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산화알루미늄이란 게 있다. 보크사이트를 특별한 방법으로 제
조한 백색 분말이다. 산이나 알칼리에 쉽게 반응하고 잘 녹는 특
성이 있는 기초화학제품이다. 상·하수 처리제와 제올라이트 등
범용 화학제품의 기초 원료와 유리, 인조 대리석, 세라믹 등 첨단
신소재 원료로 쓰인다.
이 수산화알루미늄이 우리나라에서는 딱 한 군데에서만 생산된
다. 케이씨(www.kochemical.co.kr)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수입
산이 점령하다시피 하던 국내 수산화알루미늄시장은 케이씨의 꾸
준한 노력 덕택에 국산화 비율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가고 있으
며 동남아, 일본 등 주요국에 수출까지 되고 있다. 케이씨를 이끄
는 박주봉 회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제47회 무역의 날에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반덤핑 제소로 상황 역전시키고 대일 수출까지
2004년은 케이씨에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한 해였다. 비록 20피
트짜리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이었지만, 수산화알루미늄 제조 강국
인 일본에 제품을 역수출한 첫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일 수출
이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다. 수출은 고사하고 회사가 주
저앉을 뻔한 고비를 숱하게 넘겨야 했다.
때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스
미토모, 슈와덴코, 일본경금속 등 일본 수산화알루미늄 ‘빅3’가 막
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저가 물량공세를 퍼붓는 바람에 국내시
장이 크게 교란된 상태였다. 이 분야 후발 주자였던 케이씨는 당
연히 물건이 안 팔려 창고에 재고가 쌓여 갔다. 생산라인이 서는
때도 있었고, 판매를 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생산원가에
팔아 근근이 존재감을 이어 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누가 봐도 뻔했다.
“일단 일본 업체들이 한국 시장을 먹기 위해 가격 후려치기를
한다고 보고 일본 업체들을 정부에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위기가 곧 기회’라는 생각으로 공정을 개선하
고 새로운 설비를 투입했습니다. 통합이 가능한 영역을 중심으로
부서 간 통합을 단행하는 등 비상 운영 체제도 가동했습니다. 이
렇게 해서 연간 50억 원의 경비를 줄였습니다.”
케이씨가 일본 업체들을 제소했을 때, 정부의 첫 반응은 시큰
둥했다. 그때 박 회장은 정부가 ‘일본이나 인도에서 수입해 쓰면
되지, 굳이 국내에서 이런 것까지 만들어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
각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케이씨
는 치밀한 자료 조사와 적극적인 대응으로 결국 제소 8개월 만에
무역위원회로부터 ‘일본 업체들의 덤핑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
을 끌어냈다. 그때부터 케이씨가 제조한 수산화알루미늄이 국내
시장에서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고, 회사 정비와 제품 개발에 나
설 수 있었다.
‘공기업 민영화 1호 기업’의 탄생
이제는 ‘수산화알루미늄’ 하면 ‘케이씨’라는 등식이 성립하지만,
케이씨는 박주봉 회장이 설립한 회사가 아니다. 2001년 공기업
이던 한국종합화학공업이 박 회장의 손을 거쳐 케이씨로 다시 태
어난 것이다.
“한국종합화학공업을 인수하기 전부터 인천에서 대주중공업
이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열연코일, 철 구조물, 플랜트
건설과 물류, 운송, 항만하역업 등을 하는 회사였습니다. 그러니
까 화학 업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상태였죠.”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수질 정화제와 유리, 세라믹,
전자부품의 주요 원료인 수산화알루미늄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
다. 그러다가 국산화 필요성을 느끼고 1996년 정부가 설립한 게
한국종합화학공업이다. 이후 제품 생산에 나섰지만, 매출에 비
해 설비투자가 막대해 민간기업에서는 그 어디라도 뛰어들 엄두
를 내지 못했다. 생산 대비 효율이 많이 떨어지는 업종이었다. 결
국 2001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침 때 여러 매물이 쏟아져 나
왔고, 한국종합화학공업도 그중 하나였다. 정부가 보기에 이 회사
는 가망이 없었다. 하루에 수천만 원씩 적자를 내고 있던 상황이
었고, 기존 기술진의 고용 승계 기피 등으로 기술인력 또한 부족해
정상 가동에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박 회장은 ‘한국종합화학공업’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곳곳에
서 비료공장을 운영하는 회사이고 공기업’이라는, 누구나 아는 정도
의 기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을 뿐,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는 상태
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인수전에 나설 수 있었을까?
“우리만의 독자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하
던 중 공기업인 한국종합화학공업이 민영
화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래서 인수 의사를 밝히고 주위 전문가들에
게 자문을 구했더니 하나같이 만류하고 나
섰습니다. 하지만 수산화알루미늄이 수질
정화나 전자산업의 기초소재여서 선진국
일수록 많이 쓰이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향후 성장성이 밝다는 뜻이죠. 또 하나, 기초소재산업을 지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유일 업체라는 점도
메리트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한심하다’고 할 만큼 좋지 않았습
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인수 후 회사를 꼼꼼히 뜯어보니 그야
말로 막막했습니다. 하루에 수천만 원씩 적자를 내고 있더군요.”
케이씨 힘의 원천, 노사 화합
2001년 6월 한국종합화학공업을 인수한 박주봉 회장은 회사 이름
만 케이씨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측과 걸핏하면 갈등을 빚던 노동
조합과 마주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가 한국종합화학공업을 인수할 당시 다른 기업보다 유리한 조
건을 내건 게 있었습니다. 바로 직원의 고용 승계였습니다. 우리와 경
합을 벌였던 쪽에서는 직원의 고용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데 반해 저는 직원들과 화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때부터 박주봉 회장은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을 믿
을 테니, 우리 역시 믿어 달라”면서 노조 간부들을 설득하기 시작
했다. “지금 당장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수 없지만, 3
년 뒤에는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는 당신들도 망하고 나도 망한다”며 엄정한 현실을 강조하기도 했
다. 이 과정에서 노조 간부들과 밥과 술을 먹으며 시간만 나면 얼
굴을 마주했다. 당시 한국종합화학공업 노조는 회사를 불신하고
있었고, 민주노총은 ‘공기업 민영화 1호’라는 점에서 박 회장과 회
사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의심의 눈초리가 하나둘 거둬지
는 게 느껴졌고, 노조 안에서도 ‘박 회장을 한번 믿어 보자’는 분위
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이때 박 회장의 경영 원칙 중 하나가
세워졌다. 바로 ‘자르지 말자, 고용하자’였다.)
“노사 화합을 밑바탕으로 경영 전 부분에 걸친 강도 높은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낭비 요소가 있으면 과감하게 잘라내고 필요한 것
들은 모았습니다. 신제품 개발에도 나서 물성이 우수하고 환경오
염의 원인인 할로겐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유독가스도 발생시키
지 않는 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006년에는 불에 강
한 난연 재료인 초미분 고백색 수산화알루미늄의 국산화를 이루
기도 했습니다.”
케이씨는 2001년 이후 현재까지 노사가
단 한 번도 다툼을 벌이지 않은 무분규 사
업장으로 이름이 높다. ‘주인의식 갖기’ 캠
페인을 통해 직원들에게 참여의식을 심어
주는 동시에 생산 현장에서 문제점이나 애
로사항이 발생하면 노사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 먹거리로 고순도 알루미나 제조기술 개발 중
성장의 발판을 다진 케이씨는 이후에도 품질 향상을 위한 설비 신
설, 생산설비 보완 투자, 신제품 공장 가동 등을 통해 생산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국내외에 6건의 특허를 출원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기업들이 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았지만, 기술연구
소의 끊임없는 연구로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런 정성이 쌓이고
쌓여 2004년에는 3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동시에, 수출과 수
입 대체의 공로를 인정받아 박주봉 회장이 은탑산업훈장을 수훈
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2008~2009년 중에는 총 매출 1,000
억 원을 달성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박 회장이 아니다. 수산화알루미늄의 적용
분야가 워낙 넓고 주요 분야에서는 독일이나 일본처럼 선진국이 여전
히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의 표현을 따르자면, “케이
씨는 중학생인데 독일과 일본 업체는 대학생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케이씨는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고순도 알루미나 제조기
술을 개발 중이다. 고순도 알루미나는 발광다이오드(LED), 정보기
술(IT), 자동차, 차세대 전지, 의료기기 등 미래 핵심산업의 기초 신
소재인 파인세라믹스의 원료다. 향후 신규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
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올해 정부 국책사업으로 지정돼 LED용
국내시장 규모가 향후 10년 안에 2조 4,000억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강점은 가격경쟁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케
이씨가 더욱 주력해야 할 일은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높
이는 것입니다.”
케이씨는 이를 위해 전남 목포에 있는 연구소를 인천으로 확장
이전할 계획도 갖고 있다. 수백억 원 이상의 자금이 투입될 R&D
센터는 이르면 2011년 초 용역 설계에 들어가 오는 2015년 초반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현재 내부 실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착공 준비
에 돌입한 상태다.
케이씨는 수산화알루미늄 분야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원료
용 알루미나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제품은 톤당 가
격이 최고 2,000만 원 이상으로, 그야말로 수산화알루미늄제품
의 최고봉이다. 이를 위해 현재 20명 수준인 R&D 인력을 더욱 보
강할 방침이다
백화점 주인’이 목표 박주봉 회장의 하루는 바쁠 수밖에 없다. 경영하는 회사가 케이 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공식 직함도 대주·케이씨그룹 회장이다. 일단 케이씨의 모기업 격인 대주중공업은 1988년 대주개발로 출발한 회사로 열연코일, 철 구조물, 플랜트 건설 및 운송, 항만하 역 등이 주력이다. 대주중공업을 통해 오랫동안 철 구조물 사업을 해 온 터라 2001년 설립된 한국철강구조물협동조합 이사장을 지 금까지 맡아 오면서 조합의 건전한 발전과 조합원의 복지 증진을 위한 협동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조합원 업체가 원자재, 부 품 등을 구매할 때 공급 업체의 담합과 부당한 요구를 차단함으로 써 최상의 제품을 저렴하고 신속하게 납품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 는 등 조합원 업체의 경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1999년 설립된 대주이엔티는 연간 직관 1만 5,000톤, 이형관 4,000톤의 생산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단열 이중보온관 전문 생 산업체다. 냉난방용 단열 이중보온관, 상수도용 이중보온관, 냉 매용 이중보온관 등을 지역난방공사, LG파워, 한국전력, 인천국 제공항, 서울에너지 등에 공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엘리베이터 사업부는 국내 최대 용량의 자동 교정설비와 최신식 가이드레일 가공설비를 갖추고 현대엘리베이터, 오티스, 티센크루프, 쉰들러 등 주요 엘리베이터업체와 거래 중이다. 삼양산업은 건설현장 구조물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철 스크랩 을 수집해 정제 가공하는 업체이며, 케이씨 세라믹지점은 황토를 원료로 친환경 건설자재인 점토 바닥 벽돌과 점토 벽돌을 1일 10만 장씩 제조하고 있다. 이 업종에서는 광주·전남의 유일한 업체다. 최근 인수한 코레스는 자동차 경량화를 위한 부품 전문 생산업 체로, 경기 안산, 경북 울산과 전북 전주, 전남 광주 등에 주요 가 공시설을 갖추고 일관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초경량, 고강도 자동차 차체 부품에서부터 항공기용 알루미늄부품, 통신용 전자 부품, 각종 건설장비 산업장비 부품을 만들고 있다. 전국에 15개 사업장을 두다 보니 다니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느 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업종이어서 처음에는 임직원 간의 소통도 원활하지 못하고 구심점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원칙과 기 본을 중시하면서 임직원과 늘 소통하고 현장에서 함께하다 보니 어려워 보이던 부분들이 하나하나 극복되더군요. 비유하자면, 지 금은 제 위치가 슈퍼마켓 주인 정도지만 앞으로는 백화점 대표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꿈을 현실로 만들다 박주봉 회장은 분명 성공한 기업인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꿈을 이뤘다는 점에서는 성공한 기업인 이전에 목표를 달성했고, 지금 도 달성해 나가는 실천적인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어렸을 때 집이 무척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네 집이 부자여서 당시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귤 같은 과일을 박스째 들여놓고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고 물었더니 친구가 ‘사업하신다’고 대답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죠. ‘나도 사업을 해서 성공해 보겠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사업을 시작한 것도 어렸을 때 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교직에 잠시 적을 뒀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곧 해운회사에 입사해 실무를 익혀 나갔다. 그때부터 꿈
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해 ‘2~3년 뒤에는 사업을 한다’는 목표
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돈이 모이고 때가 됐다는 판단이 들자 그
는 곧바로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두고 물류업에 뛰어들었다. 1987
년 덤프트럭 한 대를 사서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무연탄을 실어 나
르기 시작했고, 이듬해 대주중공업을 법인화하면서 오늘의 기틀
을 마련했다.
“한걸음 한걸음 꿈을 향해 다가가는 일이 무엇보다 재미있었습
니다. 비록 시작은 초라했지만, 하나씩 이뤄가면서 ‘하면 된다’는
말을 몸소 깨우쳐 갔습니다.”
박주봉 회장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게 몇 가지 있다. 2000년 대
한아이스하키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2005년에는 실업탁구연맹
수석부회장을 지냈다. 2008년의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현재는 대한탁구협회 수석부회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농구도 했고, 전국체전
에 서울시 육상대표로 트랙을 누비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이 운동
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체육계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이런저런
직책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180cm에 육박하는 훤칠한 신장에 탄탄하게 다져
진 몸매가 눈에 띈다. 건강 비결을 묻자 즉각 ‘운동’이란 답변이 나
왔다.
“집이 서울 성북동인데, 주말에는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고 운
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집 부근의 산을 1시간에서 1시간 반가량
조깅합니다. 스트레스 해소와 체력 단련에는 역시 운동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특별한 소신이나 원칙이 있으면 말해 달
라고 하자 “부지런해야 합니다. 어렵게 자수성가하다 보니 지금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
기 위해 노력합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