합니다.
본 석물은 초보자가 끌이나 정도 석수장이가 쓰는 단금질의 단조가 들어가지 않은 연질의 철로 강도가 3,0의
화강암을 조각하면 둥근형도 마음대로 쬘수없어 사진에서처럼 일그러진 형상이 되며 또한 이곳의 안상은
나름대로 완성되지 않은, 한쪽은 안상이 조각되어 있지만 또 다른 석물엔 그 부위에 안상이 조각되지 않아
이해가 힘듭니다.
하지만 2단쪽은 앞면에 안상이 그려져 있고 나름대로 몰드의 가로 축선도 그려진 점으로 보아 그곳이 앞쪽이고
1단뒤는 건물과 붙어있는 것이라 추정됩니다.그리고 로비 바닥은 장대석등을 깔았슬 것이라 추정됩니다.
또한 개축이전에 본 건물을 40년대에 신축당시에도 규모의 크기가 현 건물과 비슷한 점으로 볼때 수십개의
주춧돌이 필요한데 채석장의 산에서 보다는 강에서 들고와도 운반이 용이치 못한 점에 더 가까운 곳에서
용도가 페기된 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긴 쉽상입니다.
그래서 본 건물 개축당시 빼낸 주춧돌들은 그곳에 사용하기엔 좀 작고 미약하며 장대석이 주춧돌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것은 분명 재 사용이란 점입니다.
다음 증언 기화가 있으면 어디서 이전해 왔는가 하는 증거용의 증언기록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 건축물 앞면 현관 입구의 장식용 마구리인듯 합니다> <법천사지 전경/ 원형의 주춧돌 2점>
이 점엔 정확한 위치명을 생략합니다.
또 주워가서 내거라 하기전에 미리 사전 방지를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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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동리의 김삿갓 묘는?>
* 천동리의 김삿갓 묘는 구한말 문화와 정체성은 땅에 떨어진 시기에 멸족과 폐족으로서 양반들의 린치를
피하여 난고 김삿갓은 죽어서도 천동리 도마치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점. 아들 익균도 그러한
피해의식속에 산간에 김삿갓의 묘를 쓴점 슬픈 역사로 이해가 됩니다.
일반인들이 묘 쓰기엔 양지바른 야산도 만컨만 괜한듯한 어느 산간사이에 양지바른곳에 제절도 모자라서
막돌을 주워다가 단을 쌓고 김삿갓의 묘를 쓴 아들 익균,,,
그는 동네 친구들에게 이제 나는 죽으면 아버님 밑에 묘를 쓸거야 하고 기분좋은 농담말을 건넨듯,
그러나 익균은 40대에 섶다리에서 낙상하여 익사하였고 친구들은 그의 농담을 유언대로 김삿갓 제절 5m정도
아래에 익균의 묘를 쓴점... 땅 한평이 않되자 3~4단의 축대를 쌓고 그를 모신 두 아들,,
이제 그들은 천동을 떠나고 그들의 후손들이 가끔 찾아와 제를 지낸다는데..
김삿갓은 고종 임금도 너무나 좋아했고 모든 사람들의 벇으로 100여년이 넘은 지금도 항상 그의 시는
우리곁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친한 벗으로 통쾌한 풍자의 해학으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벗이지만
정작 그는 살아서 36년간 삿갓 하나에 햇볕을 가리고 세상을 등지고 방랑하였건만 그는 죽어서도 인간세상을
멀리하고 깊은 산속에서 홀로 방황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숨어 잠자던 곳을 발견하였다.
앞으로 많은 세상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가야겠다.
이제라도 난고 시인은 이 자리에서 삿갓을 벗어 내려 놓으시고 세상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곳에서
바로 영면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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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무어라 하던간에 우리는 김 삿갓묘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선 그런대로 작은 묘비명 하나에
숲을 좀 헤쳐 양지의 따사한 햇살이 들어오게 하고싶다.
영월의 김삿갓 묘의 일화로 분명한 것은 1982년 여름 강원일보 신문기사에 영월문화원장 박영국옹(당 72세)은
와석리를 수 없이 다녀가며 그의 생가터를 찾았고 그 앞에 묘 한기를 김삿갓묘 아니냐고 학계에 진정한바
학계가 이를 인정하여 김삿갓 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엔 본인의 글에 의해서 보면 무수히 많은 오류와 편견이 있기에 영월은 본인의 의문사항 모두에
해답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http://blog.daum.net/kkks1/1289
영월은 본인의 게시글에서 이러한 의문사항에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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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죽이도 이젠 제철이 찾아오는듯 하다>
* 청옥산이 개발된다는데 너무나 고무적이고 즐거운 마음에 몇자 적어봅니다.
미탄의 한치 뒷산의 청옥산 일대는 태백산맥 영서지방 아라리(아리랑)의 진원지이고 보고입니다.
영서 아라리는 가락이기 이전에 영서 산간의 이 지방 선인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자취이며 삶의 생활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지방 우리의 평창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것이 영서의 메나라조 아라리인 것입니다.
아라리라면 정선을 연상하지만 그 정선 아라리의 보고는 한치뒷산 청옥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정선은 뗏목아라리를 팔아 먹지만 뗏목아라리의 인기 이전에 진정한 이 지방 (영서의 산간지방)의 아라리의
맥은 이 지장 선인, 민초들의 고통스런 삶속에서 그를 불만하지 않고 풍자속에 아름답게 승화시킨 가사의
가락을 가진 미의 일상적 체험의 소리인 것입니다.
여러 가사가 있지만 그중 하나의 가사에 예를 들어본다면..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겠지.
아마 어느 시인의 시보다도 아름답게 갈고 닥인 이 한줄의 가사를 듣고 흥에 취하지 않을 사람은 없슬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 가사는 지금 아라리를 부르는 순간의 삶의 고통을 미래 지향적으로 풍년이 되리란...
그것도 님의 입맛만 같으면 하는 재미있고도 바램의 흥취를 자아내는 의지를 담은 민초들의 긍정적 삶의
표출이란 점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본인은 친구가 건네준 평창아라리 창간호 가사집에서부터 그간 10여년간 한시도 아라리를 떼지
못하고 본인의 사상의 정체성에서부터 평창인들의 생화의 기저에 깔린 이러한 이러한 의지적 색깔의
정체성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창사람들은 아리랑하면 정선을 연상하실텐데 그것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나의
집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정선이야 어쩧든 나는 나로서 나의 본 마당을 쓸고 가꾸어 나의 공간의 아름다움을 확립히여야 할진데.
이것을 남의 것이라 팽개치고 내집 앞마당을 어순선하게 어지럽힌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의 스스로의 손해란
점 입니다.
청옥산을 개발하려는 예산의 확보란 소식에 이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청옥산은 아라리의 테마가 있는 명산으로 발 돋움하여야 한다.
고조선의 단군이 산위의 사람이란 양주동 박사의 해석처럼 우리 한국인들은 산을 좋아하고 특히나 등산을
즐겨한다.
그러기에 청옥산의 개발에서 우선 등산객을 위한 등산코스나 또한 이 산은 토산으로 경사가 어려운곳이
없기에산악 MTB코스의 개발도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우선 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위한 코스 설정시에도 아라리의 테마가 있고 아라리의 전설이 전해지는 가치를
십분 발휘하여 진정한 아리랑의 명산으로 거듭나길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등산코스에도 해발 1,200m 산악자전거 코스라면 한국MTB의 메카로 거듭나길 희망하는 것입니다.
일전 이야기처럼 전국 100대 명산에 속하기보다 해발 1,000m가 넘는 아리랑의 명산으로 10대 명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진정 모든 국민이 사랑하는 명산으로 태어나길 희망하며 이제 평창인과 청옥산은 긴 잠에서 일어나길
고대합니다.
그리고 또한 청옥산 밤 하늘은 수놓는 별빛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낮에는 태양의 독재로 하늘의 무수한 별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리고 밤 하늘은 아파트와 한쪽은 산에 가려
카시오페아 자리도 반만 볼수밖에 없는 불만속에 본인도 별의 매니아로 별의 인덱스 목록책도 몇권 있었으며
겨울철 깊은 밤 북극성과 그 주변 천시원의 28좌를 보노라고 한강 4km를 걸어다니던 젇도 있건만 별빛은 독재가
아니 모두들 제 빛을 발하는 평화의 장이기도 하다.
구만리 먼 하늘을 쏟아내는 별빛은 과연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는 없지만,,밤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여도 참
재미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청옥산의 별빛은 남다를 것입니다.
미국의 천문학자들의 천문대가 대기량이 적은 해발 2~4천m에 위치하듯 1,200m의 청옥산의 밤하늘은
지열속에 습기와 먼지량이 적은 청정하늘이기에 좀생이 별은 물론 북두칠성의 2번별의 두개의 별 알카이드
(알코르)와 미자르가 확연하게 두개로 보일 것입니다.
물론 이 두별은 태양의 2~4천배의 밝기이지먼 먼 거리이기에 육안으로 겨우 구분할 수 있지만 이젠 황사다.
미세먼지의 공해속에 그것을 구분할 수있는 날이 연중 몇일일까만,,,
이렇게 청옥산은 밤하늘의 별빛을 고스란히 아름답게 수 놓는 지역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천문대가 놓일 가장 이상적 위치이고 또한 청옥산의 고원으로 여름철 대 삼각점의 견우와
직녀의 사랑을 시샘하는 알타이르, 데네브, 헤르클레스의 별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즐거운 캠핑을 할 수있는
청옥산으로 발전하길 희망하는 것입니다.
한 여름 밤하늘에 사랑이란??http://blog.daum.net/kkks1/18
여름철 해발 1,200m의 별빛속에 아라리가 뭍어나는 캠핑장이라면 이 한마디로도 구호는 끝이라 해도 좋을듯
합니다.
이렇게 지금도 평창은 만은 자원가 이야깃거리가 잠재해 있으며 지금이라도 이를 아름답게 가꾼다면 ,,,
봉평은 메밀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76년인가에서부터 평창읍내에서 "효석 문학의 밤" 3회끝에 봉평으로
이전하고 봉평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노력을 경주한바 이제는 봉평면민 5천명이 모두들 메밀에 종사하여 마치
이스라엘의 기브츠나 모사브같은 협동농장처럼 조직화하여 모두들 잘 먹고 잘 살수있는 것입니다.
지난 70년대 말 서울대 한 교수의 논문에 서울에서 부산을 일직선으로 아래는 공업단지화 하지만 강원도는
레져의, 경제의 고리에서 보면 공업보다는 한 단계 위의 상품을 구가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듯이 강원도는
공장보다는 여가속의 레져산업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곳으로 평창도 이제 영월과 정선의 레져를 앞지르는
관광사업을 추구하여야 하며 위의 청옥산의 이야기는 아마도 봉평의 예나 전국에서 가장 훌륭한 짜임새의
레져산업을 발달시킨 영월을 앞지를 수 있는 선호도의 레포츠 장이 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이제 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너 나 없이 서로 협력을 다하여 추구한다면 분명 풍요로운 앞날이 보장될 것이다.
이에 서로들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때인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그리고 위의 글들을 쓰기에 사료와 모든 부분들의 노력을 해주신 정원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본인의 장에는 이사도 안 다니는데 책은 자주 분실합니다.
그래도 평창아라리 가사집은 잃어버리면 않 되겠기에 자주 확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