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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은혜를 입은 마리아(눅1;26-38)
야베스목사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인이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낳은 여인, 예수님의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과 마리아를 묵상하면서 예수님마저 다른 여인들처럼 죄와 함께 살았거나, 이방인이거나 창녀이거나 외도하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에 예수님마저 이런 여인들 중에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요 랍비, 선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없으신 분이 죄인에게서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죄없는 여인이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도 다른 사람들처럼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골처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지닌 여인입니다.
오늘 그것을 찾으면서 마리아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아들을 누구의 가정을 통해서 보낼까 그 대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을 통하여 인류의 메시야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메시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고, 유다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을 고향으로 둔 여인이어야 합니다.
이사야7;14절에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미가서 5;2절에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근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예수님을 보낼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갈릴리 지방 촌 구석에서 순수하고 순박하고 세상의 떼묻지 않고 곱게 자란 마리아라는 처녀를 찾게 되었습니다.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되면 음란하고 패역한 일을 저지른 여인으로 판명이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됩니다.
그러니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곧 결혼해야 되는 여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를 낳아도 음란한 여인, 간음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고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편될 사람도 문제입니다.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가 자신과 잠자리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것을 좋아라 하겠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간음죄를 범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신랑되는 사람의 됨됨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 요셉과 결혼하기로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낸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아내될 사람이 임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간음을 행하고 음란한 여인이라고 떠벌리지 않고 조용하게 파혼하여 마리아의 곁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요셉이 떠나버리면 지금까지 계획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또 한 번의 홍역을 치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급히 가말리엘 천사장을 요셉에게 보냅니다.
요셉에게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장은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가르쳐 주면서 마리아가 임신이 된 것은 음란하게 간음하여 잉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천사장이 전해주는 말씀을 들은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잉태된 아이가 출산할 때까지 잘 보살피면서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으면서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이 과정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은 마리아의 자궁을 빌려서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은 여인입니다.
세상에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마리아 외에도 많았고, 베들레헴을 고향으로 둔 처녀들도 많았습니다. 더욱 순박하고 순수한 시골처녀들은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마리아의 태를 빌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선택하심에 의한 은혜이라 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사람들이 처녀들 아닙니까?
베들레헴을 고향으로 둔 처녀들이 한 둘이 아니라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12지파 중에 가장 왕성했던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멸망당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왕성한 지파는 유다지파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외에 수많은 처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처녀들 중에서 유독 마리아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 될 때도 그랬습니다.
거대한 나라인 페르시야에 전국 127도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왕비 되겠다고 수산궁으로 몰려든 여인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다른 여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만 왕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왕의 특별한 선택이요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머물면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아울러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조건에 대하여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성막을 책임지고 만들 사람까지 지목하여 주었습니다.
그 책임자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도와서 협력할 몇 명의 기능공들을 세워주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사람이 장정만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60만 명 중에 하나님은 단 두 사람을 선택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을 제작하기 위해서 특별히 선택받은 일꾼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을 자각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성막을 제작하고, 제사장들이 입는 성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자타부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토를 달 수 없습니다.
선택권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에 달려 있습니다.
베들레헴 출신의 많은 처녀들 중에서 하나님은 마리아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에 의하여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을 선택하여 우리 산성교회의 성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산성교회를 세우시고 산성교회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특별한 비젼과 소망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눈에는 마리아만 보이셨듯이 산성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비젼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불러서 산성교회의 성도이요 일꾼이 되게 하셨고, 오늘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교회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보면 산성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성장로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산성장로교회를 통하여 이루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우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택하시고는 가브리엘 천사장을 마리아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장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하면서 인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입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갑짝스럽게 별안간 천사장이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 함인고”하면서 놀라워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생전에 처음인데 어찌 나 같은 시골처녀에게 천사장이 찾아와서 이런 인사를 한단 말인가?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다시 마리아에게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하면서 거듭거듭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이라고 하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은혜는 누가 주는 것입니까?
은혜는 하나님이신 절대자가 인간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이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 의하여 진행되어져 갑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 요셉도, 유다도, 모세도, 아론도, 여호수아와 갈렙도, 다윗도, 솔로몬도, 신약성경의 12제자, 사도바울도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어져 갑니다.
오늘 마리아를 찾아오신 천사장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인사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을 하직하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녀양육도, 교회 성장도, 사명감당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헌금생활도, 주일성수도,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회봉사도, 화목하고 행복한 부부생활도, 직장생활도, 정치인들이 정치하는 것도, 스포츠인들이 월등하고 뛰어난 경기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예술인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연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더 욱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 시험을 잘 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폭적으로 폭포수처럼 받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소나기처럼, 때로는 이슬비처럼 때로는 태풍처럼 때로는 살살 불어오는 미풍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협력하면서 역사하시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장은 마리아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마리아에게 찾아온 천사장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자신은 아이를 임신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인이 임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임신이 되려면 선결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결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결혼 약속은 했지만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하면서 되물었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에 천사장은 좀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던 엘리사벳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미 임신 6개월이 되었다고 하면서 전적인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면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처녀인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너의 태를 사용하고 싶구나 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성장하여 곧 결혼할 과년한 딸이 있는데 별안간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서 “네 딸의 태를 사용해야 되겠구나”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곧 바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은애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곧 바로 순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많이 망설여질 것 같습니다.
쉽게 그렇겠습니다 하면서 순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입 서비스로 어떤 일이 있어도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함으로 마리아는 온갖 가족들과 이웃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의식해야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도 사람들이 수군수군 거리면 꼭 자신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세워집니다.
신경쇠약증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신경이 예민해지면 온 몸이 욱신욱신 아프고 저려옵니다.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뿐만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계속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마리아는 기꺼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면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의 순종은 위대한 순종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면서 하는 순종입니다.
자신의 미래도, 꿈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어쩌면 곧 결혼할 신랑까지도 벗어던져야 되는 순종입니다.
어쩌면 이 순종으로 인하여 자신이 꿈꾸어왔던 행복은 영원히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창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단을 만들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명령을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와 불을 챙기고 종과 아들을 데리고 떠납니다.
3일 길을 가야 되었습니다.
3일 동안 모리아 산으로 가면서 아브라함의 심적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아주 쉽게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려야 되는 입장인데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도 야속하고 제물로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고민과 갈등과 번민이 아브라함의 온 생각과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된다고 수없이 다짐하면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번제단을 쌓으면서도, 아들을 결박하면서도, 마지막 칼로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까지도 아브라함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하면서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삭을 드려야만 됩니다.
이삭을 드리는 길만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미 노쇠하여 기력이 떨어졌습니다.
이삭은 14-15세 정도 되었을 때이기 때문에 기운이 펄펄 나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삭이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왜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고작 한다는 것이 기껏 아들을 죽여 번제물로 드리는 것입니까? 난 죽지 않겠습니다.”하면서 모리아 산을 뛰어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부전자전이라고 이삭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갑니다.
아마도 이삭은 14-15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얼마나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했는지를 몸소 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지금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해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고야 마는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는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의 길을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말로 훈계한다고 해서 교육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을 통해서 친히 보여주는 삶이 진정한 자녀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신앙으로 올곧게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의 기준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나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가신 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입 서비스의 교육이 아니라 산 경험에서 울어 나오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길이지만 순종의 길을 갔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례로 다가오셨습니다.
수양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큰 축복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아무런 탈없이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순종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종이기에 마리아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순종, 이삭의 순종은 아주 값진 순종입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순종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순종으로 인하여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은 무사히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만민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4. 아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되는 애미의 고통을 껶은 여인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더불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그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본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서 먼 여행을 해야 되었습니다.
이미 마리아는 만삭이 되어 곧 출산할 기미가 보였습니다.
가까스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여관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마리아를 위해서 남겨놓은 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관 주인의 배려로 마굿간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예수님들 낳았는데 그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 왕이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대의 왕은 오직 자신만이 이스라엘의 왕인데 누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말인가 하면서 2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죽이라는 망동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급히 서둘러서 애굽으로 피신가야 되었습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본래 자신이 살던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잘 키우게 됩니다.
요셉은 목수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키웠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사이에 여러 명의 자녀들을 출산하면서도 유독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관심을 가지고 양육했습니다.
그렇게 양육하던 예수님께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고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됩니다.
아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의 고발로 인하여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합니다.
여러분, “The Pas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보셨겠지요.
그 영화에 이런 모습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에게서 피투성이 되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끌고 올라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 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울부짖는 모습을 봅니다.
비가 내리면서 온 골고다 언덕이 피로 물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만 묘사될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이 처절하게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울부짖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애미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고통스러우면 눈물이 말라버려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가슴으로만 우는 것입니다.
가슴으로만 땅을 치고 하늘을 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게 자식을 먼저 보내야 되는 애미의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모친으로 기록된 마리아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의 길을 갔던 여인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을 먼저 보내야 되는 크나 큰 고통을 감내한 여인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이 오늘 본문 37절에 있습니다.
다 같이 보겠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그 아들이 인류의 구세주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들, 영혼과 몸과 피와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내면서 십자가에 죽음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가는 길을 묵묵히 가슴으로만 울면서 지켜보고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지고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심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