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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 눅10:25-37
지난 8월 초 저녁 퇴근 시간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벌어진 흉기 난동 사건이 119 신고부터 범인이 체포되기까지 6분밖에 걸리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 안에 무고한 시민 14명이 다쳤는데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인 22살 남성 최원종은 이날 오후 6시 서현역 AK플라자 인근에서 승용차를 타고 인도로 돌진하면서 5명이 차량에 치어 부상을 입었고 나머지 피해자들은 범인이 차에서 내려 흉기를 들고 AK플라자 안으로 들어가 휘두른 흉기에 화를 입었다는 것인데 출동한 경찰은 범인을 살인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최근 신림동과 서현역을 시작으로 대전 교사 피습 사건 등 보름간 유사한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한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치안이 좋아서 이런 묻지마 범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밖에 다니면서도 혹시 내가 그런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까지 들게 되었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이윤석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는 만연한 개인주의와 치열한 경쟁으로 고립과 은둔에 빠진 청년들이 늘고 있으며, 이들이 탈락과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좌절감을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내게 되면 그것이 ‘묻지마 범죄’가 되는 것”이라며 정부는 소위 ‘은둔형 외톨이 테러 범죄’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주말에는 스마트폰에 온 문자한번 잘못 눌렀더니 8시간만에 사기(스미싱) 사건으로 3억8천만원대 피해를 봤다는 사건도 접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한 자영업자인 피해자 A씨에 따르면 택배 수신 주소가 잘못돼 정정을 요구하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고 인터넷주소(URL) 링크를 눌렀더니 이후 A씨의 휴대전화는 먹통이 됐고 8시간에 걸쳐 3억8천300 만원이 스마트뱅킹을 통해 빠져나갔다고 하였다. 다음날 은행 계좌에서 자신의 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고 부산 사상경찰서에 신고한 A씨는 "은행 일회용 비밀번호(OTP)가 있어야 계좌이체가 가능한데 어떻게 돈이 빠져나가는지 모르겠다"며 "순식간에 벌어진 핸드폰 문자 해킹으로 평생 일군 모든 자산이 순식간에 증발했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최근 8월 한달 동안 서울과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들은 이렇게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세대에 살고 있는데 언제 내 몸이 다칠지 언제 내 재산을 잃어버릴지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라니 다른 나라는 이보다 더한 사건들이 비일비재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치열한 개인주의와 경쟁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마귀는 인생낙오자들에게 이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발악 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이런 흑암의 세력들과 맞설 수 있는 것은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밖에는 우리를 도울 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웃을 섬길려고 하고 이웃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이런 묻지마 사건을 보면서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인생실패한 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야 하며 진정한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보면 하나님은 인생을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패배를 딛고 일어나 성공하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어떤 악의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최후에는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패배를 패배시키면서 전진해온 존재가 아닌가! 인간은 패배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될 수 있는데 그러면 누가 패배자가 되지 않고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성경말씀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으며 세상에서 승리한 자들만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내일의 사회는 오늘보다 더 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출19: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개월이 되던 날 시내광야에 이르러서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니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계명을 주셨는데 이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인 제사장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다시 두 계명으로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다시 음미해 보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무엇과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즉 하나님과 맘몬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해야 하고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더 압축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장과 25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굶주린 자를 보면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고 목마른 자를 보면 마실 것을 주고 추위에 떠는 자를 보면 따뜻한 옷을 주라는 것이고 병든 자를 보면 치료해 주고 피곤한 자를 보면 쉬게 해 주고 옥에 갇힌 자를 보면 그 억울함을 풀어 주고 찾아가서 위로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앞으로 한달 있으면 AG올림픽이 열리는데 사람들은 올림픽경기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너무나 기뻐하는데 정작 선수 본인은 얼마나 기쁠까! 그는 하루아침에 공인이 되기도 하고 어디가도 알아보고 환영하기도 하지만 그런 상도 그가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효력이 있는 것이지 이 세상 떠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 성경을 통해 인간이 메달 딴 것보다 더 가치있는 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하늘나라에서 받는 최고의 상
우리들은 학교다니면서도 또 성인이 되어 직장 다니면서도 행한 결과에 따라서 상을 받곤 하였다. 상받는 순간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받을 때 행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 믿으면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간다고 모두가 똑같이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겨우 불가운데 구원받아 간신히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편 강도는 죽으면서 구원받았으니 그저 불가운데서 구원받았을 뿐 상급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 일한 대로 받는 상급도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천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큰 상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워지는(마5:45) 상이 제일 큰 상이구나 생각이 드는데 이러한 상을 누가 받는가 봤더니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만 잘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침노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하는데 마지막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암8:11)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마지막 때는 진실한 하나님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말씀은 믿어지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상은 올림픽 메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가치있는 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을 타기 위해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예수님을 섬겼다면 그 받을 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넘치는 복을 받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베푸는 자에게는 풍성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이러한 교훈은 정말 새로운 교훈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활원리가 되는 이 새로운 교훈은 하나님나라를 소유한자와 그러지 못한 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소유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막힌 담이 남아 있을 수는 없으나 이런 교훈을 모르고 단지 육신의 안일함을 위해 산다면 사소한 감정도 암금으로 남아있게 되어서 이웃과의 벽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 이웃이 원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원수로 된 이야기에 대해 예를 들면 미국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 옆에 또 다른 한인이 동일한 업종의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된 경쟁이 미움을 넘어 용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도록 멈추지 않습니다. 이민 와서 일군 전 재산과 희망과 같은 한 민족의 동질성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끝이 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받은 작은 상처를 더 큰 아픔으로 되돌려 줄려고 한다면 결국 평생의 원수가 되고 나서야 후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든 인생들이 이처럼 끝까지 가게 되는데 이웃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사랑을 말씀하신 사람에 대해 말한다면 2천년 전 유대 땅에 초라하고 볼 품 없는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주 하나님 밖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젊은 청년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주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하고, 자신을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젊은 청년에게 몰려가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고 이런 권세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은 처음이라며 군중들이 주님을 따르는 웅성거림이 나타나니 율법과 성전제사를 주관하고 있던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젊은 청년을 넘어뜨리고자 미행도 하고, 꼬투리 잡으려고 어려운 질문도 던져보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때 율법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5-29)" 이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것에 대한 대답을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웃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때려서 거의 죽게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다. 또 곧바로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예화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요. 유대교를 이끄는 제 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지만, 유대인들에게 천하게 여김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이웃사랑을 몸소 보여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해할려면 우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유대인과 이방족의 혼혈로 생긴 종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혈통을 더럽힌 자라 멸시받고 박해받았으며 그 반목은 매우 깊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 남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 도중 갑자기 “왜 당신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배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참된 예배란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진정한 예배가 올 것이며, 참된 예배란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보더라도 정통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를 매우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갈등의 골이 깊어져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정치적, 종교적 노선을 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지 않고 그리심산에 사마리아 산당을 만들어 예배드리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즉 이웃이란 율법학자와 같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자들이란 것이다. 이 말씀은 개인주의로 인하여 눈물과 인정사정이 메말라 버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시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지기를 바라는지를
여기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죽게 된 자 앞에 선 제사장의 모습
먼저 제사장은 시내산에서 레위의 증손자 아론을 성별하여 세운 데서 시작되었으므로 제사장은 반드시 아론의 후손이어야 했으며 육체적으로는 흠이 없어야 했고 그들의 몸과 마음, 삶은 항상 깨끗하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이 가져온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십일조를 감독했을 뿐만 아니라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소집하여 축복했으며 문둥병을 진단하고 서원자의 값을 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언약궤를 옮기고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했으며 24반차를 따라서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물로 제사들 드렸습니다. 그들의 하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신분인 제사장의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강도에게 맞고 벌거벗긴 채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는 사람들은 이 제사장에 대하여 종교적인 위신자니,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사람이니 하면서 쉽게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줄 압니다. 앞의 제사장의 위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성별된 사람으로서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제사 드리러 가는 제사장이 벌거벗긴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만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더러운 것이나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한 자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24반차를 따라 오랜만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면 제사장으로서 어떠한 인간적인 사사로운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생각에서 강도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지 않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 나름대로의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에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내 앞에 죽어가는 자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죽게 된 자 앞에 선 레위인의 모습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은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들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에도 들지 않았다(민1:47-49). 그들이 하는 일들은 제사장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고 그들은 성전에 관계된 여러 가지 잡일까지도 다 맡아서 하는 봉사자들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성전의 일만 하는 전문적인 사람들이었다. 성전의 문지기와 회막을 관리했으며 찬양을 담당했으며 또 장막을 치고 거두며 운반하는 일들을 했습니다(민1:50). 더 나아가 이 레위인들은 성전에서의 질서와 제사장들을 수종드는 일을 했으므로 그들은 당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앞에서 레위인의 태도를 보면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레위인들에게도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오직 제사장들을 수종들면서 성전에서 전문적으로 봉사만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므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분명코 무슨 죄가 있기에 저렇게 된것이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또 나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레위인은 자기 나름대로는 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그냥 피해 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질서를 지키고 제사장을 도와 수종드는 일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다는 생각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그대로 방치하고 지나간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을 기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생명을 살리는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3) 죽게 된 자 앞에 선 사마리아인의 모습
사마리아인들은 BC 721년 앗수르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사마리아인들은 집단 이주 정책에 의해서 혼혈족이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부정하게 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들이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당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왕래할 때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이 가장 빠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밟기 싫어서 요단강 동편 쪽으로 돌아서 가곤 했겠습니까. 하지만 거반 유대인 앞에서 무시당하면서 살았던 사마리아인의 태도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치료비가 더들면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3-35)고 하고 떠났습니다. 사실 강도 만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서는 원수와 같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죽게 된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돌보아 주고 떠났으니 이 사마리아인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신 후 율법사가 사마리아사람이라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의 유혹을 받아 명예와 권세, 물질과 향락을 쫓아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강도 만나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가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주님의 교회로 인도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 옆을 지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취한 행동을 비유로 말씀하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서 이 세상의 아픔과 상처는 강도들이 아니라 책임회피를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상처받은 이웃을 돌보는 반전을 보면서 우리들도 바로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선하다고 할 수 없는 자들임에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유대인 율법사로부터 사마리아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워지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현재 위치는 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멸시당하는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마귀 강도 만나 신음하는 영혼을 주님의 교회로 인도하여 살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은 랍비들의 예화에 나오는 단골인물들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제사직 계급으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지만 이들의 행동은 종교법상으로는 다시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뿐 아무런 문제는 없다. 또한 그들은 보통 율법을 방패로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 이들이 보인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보통 유대인들 보다 오히려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낫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시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이셨는데, 원래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 하면 안됐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를 부정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셨고, 율법만 지키던 바리새인들이 주요 적대세력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 이런 비유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류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정도로 취급을 당하는 부류가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어떤 신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동성애자가 진정한 이웃이다'는 대답을 들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예수님의 이런 비유는 기존 종교계의 기득권층에 대한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교회 직분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문의 결론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뚜렷하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으로 이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이며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가 이런 사마리아인을 자기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경멸해도 시원치 않을 천하고 멸시받을만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사랑의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일차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이웃은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 매일 만나더라도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웃은 그 모든 이유를 뛰어넘어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종교와 혈통, 신분제도 등에 대한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서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사마리아인은 사랑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33절에 보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직위 때문에 아니면 편견 때문에 인간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민첩하고 강도 만난 자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그 상처 부위를 싸맵니다. 아마 자기 옷을 찢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서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는 밤새도록 돌보아 줍고 이튿날은 주막 집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당시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면 굉장한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는 적당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아담을 만드실 때는 이러한 측은지심을 우리 마음속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하면 긍휼이요 자비의 마음입니다.
(1)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장기려 박사
2019년 1월 1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신대복음병원 명예원장(초대병원장) 故 장기려 박사를 비롯한 16인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신규 지정한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유공자 제도는 일반 국민이 존경할 만한 우수한 업적이 있는 과학기술인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해 명예와 긍지를 높이고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이번에 선정된 융복합 과학 분야에는 인술을 베푼 ‘한국의 슈바이처’ 고 장기려 고신대복음병원 명예원장과 백신 개발로 소아마비 발생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유공자로 선정됐다. 장기려 박사는 간 절제수술을 성공시킨 간장외과 개척자이며 간의 혈관과 미세국조 연구로 간 수술에서 출혈을 조절하는 의료기술을 개발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이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기독교 신앙에 기반 해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하신 분이시다. 2018년 11월 16일 알쓸신잡3에서 조명한 장기려 박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고인의 과거 훈훈한 미담이 주목받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대한민국에 보험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의사이자 넘치는 사랑으로 평생을 사회에 헌신한 위대한 대의이며서 별명으로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한다. 한마디로 대인배 혹은 성인의 표상인 장기려박사는 대한민국의 의사. 야인시대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으나 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합니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내가 처음 장기려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스물 네 살 되던 해 여름 어느 주일 오후였다. 그 때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며 육신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거나 헤어질지라도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사는 것’이라는 기독인의 결혼관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 후 ‘밀알의 씨’ 부산모임이 시작되어 하루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자는 선생님의 제안에 수업을 마친 후 매일 부산대학병원 화장실 청소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독신으로 생활하시던 대학 사택으로 돌아가시던 선생님의 식사는 늘 보리밥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44세의 패기 찬 젊은 외과 과장으로 부산대학 의과를 외과 중심으로 창건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의사가 되면 불쌍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서약을 두고 평양에 있을 때나 부산에 와서나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변절하거나 굴하지 않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다. 선생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변치 않는 성경의 진리가 반석을 이루고 있었다. 그 분의 말씀이나 행동에서 보여진 높은 이상의 언급들은 평소에는 그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수년이 지난 후 어렴풋이나마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명예욕보다는 진지하고 순수한 학문적 욕구를 늘 앞세우시며 학문과 교육에 열정을 보이시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산 복음병원에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환자에게 치료비가 없으면 그대로 도망쳐도 좋다는 병원 방침을 내세우셨는데도 병원 운영에 적자는 없었다. 그리고 직원의 규제나 행정 내규에도 별로 역점을 두지 않으셨다. 병원 직원과 환자 모두 마음이 움직여 자발적으로 일하기를 바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1)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
선생님께서 지내셨던 낡은 사택은 평소 선생님을 존경하던 분들이 염출하여 지어 드린 집이었다. 내가 선생님과 처음 입주하던 날 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뒤늦게 달려온 간호사에게 ‘덕호군에게 먼저 주사를 놓아주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사제지간의 정을 넘어 내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당시 8‧15 해방 직후 얻은 간염으로 간이 부어 있었고, 당뇨병으로 입이 마르며 하루종일 수술하시고 잠자리에 누우실 때는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더욱이 심장의 전도부전(傳導不全)으로 심박이 멈추었다 다시 뛰곤 하여 사실 언제 심장이 정지할지 알 수 없는 몸이셨다. 젊은 나는 언제 닥칠지 모를 선생님의 임종을 지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방을 쓰면서 생활하였으나, 그 후 20년간 그 분은 계속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셨다. 선생님께서는 새벽부터 한두 건의 대수술을 마치신 후에도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면 거절하시는 일없이 잠자리에서도 깨어 꼭 보살펴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환자들은 ‘장 박사한테 보이기만 하고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할만큼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의사이셨다. 사심없이 불철주야 의사로서 최선의 정성을 쏟던 선생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자체였다.
2) 마음의 평화를 이루신 분
한 때 재단이사회를 따르는 의사들과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의사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소란을 피하여 친지 별장에 기거하고 계셨는데 하루는 어느 제자가 돈이 필요하실 것 같아 1백만 원을 들고 찾아갔으나 선생님은 단번에 거절하시면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평화라며 병원 갈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사건 후 제자들은 선생님 생애에 옥의 티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평생 속죄의 길을 찾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동족 전쟁으로 인한 형제간의 피흘림과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다. 나의 은사, 나의 또 한 분의 아버지이신 장기려 선생님은 평생을 청렴한 생활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검소하고 단순한 삶에 비해 이웃을 향한 사랑은 차고도 넘쳤다. 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람 고(故) 장기려 선생님의 정신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뿌리내리길 기원한다.
(2) 인생을 살면서 친구로 삼는 세 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세 친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들 중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귀하게는 여기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생에서 위기를 당했을 때 첫 번째 친구는 가장 먼저 도망가고 두번째 친구는 얼마간은 함께 있어 주나, 마지막까지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세 번째 친구만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친구의 이름은 재산입니다.
돈은 인생이 어려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만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 결국은 헤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 친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야 말로 이 세상 이후에도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4.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
레마르크가 쓴 소설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쟁의 잔인하고 냉엄한 실상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중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는데 주인공인 독일군이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굴러들어간 포탄 구덩이에 적군 한 명 역시 총탄을 피해 굴러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싸우다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힙니다. 적은 치명상을 입고 그렁그렁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습니다. 이런 적군을 보자 주인공은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수 시간을 그렁거리는데 마치 그 소리가 주인공의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군에게 물을 주고 오히려 편안하게 해줍니다. 적군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그 아내와 어린 딸의 사진을 보며 그가 자기와 동일한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그 적군의 이름을 알게 되자 마치 자기 가슴에 대못이 박혀 평생 자기를 괴롭힐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죽이려 할 때의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교차합니다. 자기의 생명과 이해관계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은 죽이고 외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순수한 측은지심의 마음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이 불쌍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의지로 하는 것이 눈으로 손으로 합니다. 예컨대 이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인간의 의지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을 때, 또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거나, 이 원수를 사랑하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넓은 범위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좁은 범위에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고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리를 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를 너는 물리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웃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에서 이해를 하니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세리도 하는 일이다. 형제에게 문안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나를 죽이고 비방하고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선대하라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는 예수님만 이런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이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원수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를 핍박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대적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파괴하는 최고의 방법은 원수를 친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2: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을 무조건 실천하면 그 결과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보다 큰 상급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특권을 확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십자가가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도 동전의 양면이라고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보는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하신 것은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사랑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다. 부활로 바라본 십자가! 그것은 사실로 일어난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진짜사랑을 받게 되며 나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사랑이 내안에 부음바 됨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속에 미움을 가져와 주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 하는 마귀가 있다. 마귀는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를 트집잡으며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런 생각을 집어넣고 미움을 집어넣어 원수 맺게 하려고 한다. 요한1서 4장 8절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이 하나님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죄와 허물로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사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던 그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받아 오늘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첫째도 감사, 둘째도 감사, 마지막도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되고 늘 사랑의 감격 속에, 감동 속에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고 주의 사랑이 넘쳐나게 되면 기쁨이 넘쳐나고 감사가 넘쳐나고 우리가 무슨 어려움을 당해도 믿음으로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으로 충만해서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11절은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이 세상 사람들은 그냥 이기주의적인 사랑을 합니다. 내가 열을 주면 열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사랑이 아닌 아가페 사랑입니다. 무조건 주고 또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야 이런 사랑의 모습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 주님의 섬김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될 때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한다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한다면 그는 이미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분노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살인하고 있는 것이므로 영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서로가 용서하지 못하면 피차 망하는 것입니다. 갈5:14에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만일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끼리 다투지 말고 미워하거나 살인죄를 져선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지금 코로나로 일도 못하고 그저 영세 소상인들의 하루하루 굶주리다시피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고, 힘드시죠” 이 말 100번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가져가 라면이라도 한 박스 가져가서 “아이고 같이 나눠 먹고 힘내요.” 하면 얼마나 마음이 푸근해지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행함이 따르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한 1서 3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을 지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주님이 응답해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먼저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 되어야 이 문제 많고 어려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인데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세파에 치인 사람들이고 억울하게 빼앗기고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의 한숨을 짓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비정규직으로 안정된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보이스피싱으로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입니다. 우리들의 눈은 항상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들의 소리를 외면하면 우리도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이름 붙여진 사람처럼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