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6장 1-8절
설교제목 : 네 말의 환상
세월의 각인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복잡한 정치적 구호가 일단락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논어의 양화편에서 옛사람들이 가진 병폐보다 못한 처사로 살아가는 지도자들에게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옛날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의 병폐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그것마저도 없어진 듯하다. 옛날에 뜻이 거창했던 사람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주견대로 했으나, 지금의 뜻이 거창한 사람은 주견도 없이 함부로 한다. 옛날에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엄격하고 모가 났으나, 지금의 자긍심 강한 사람은 성내고 싸움이나 한다. 옛날에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했으나, 지금의 어리석은 자는 속이기만 할 뿐이다.”[공자 지음, 김형찬 옮김(2015) : 논어, 홍익출판사, 서울, p202]
퇴보하는 정치가 아니라 조금더 분발하여 나라와 국민을 위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주기를 맞이합니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꽃다운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생존자와 유족의 상처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남아 있습니다. 한 세월포 유가족대표는 인터뷰에서 “참사가 아픔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안전한 사회로 만드는 초석이 되길 바란다.”, “참사를 잊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다.”고 했습니다. 혹자들은 지겹다고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비극을 막는 길임은 분명합니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이 조금은 크게 숨을 쉬고 남겨진 자의 몫을 살아내었으면 좋겠습니다.
흰 말의 심판
두루마리에 일곱 인이 봉해진 것을 죽임당한 어린양이 받아들고 그 일곱 봉인을 떼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네 말인 흰색, 붉은 색, 검은색, 청황색 말이 심판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런 네 말의 특성은 스가랴 6장에서 등장하는 병거를 끄는 붉은 말, 검음 말, 흰말, 얼룩무늬 힘센 말과 유사합니다. 이들은 하늘의 네 영, 곧 바람을 상징하고, 세계를 순찰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런 네 말은 연금술의 변환국면이 니그레도(흑화), 알베도(백화), 루베도(적화), 치트리니타스(황화)와 순서가 다릅니다. 연금술적 변환과정은 자연적 변화과정의 절차라 한다면 요한계시록은 검음이 빨간 뒤에 위치합니다. 이것은 종교의 역사에서 붉은 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은 첫 번째 봉인이 떼질 때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같은 소리로 “오너라(또는 가거라)”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우레같은 소리는 초월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닌 하늘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라 또는 가라고 말한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환상의 내용인 말탄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즉각적인 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이 있고 난 후 활을 가진 자가 흰 말 위에 있었고,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흰 말을 탄 자는 이기면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흰말을 탄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많은 이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혹은 장차 나타날 정복자의 이미지로 가장 타당한 것으로 봅니다. 그가 승리자와 정복자의 면류관을 쓰고 흰말을 타고 있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나 로마의 정복자라는 의견들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묵시적 그리스도 또한 흰말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바람, 영, 번개 등을 표상하는 부성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동적인 리비도를 가지고 심판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흰 말을 탄 그리스도가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은 전쟁과 권력의 상징으로 종종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표상합니다. 활은 죽음의 신속함과 빠른 출현을 상징합니다. 때로 역병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화살은 설정된 경계를 넘어서 도달하는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때로 태양광선(아폴로의 화살)을 대변하는데, 빛의 상징으로 지식과 배움의 표식이기도 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신성한 소리, OM은 무지를 관통하여 참되고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하는 화살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눈을 가린 채 화살로 목표를 겨냥하는 것은 일본의 명상 기법인 궁도弓道로 자아 지향적인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슬람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이 활은 심판의 신속함과 급속한 출현을 통하여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고 보다 높은 정신적 발전으로 나아가게 하는 신성의 힘을 가리킵니다. 흰 말을 탄 그리스도에게 들린 활은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의 무의식성을 겨냥하여 심판할 것입니다. 그 시간이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이 될 것입니다.
붉은 말의 심판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둘째 생물이 “오너라”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빛 같은 붉은 말이 나타났습니다. 그 붉은 말 위에 탄 사람은 서로를 죽이도록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아 가졌으면, 큰 칼을 받았습니다. 이 붉은 말은 피와 불같이 붉은 색의 말로 전쟁과 살육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맹렬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죽음과 갈등, 긴장을 초래하는 자입니다. 붉은 말에 탄 자는 큰 칼을 들고 있습니다. 칼은 자르고 분리하고 분별하고 식별하는 도구입니다. 일종의 분석적 기능으로 로고스의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이 부정적으로 기능하면 공격적인 비판과 파괴를 일으킵니다. 큰 칼은 심판의 도구로 가차 없이 공격하고 비판하며 죽임을 실행합니다. 우리는 종종 칼의 상징과 관련된 꿈을 꿉니다. 그 칼은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분리하여 새로운 국면의 전환을 초래합니다.
미카엘 마이어의 “달아나는 아탈란타”, 도판 8에서 도판의 표제는 “알을 취해서 불검으로 내리치라”이다. 담화에는 “철학자들은 그들의 알을 불로 태우는데, 그것을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과 성장”할 수 있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이 그림의 왼쪽에는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가 있고, 그 앞으로 사각의 단위에 알이 놓여져 있다. 현자는 오른손에 칼(불 칼)을 들고 치려하고 있다. 불 칼로 알을 치는 행위는 분리 혹은 분해이며, 일종의 불의 가열을 통해 압력을 가하여 알 속에 있는 배아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칼은 모든 혼돈 속에 얽혀있는 무의식성으로부터 분리하여 갈등을 초래함으로써 새로운 변환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검은 말의 심판
셋째 봉인이 떼어질 때 검은 말이 나타나고 그 말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리기를,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 해를 끼치지 말아라(6:6)”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입니다. 검은 말은 죽음과 절망, 혼돈의 특성을 지닌 특성입니다. 검은 말이 지닌 저울은 심판의 저울이다. 하루 품 삯이 밀 한되고 보리 석 되도 하루 품 삯이라는 것은 이런 가격은 당시 시세의 12배 혹은 16배 가량입니다. 물건값이 치솟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거짓 저울로 속이는 무법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전쟁과 기근으로 물건을 구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인플레이션으로 국가 부도 사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검은 말을 탄 자의 저울은 경제적인 활동의 상거래용입니다. 저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한 사회는 몰락합니다. 이는 엄청난 재난입니다. 개체에게 있어서도 저울의 추가 기울어지면 정신의 균형은 깨지고, 해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울 또는 측량하는 것은 예언자에서 죄를 판가름하고, 심판에 앞서서 측량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스가랴, 미가,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등에게 측량할 것을 명령하신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바벨론 벨사살왕은 잔치 도중에 이상한 글자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람어로 메네Mene, 메네Mene, 데겔teqel, 바르신Parsin입니다. 두 가지로 풀이되는데, ‘세었다’, ‘저울에 달렸다’, ‘나뉘다’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아람어의 화폐단위로 ‘만원’, ‘백원’, ‘일원’으로 완전한 멸망의 판결이 났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벨사살왕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있었고 결국은 나라가 나뉘어 멸망당한다는 뜻입니다. 심판의 저울에 달려서 모자라면 결국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제문의 서Book of gate에서 9번째 문은 마지막 심판의 장면인데 저울을 들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이집트의 사자의 서books of the dead에서도 심판의 장면을 소개한다. 심판은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로 등장한다. 만일 팬이 균형에 맞지 않는다면 그 심장은 기다리는 죽음의 악어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심판의 저울은 심리학적으로 자아에 관한 객관적 기준을 부과하는 활성화된 자기의 한 측면입니다. 자기는 분명하게 자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자아의 의지를 넘어서 방향을 바꾸어가려 합니다. 하나님의 저울 앞에서 그분의 절대적 객관적 기준으로 우리가 매달릴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우리에게 주신 삶을 더 값지게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청황색 말의 심판
넷째 봉인이 떼질 때 청황색 말이 나타났고, 그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입니다. 이 사람 뒤에 지옥이 뒤따릅니다.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들이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죽입니다. 청황은 실제로 그리스어느 클로로스(kloros)로 녹색을 의미합니다. 이런 녹색은 성장과 희망을 의미하지만, 연금술에서 부패한 금속, 메리쿠리우스가 녹색을 띱니다. 이는 부패한 정신적 힘이 정신적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정신적 죽음과 황폐가 인격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묵시적 심판의 말을 탄 자가 인간 정신을 황폐화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묵시적 심판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를 깊이 있게 살피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