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콜롬비아 대표팀이 훈련을 위해 사용한 수원월드컵경기장 원정팀 라커룸에서는 귀를 때리는 큰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1시간 30분 간 진행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콜롬비아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선수단 장비를 싣는 카트 위에 올라타고 버스로 향하는 팀의 간판인 하메스 로드리게스는 흥겹고 즐거운 콜롬비아 분위기의 하이라이트였다.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본선에 준하는 전술과 압박을 보여주겠다”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즐기겠다”라고 말했다. 평가전인만큼 라다멜 팔카오, 다비드 오스피나 등이 빠진 자리를 점검하고 경험을 쌓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당연히 상대인 한국에 대한 분석도 크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오직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평가전의 본질을 파악한 모습이었다.
같은 시간 한국 대표팀은 그라운드에 있었다. 하프라인 부근에 원을 그리면서 선 선수단은 신태용 감독의 이야기는 긴 시간 경청하고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중간중간 김남일, 차두리 코치가 분위기를 띄웠지만 웃음기는 적었다. 마치 월드컵 최종예선 하루 전날의 훈련 분위기 같았다.
신태용 감독은 “선수들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눈빛에서 읽었다”라고 말했다. 승패를 장담할 순 없지만 1달 전 유럽 원정 때처럼 쉽게 허물어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다. 주장 기성용도 “마지막 훈련까지 집중해서 내일 경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대표팀을 둘러싼 분위기를 바꾸는 건 우리의 몫이다”라고 다짐했다. 콜롬비아에겐 평가전인 이 경기가 한국에겐 실전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지었지만 지난 2달간 한국 축구의 정점에 있는 대표팀은 축하와 격려가 아닌 질타를 받았다. 최종예선 막판 2경기에서 결과보다 더 지탄받은 것은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의 경솔한 언행이었다. 10월 유럽 원정에서 반전을 꾀하려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모로코에 완패를 당했다. 경기력 부진까지 맞물리며 대표팀을 향한 여론은 역대 최악으로 흐르는 모습이다.
평가전이지만 신태용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상대 전술과 특장점에 대한 분석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변화다.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를 보유했지만 답답한 득점력, 콜롬비아보다 전력이 한 수 아래인 러시아와 모로코에 쉴 새 없이 털린 수비력. 무엇보다 한국 축구의 기질이라 할 수 있는 포기하지 않고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가 돌아와야 한다. 결과를 내지 못한 데 대한 변명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주는 변화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 버텨야 하는 수비라인, 바뀔까?
콜롬비아전에서 신태용호가 보여줘야 할 최우선 변화는 수비다. 역대 월드컵에서 한국이 경기를 주도한 적은 많지 않다. 2002 한일월드컵 때조차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을 상대로는 점유율의 우위보다는 수비 안정성을 기반으로 버티며 경기를 풀어갔다. 10월 유럽 원정에서 한국은 7실점을 했다. 2경기 모두 선제 실점을 허용하며 경기 운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실점 과정에서 상대의 기술이 빛나긴 했지만 우리 수비 스스로의 실수와 부족한 대응으로 무너진 게 대부분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은 최악의 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12월 1일 조추첨은 11월 FIFA 랭킹을 기준으로 포트를 구분하는데 한국은 포트4가 확실하다. 최소 2개의 FIFA랭킹 10위권 내외의 팀을 상대하게 된다. FIFA랭킹 13위인 콜롬비아가 그 레벨의 팀이다. 그들을 상대로 가동해야 할 것은 실리적인 전술이고, 그 기반은 상대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수비에 있다.
일단은 실수를 줄이는 것이 1번이다. 러시아전의 자책골, 모로코전의 전반 11분 만에 내준 2실점 등의 상황이 있어선 안 된다. 신태용 감독은 변형 Back3와 전형적인 Back4를 오가며 활용하겠다고 했지만 현재 대표팀 수비는 전형과 전술의 실패보다는 기본적인 플레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온다. 위치 선점, 상대에 대한 시선 두기와 대인마크, 협력 수비, 그리고 수비라인 위부터의 압박과 방해 모두 엉망이었다.
콜롬비아는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공격력을 지녔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임대를 간 하메스 로드리게스는 최근 폼이 살아났다. 왼발을 이용한 패스와 슛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유벤투스의 후안 콰드라도, 비야레알의 카를로스 바카까지 이 셋의 조합만으로도 한국 수비가 받게 될 위협은 대단하다. 브라질 월드컵 이후 한국이 이 정도 수준의 팀을 상대한 것은 지난해 6월 스페인전 뿐이었다. 당시 한국은 1-6 대패를 당했다.
■ 손흥민의 중앙 이동, 공격이 바뀔까?
공격력도 풀어야 할 과제다. 월드컵 본선행의 운명이 달렸던 최종예선 마지막 2연전에서 한국은 골이 없었다. 러시아전에서는 이미 승패가 한참 기울어 러시아의 수비가 느슨해 진 뒤에야 권경원, 지동원의 추격골이 나왔다. 모로코전에 나온 손흥민의 골은 페널티킥이었다. 공격은 최선의 수비다. 전방에서 우리 공격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때 상대도 부담을 느껴 공격 작업은 흔들린다. 추격골이 아닌, 선제골이나 실점 후 바로 쫓아갈 수 있는 동점골이 나와야 한다.
한국은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다. 손흥민의 결정력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역대 최고로 손 꼽힌다. 올 시즌 발동은 늦게 걸렸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여전히 골을 터트리며 기대를 채웠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손흥민은 지난 1년 간 페널티킥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지적을 두 갈래다. 손흥민을 지원하는 동료들의 레벨 문제, 그리고 토트넘과 달리 과감성, 움직임의 영역이 다른 손흥민 본인의 문제다.
손흥민 활용법이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점은 대부분이 공감한다. 키를 쥐고 있는 신태용 감독은 변화를 예고했다. 그 동안 대표팀에서의 손흥민은 주로 왼쪽 날개를 맡았다. 토트넘에서는 보다 중앙에 가깝다. 최근에는 투톱, 해리 캐인의 결장 시에는 아예 최전방을 보기도 한다. 신태용 감독은 “토트넘 경기를 통해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당장 효과가 날 거라 장담할 순 않지만 손흥민을 윙포워드가 아닌 스트라이커 역할로 옮긴다는 게 대표팀 공격 전술의 향후 방향이고 콜롬비아전이 그 시작이다.
■ 베테랑 복귀, 분위기와 태도가 바뀔까?
전술과 개인 기량 이상으로 대표팀에 쏟아지는 지적은 투지의 실종이다. 공격과 수비에서 우왕좌왕하고, 공 소유를 쉽게 내준 뒤 걸어가고, 상대의 저돌적인 플레이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각 나라의 축구에는 그 기질이 담겨 있다. 한국에게는 단연 상대 진이 빠질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다. 차범근, 홍명보, 박지성 등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은 그 기량만큼이나 정신적인 강함이 있었다.
반면 최근 대표팀 선수들의 플레이는 유니폼 뒤에 들어가 있는 투혼이라는 글자가 무색한 모습이 잇따르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해서 신태용 감독도 “너무 축구를 순하게 했다”라고 인정했다. 언젠가부터 점유율과 기술의 우위로 승리하려는 접근 방식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무기를 잃게 만들었다. 수비의 문제도 앞서서 펼치는 강한 압박과 몸싸움으로 끊을 수 있는 것으로 뒤로 넘겨주면 생긴 일이었다. 기술 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스페인에서 날아 온 토니 그란데 코치도 한국 축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 순진한 축구를 언급했다.
한국 축구 특유의 매운 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염기훈, 이근호, 최철순 등 베테랑의 복귀가 변화를 줄 것이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보다 절대적 기량이 낫다고 할 순 없다. 나이도 많다. 그러나 한발 더 뛰고 상대에 지지 않기 위해 덤비는 모습은 대표팀 전체의 자세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최종예선 2연전 당시에는 그런 기질이 살아나는 모습도 보였다.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달린 생사의 경기기도 했지만 이번에 합류하지 못한 이동국을 비롯한 베테랑들이 분위기를 바꾼 결과였다.
콜롬비아는 수준이 높은 상대다. 평가전을 적절히 활용하겠다는 여유도 있다. 경기력과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진 한국은 다시 한번 참패를 겪을 지 모른다. 그럴수록 모두가 보고 싶은 건, 신태용 감독의 말처럼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변화다. 대표팀을 바라보는 이들의 실망한 마음은 작은 태도의 변화에서 바뀔 수 있다.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 용기 있게, 물러서지 않고, 덤비는 축구를 하는 게 중요하다.
콜롬비아전이 끝난 뒤에는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이 왜 졌는지에 대한 변명이 아닌 다음 경기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변화를 말하길 기대하며 오늘 오후 8시 수원월드컵경기장을 주목해 본다.
글=서호정
사진=대한축구협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