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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49)
- 불법을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
마태복음 7장 21-23절/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강림이 있은 날,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온 세상에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 그 이름으로 부르신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2:36, 38, 39). 따라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에 있을 때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었는데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신 일로 옥문이 열리게 하고 그를 채운 쇠사슬도 풀려나게 하였었습니다. 이때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 친 줄 알고 책임 추궁과 처벌당할 것이 두려워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이 그의 몸을 해치지 못하게 막았으며, 이 일로 바울은 간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주 예수 믿을 것을 말하였으며, 그 이름으로 그와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행 16:11-34).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의 일을 하는 것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전하는데, 그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겠는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전하는 것은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전하고 있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니, 예수님과 사도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을 전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니 어떤 의도에서이겠는지요. 사도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사도들이 전하는 말과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하여서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모두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만은 안 될 것이고 행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함께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에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라면서, 산 믿음에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지 그 뜻을 잘 헤아려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을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과연 그러한 의도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겠는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를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간다며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여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 - 백성들의 인도자로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고서 사용하고 있는 것임 - 을 조심하라며 그들이 하는 거짓된 말에서 그들을 알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문에서는 그 거짓 선지자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불과한 자들로서 비록 그들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일지라도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계율을 좇아 종교적으로 무흠하거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계율에 충실하며 열심을 갖고 지킴으로써 종교적으로 무흠해 보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왜 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특징짓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한다”(마 6:1, 5, 16)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의를 즐겨 행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구제, 기도, 금식에 있는 경건을 띠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행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유대 종교에 있으면서 경건한 삶에 있다는 것을 특징짓는 중요한 종교적인 의였습니다. 이들이 이것에 열심을 갖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의로운 행위에 있다는 것은 남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존경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이것을 유대인의 삶의 윤리인양 가르치며 자신들의 행함을 따라서 좇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의를 행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의를 많이 행하면 그것에 합당한 칭찬과 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닌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을 행하는 것에서 있어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의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보고서 행합니다만 사실 여기에는 어떤 의도 없이 자기들의 손으로 의를 만들어가는 일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실 주님으로 섬기지 않는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인데,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로 인식하고서 자신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주님’이라고 하는 칭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서만 사용되고 있는 이 칭호를 예수님을 부르는 것에서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범상한 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인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로 알고서 그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랍비’(선생님)나 또는 그 이상으로 예수님을 신적인 권능이 함께 하는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에서 갖는 위대한 분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으며 자신을 존경하여 ‘주님’이라고 부를지라도 이러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못박습니다. 이러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치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천국의 의가 아니며, 이러한 것에는 천국의 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종교적으로 무흠하며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를지라도 이 모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독생자 예수님이 자신이 보낸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생에 있게 하시는 것인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이적에서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여실히 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할 마음에 있지 않으며 다만 자기 의를 더욱 공고히 해나갈 뿐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세 가지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첫째,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으로’란 말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잘 헤아려서 죄 사함과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주님’으로 인식하고서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주에게 부탁함으로’, ‘주에게 도움을 받아서’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자들이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명하노니)” 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지닌 신적인 능력을 빌어서 선지자 노릇을 한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주신 예언을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이름’을 가지고 선지자 노릇을 하는, 즉 예언한다고 하는 자들로서 실상은 자기들 마음속에서 나오는 탐욕에 의한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거짓 선지자의 노릇을 하는 자일뿐입니다.
둘째,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합니다. 즉, 자신들에게는 선지자에게 주신 신적인 능력이 있다면서 주님의 이름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메시야의 진정성을 확증해 주는 성령의 능력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22-32에서, 특히 27절에서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동료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행위를 언급하였습니다. 이들은 마력, 마술을 사용하거나 어떤 규정된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거나 귀신 들리는 것을 막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행사하는 권능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 권능을 자신들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이들에게서 ‘주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은 단지 주문을 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를 말하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에는 물 또는 연기를 사용하면서 불려지는 것으로 무당이 하는 짓에서 얼마든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행위를 하면서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자신들에게 신적인 능력이 임하여서 그 권위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에 대해서 만일에 자신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들 또한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며 “그들이 너희의 재판장이 되리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신으로 하고 있는 일임을 증거하는 동시에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는 일이야말로 귀신의 힘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지, 아니면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지의 뚜렷한 차이점이 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신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귀신을 쫓아내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행해지는 일입니다만,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귀신이 쫓겨난 자에게는 그보다 더 힘센 귀신이 자리하여 그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서 이전보다 더 강력한 귀신의 지배에 놓여져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형편은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에게서는 더욱 강력히 예수님을 반대하며 성령을 거스르는 말을 합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합니다.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것은 몸이 약한 자를 회복케 하여 건강한 몸으로 있게 하고 병자를 고치는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적은 축귀와 함께 메시야의 진정성을 확증해 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이적>을 행한다며 주의 권능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또는 주의 권능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신의 능력이 임한 ‘권능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만, 이 모두는 ‘주의 이름’이 지닌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듯이 하듯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듯이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들이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은 없고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을 거스르는 말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이름’을 사용하여서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 성령 - 을 거스르는 말과 행동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며 자신을 거스르는 말과 행동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이들이 반대하고 모독하는 말을 하였던, 그래서 이들의 반대와 모독하는 말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들을 내쫓는 일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에게서 나타내시고 있는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바리새인이 그들이 배척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부인(부정) 당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불법을 행함에 있었던 죄를 심판하실 심판주의 저주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갈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영영한 불못’, 곧 지옥입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데 그 모두는 정작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 보내주신 주의 이름으로 불려질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이 단지 ‘주의 이름으로’ 말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약한 자와 병든 자를 고치는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을 천국에 들어갈 의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그러한 행위들로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는 것에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할 것을 주의 주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에 이들이 하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에 이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이들이 하는 ‘말’과 ‘행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참선지자에게서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하는 ‘말’과 ‘행위’에는 그것이 있음으로써 사람들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짓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말’과 ‘행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에는 천국의 복을 상속함에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에게서 나오는 거짓된 말인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그 ‘말’과 ‘행위’에는 영멸로 쫓겨남에 있게 합니다. 이것의 결정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천국복음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권능을 대하는 것에서 많은 사람을 영생 얻게 하시려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믿음‘에 있게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나라로의 부르심에 순종에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뒤를 따름에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통해서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는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셨으며(렘 1:5; 호 13:5; 암 3:2), 양은 자기를 돌보는 목자를 알듯이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습니다(요 10:14, 27). 이렇게 하나님의 신적인 권능이 사람의 마음의 내적인 깊은 곳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하는 ‘말’과 ‘행위’란 참 선지자가 하는 ‘말’과 ‘행위’에 있는 ‘생명’이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그들이 하는 ‘말’과 ‘행위’는 아무런 능력도 신뢰도 없습니다. 이들의 ‘말’과 ‘행위’는 거짓으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선지자가 하는 ‘말’과 ‘행위’는 거짓이 아닌 ‘참’(진실)으로 인해서 그 하는 말과 행위에 하나님의 신에게서 나오는 신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오실 선지자로 예언된 그 선지자로서 자신에게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있게 하시는 ‘말’과 ‘행위’에 있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함께 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능력 있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그 ‘말’하는 것이 능력 있고, 그 ‘행동’하는 것이 능력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 ‘말’하는 것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 ‘행동’하는 것이 힘 있는 것을 보십시오. ‘힘 있는 말’, ‘힘 있는 행동’,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에 따라서,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권세>에 복종하고 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서 떠남이 없이 여기에 서 있어오는 것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게 하시는 말씀이 쇠약해지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온통 육체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사는 것으로 영적인 관심이 없이 사는 것 같은데 성령의 능력으로 항상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여 그것을 구함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는 참으로 권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