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양주(楊州)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조선 시대 양주(楊州)는 원래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1392년 새롭게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강 북부의 한양부가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였으며, 기존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 즉 오늘날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옮기고 행정 구역명을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쳤다. 세조 때 양주목으로 승격한 양주는 조선 중기에 들어 한때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504년(연산군 10)에 경기 북부 지역에 강무장(講武場), 즉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을 조성하면서 양주 지역의 백성들을 인접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사실상 양주라는 행정 구역은 없어졌다. 그러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과 더불어 다시 부활되었고, 치소는 오늘날의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부근에 새로 조성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경기 소속의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회암사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에 있는 큰 절이다. 이 절은 선종 조계종의 사찰로, 고려 공민왕 대부터 조선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선·교 양종을 통틀어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다. 특히 조선 건국에 즈음하여 이성계에게 음양으로 조력하였던 왕사 무학(無學)이 이곳에 상주하였고, 이성계 자신도 자주 회암사를 방문하였다.
조선 초 회암사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국가와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특히 태조는 회암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태조는 왕사인 무학을 회암사에 거주하게 하고, 대규모 법회 참석이나 다른 곳으로 행차 시 왕사 접견을 이유로 전후 7차에 걸쳐 회암사에 행차하였다. 또한 왕권에서 물러난 후에는 한때 은신처로 삼기도 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 윤씨가 선·교 양종을 다시 설치하고 승과를 행하며 도첩제를 실시하는 등 보우(普雨)를 내세워 불교 중흥을 꾀하였다. 이에 1565년(명종 20) 회암사에서 무차 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문정왕후 윤씨가 전날 밤 갑자기 승하함으로써 대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곧 피살되었으며, 회암사도 결정적인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더군다나 회암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지공(指空)이 중창한 이후 보우가 후원하던 때까지 약 200년에 걸친 회암사의 영화는 끝이 나고 말았다. 2012년 현재 양주 회암사지의 발굴은 완료되었으며, 회암사지박물관이 건립되어 1997년부터 발굴, 조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종조에 “양주에서 생산되는 옥의 품질이 매우 좋으니 상의원에 명하여 어대(御帶)를 만들게 하였다”라고 한 기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에 갈립산에서 옥석이 나온다고 한 것을 통해 볼 때 양주 지방에서 옥이 채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02년(연산군 8) 왕이 양주목사에게 “듣건대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에서 남쪽으로 50~60리 거리의 산등성이에서 자수정이 난다기에 전서방색(前書房色) 안중남(安仲男)을 보내어 조사하고자 하니 너는 수정을 캐는 인부를 뽑아 주고 또 사사로이 채굴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 기록을 볼 때 자수정도 채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양주의 토산품으로 밤과 민물 게가 유명하였다.
조선 시대 양주 지방의 역에 대해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청파역·노원역·영서역·평구역·구곡역·쌍수역 등 6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서역·평구역·녹양역·쌍수역 등 4개의 역을 열거하고 있다.
조선 시대 교육 기관으로 양주향교가 있었고, 능묘로는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조선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묘인 온릉(溫陵)[사적 제210호]을 비롯하여 석현리의 권율 장군 묘(權慄將軍墓)[경기도 기념물 제2호], 삼하리의 이수광 선생 묘(李晬光先生墓)[경기도 기념물 제49호], 광적면 효촌리의 백인걸 선생 묘(白仁傑先生墓)[경기도 기념물 제58호], 남면 신산리의 이준 선생 묘(李準先生墓)[경기도 기념물 제120호], 덕계동의 송석 최명창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78호] 등이 있다.
이외 소론을 대표하는 관료이자 학자였던 육곡 서필원(徐必遠)의 묘 및 부여 서씨 고문서가 광적면 광석리에 남아 있다.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의 해유령[게너미고개]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申恪)이 육전에서는 최초로 전승을 거둔 전첩지이다.
양주문화대전(이도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