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대명사, 시인 박재삼(19)
1954년 초봄이었다. 그때 수도가 부산으로 와 있을 때 부산 동광동 3가 8번지 김안과 병원이 있던 곳, 거기에 그 당시 2대 민의원으로 재직하던, 박재삼의 중학교 은사 정헌주 의원댁이 있었다. 박재삼은 그 집에서 정의원의 서사(書士) 겸 비서로 있었다.
어느날 밤 서류 정리를 마치고 있는데 밖에 누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누구십니까?" 했더니 "나다.청마다."하는 답이 돌아왔다. 청마 유치환이 문 밖에 와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박재삼은 월간 '문예'(1953)에 조연현 주간 주선에 의해 <강물에서>가 모윤숙 추천으로 초회 추천이 되어 있었으므로 청마에게 이미 잘 알려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도가 서울로 옮겨지고 다음해 1955년 월간 현대문학이 창간되면서 유치환에 의해 시 <섭리>가 추천되는데(3회는 서정주 추천), 아마도 청마가 박재삼을 찾아오는 이 때는 '문예'든 또 다른 잡지든 청마가 박재삼을 마무리로 추천해 올리리라 결심하고 있었던 때라 보여진다.
청마는 "영도 선생 시조집이 나와 가지고 가져왔다." 하면서 이영도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때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박재삼은 "누추하지만 선생님, 잠시 들어오시죠." 했는데 청마는 바빠서 어서 가야 한다며 뒤돌아 섰다. 그런데 청마가 돌아가고 있는 저만치 이영도 시인이 어느집 처마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시기 청마는 통영여중 동료교사였던 여류 시조작가 이영도와 열애 중에 있었다. 1954년에 나온 '청마시집'에는 사랑시의 바이블이라고도 하는 <행복>이라든가 <청령가> 같은 것이 실려 있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행복> 전5연 중 첫째연) 이 시를 근거로 통영에서는 문협을 중심으로 통영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는 운동을 현재 활발히 벌이고 있다.
어쨌거나 청마는 부지런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의 심부름쯤은 예사로 하던 그런 시인이었다. 그 무렵 청마는 박재삼보다 25년 연상 선배였다. 그런 아득한 후배에게 여성의 심부름을 하는 당당한 청마의 행위는 박재삼으로서는 그것마저 까마득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1964년 10월 17일, 박재삼이 현대문학사에서 문학춘추사로 직장을 옮긴 다음의 일인데 청마는 박재삼에게 편지를 띄웠다. "재삼형. 별고 없는지? 다름 아니라 한 가지 긴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김현승씨를 꼭 만나야 할 소간이 있어. 그러니 오는 24일(유엔 데이)에 그를 이브다방에서 만날 수 있도록 좀 연락을 취해 주게. 씨의 주소를 몰라 그렇고, 또한 내가 그 일로 일부러 올라가기는 하나 24일 하루밖에 서울에 체류 못할 형편인 때문에 그러하네. 연락되는 대로 내게 시간과 장소를 엽서로라도 알려 주든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24일 오전 10시경 내가 문학춘추사로 찾아가겠네."(뒷부분 생략)
수신인에는 '서울시 중구 동자동 41의 4 문학춘추사 박재삼 귀하'라고 되어 있다. 발신인은 '부산시 수정동 경남여고 청마'라고 되어 있다. 청마는 당시 경남여고 교장으로 재직할 때 였다. 지금 같으면 서울, 부산 간이라면 즉각 전화를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도 물론 전화는 있었다. 일반화 되지 않았을 뿐) 편지 용지는 누르끼한 갱지로 된 원고지였다. 그 원고지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 방송반이라 찍혀 있었다.
봉투는 요새 간편한 것을 쓰지만 그때는 이중봉투로 되어 있었다. 그때 김현승 시인댁에는 전화가 없었다. 박재삼은 숭실대학에 연락하여 겨우 소통이 되어 청마에게 연락해 줄 수 있었다.청마는 이 편지 말고도 틈틈이 박재삼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얼마 전에 보낸 원고를 어떻게 고쳐라 하는 등의 문예지 실무자에게 보내는 내용이 많았지만. 어쨌든 오늘날 시인들을 기준으로 볼 때 청마는 격세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전형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