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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예찬
디비드 르 브르통 David Le Breton. 1953 ~
[길 떠나는 문턱에서]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 맛]
• 걷기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루소에게 있어서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다. 젊은 시절의 토리노 여행을 추적하면서 루소는 걷기의 향수와 행복을 말한다. ‘나는 일생 동안 그 여행에 바친 칠 팔일 간만큼 일체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 추억은 그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산들과 도보여행에 대한 가장 생상한 맛을 내게 남겨놓았다.
스위스의 솔로투른에서 파리로 가면서 청년 루소는 중요한 것이라곤 오직 존재하는 것뿐인 이 완벽한 순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여행에는 보름이 걸렸는데 나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젊었고 건강했으며 돈도 충분히 있었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
여행의 단초에는 우선 어떤 꿈, 계획,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상상을 채찍질하는 그 어떤 이름들, 길이, 숲이, 사막이 부르는 소리, 일상에서 벗어나 몇 시간 혹은 몇 년 동안 슬쩍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혹은 어떤 지역을 답사하여 더 잘 알고 싶은 욕심, 서로 떨어져 있는 공간의 두 지점을 이어보고 싶은 욕망, 혹은 순수한 유랑의 선택, 세상에는 여행을 다녀옴 사람들의 이야기, 전하는 말, 앞뒤가 맞지 않는 무용담,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가보는 것이 더 좋다는 권유들이 얼마든지 있다. 세상의 아득한 저 끝에 대한 꿈은 언제나 사납고 매혹적인 법 그리하여 그 세상 끝에 이르러 허리 굽혀 들여다보면 바닥없는 심연이 보일 것 같고 몸을 일으켜 세우면 거대한 벽이; 가로막을 것만 같은 느낌은 바로 그 꿈에서 자양을 얻어 생겨난 무의식 속의 풍경이라고 하겠다.
• 첫걸음
바쇼는 계절과 나날들이 흘러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시간 그 자체가 쉴 줄 모르는 여행자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느 해 부터인가,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바다 기슭을 떠돌았는데 이윽고 지난해 가을에는 강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묵은 거미줄들을 쓸어버렸다. 이내 한 해의 끝이 되었고 또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여행벽의 신이 내 정신을 흔들고 길의 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지라 나는 찢어진 바지를 궤메고 모자 끈을 손보는 즉시 슬개골 밑에 쑥뜸을 붙이고서 벌써부터 마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속담에서는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첫걸음이라지만 그 첫걸음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그 첫걸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한동안 규칙적인 생활의 고즈넉함에서 뿌리가 뽑혀 예측할 길 없는 길과 날씨와 만남들과 그 어떤 다급한 의무에도 메이지 않는 시간표에 몸을 맡기게 된다.
• 시간의 왕국
걷기는 집의 반대다.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우연히 내딛는 발걸음이 인간을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 몸
• 짐
• 혼자서 아니면 여럿이?
혼자서 걷는 것은 명상, 자연스러움, 소요의 모색이다. 옆에 동반자가 있으면 이런 덕목들이 훼손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의사소통의 의무를 지게 된다. 침묵은 혼자 떨어져 있는 보행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 바탕이다. 루소는 자기만의 고독을 노무나 소중히 여긴다. 누가 내게 마차의 빈자리를 권하거나 길을 가던 사람이 내게 가까이 올 때면 나는 걸으면서 이룩해온 큰 재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아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스티븐슨은 ~~~도보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산책은 이름뿐인 산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ㅑ 오히려 피크닉에 속하는 것이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이쩍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걷기 챔피언 옆에서 뛰다시피 따라 걷거나 데이트하는 처녀와 함께 느릿느릿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보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빅토르 세갈렌은 ~~~둘이서 여행하게 되면 벌써 동일한 경험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자신의 어느 한 몫을 포기하게 되며 그리하여 목표에 다가갈 위험이 잇는 것이다. 이때 목표란 바로 세상에서 제일 친한 두 친구의 여행에서 얻은 결론, 즉 여행은 혼자서 라는 교훈 바로 그것이다.
소로는 처음부터 생각이 뚜렷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더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는 작별인 것이다.
스티븐슨은 ~~~방 안에 잇을 때는 나도 남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일단 밖에 나서면 자연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혼자일 적만큼 덜 외로울 때는 없는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동시에 말을 하는 것이 지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들판에 나가면 들처럼 식물이 되어 지내고 싶다. 그렇지만 특수한 곳으로의 보다 긴 여행의 경우라면 해즐리트도 동행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친구도 동반자도 없이 아라비아 사막을 가면 거의 숨이 막히는 기분이 될 것이다.
자크 란즈만은 ~~~떠날 때는 매번 친구들과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우너수들과 돌아온 것이다. 어떤 사람과 열흘 동안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와 십 년 동안 함께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을 걷다보면 그의 허물들뿐만 아니라 장점들까지도 퀵모션으로 행진하는 것이다. 나는 피곤도 실망도 다리를 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뒤쳐져서 못 따라 노는 것을 참지 못한다. 멈추어 서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못 참는다. 그들을 위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나를 위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노르망디 풍경 속을 걸어 다니는 필립 들레름의 태도는 그와 전혀 다르다. 길에 대한 그의 저서 초입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반려에게 경의를 표한다. 반려란 그의 글에 살을 붙여주는 사진작가인 그의 아내다. 십 년 동안이나 둘이서 한가로이 걷다니. 이건 또 다른 특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같이 길의 침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나는 휘걸겨 메모를 했고 그녀는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서로 교차한 두 시선으로부터 측대보(경마용어로 말의 같은 쪽 방향의 다리가 동시에 움직이는 현상)로 걷는 영상들과 말들이 생겨났다.
한편 퇴퍼는 단체여행의 있을 수 있는(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점들 중 한 가지인 연대의식을 강조하여 지적한다. 여럿이 여행할 경우에는 사람들 사이에 활기가 돌고 다양한 대화, 교감, 그리고 특히 공동체 정신, 소집단 정신, 다시 말해서 상호협조, 솜씨의 집합, 어린이, 약한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을 위하여 사전에 계획되거나 즉석에서 착안한 조직의 정신이 조성된다는 이점이 있다. 이야말로 자크 란즈만이 읽어보면 약이 될 말이다.
• 상처
랭보는 <어린시절>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나직한 난쟁이 숲을 지나 큰 길로 나선 보행자. 수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내 발소리를 덮는다. 나는 석양빛이 우울하게 세상을 황금빛으로 씻는 광경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는 열아홉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 벨기에로, 영국으로, 독일로, 그리고 또 다른 나라들로 헤매고 다닌다. 그는 고향 샤를르빌에서 밀라노까지의 머나먼 여정을 거의 다 걸어서 간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훗날에는 그 자유로운 가출과 보행이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방향으로 변하고 거기에 따르는 피곤으로 인하여 너무나 힘든 고역이 되고 만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베를린). ‘대단한 보행자’(말라르메) 랭보는 자신의 두 무릎을 파고드는 암이 아프리카의 하라르에서 너무나도 힘들게 걸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는다. 랭보 연구가인 알랭 보레르에 따르면 노새나 낙타들은 하라르에서 해안까지의 험한 코스를 일생 동안 딱 한 번 여행하면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짐승들은 길을 가다가 죽거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도축 당했다. 그만큼 힘든 행로였다. 랭보는 이 코스를 도보로 열다섯 번 이상, 그것도 최악의 조건 속에서 왕래했다. 한껏 보행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를 꿈꾸었던 그가 그의 시편들만 보고서는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발 들여놓았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걸어 다닌 끝에 한쪽 다리를 잃고 만다.
19세기에 캄차카 반도까지 도보로 여행하는 코크란은 ~~~잠자리에 들 때 촛불의 그을음을 알코올에 타서 그걸로 발을 문지르면 된다. 그러면 다음날 물집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 잠
• 침묵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고속도로변의 난간을 따라, 혹은 국도변을 따라 거닐면서 가공할 기분전환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걷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동차의 소음과 꽝꽝대는 카라니오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외출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외출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기 속에는 바람이 울리는 자명금 같은 미묘한 음악이 가득하다. 허공의 저 높은 곳을 덮고 있는 아득한 궁륭 밑에서는 선율이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울린다.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우리들의 귓가로 와서 스러지는 음악이다. 마치 대자연에도 어떤 성격이 있고 지능이 있다는 듯 소리 하나하나가 깊은 명상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 같다. 내 가슴은 나무들 속에서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에 전율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 있던 내가 돌연 그 소리들을 통해서 내 힘과 정진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소리들이 침묵의 한 가운데로 흐르지만 그 침묵의 배열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때로는 그 소리들이 침묵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어떤 장소의 청각적 질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어 준다. 침묵은 감각의 한 양식이며 개인을 사로잡는 어떤 감정이다.
세상의 여러 가지 희미한 소리들은 시간과 날과 계절에 따라 그 음조가 달라질 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장소들에서는 그래도 침묵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잇다. 돌 틈 사이로 길을 내며 흐르는 샘물소리, 한밤의 어둠을 가르는 올빼미 울음소리, 연못의 수면 위로 잉어가 펄쩍 뛰어오르는 소리, 발밑에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 햇빛을 받아 솔방울 터지는 소리는 침묵에 밀도를 부여한다.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이런 현상들 덕분에 그 장소에서 발산되는 고즈넉함의 감정이 더욱 구체화된다. 이와 같은 침묵의 창조는 어떤 결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침묵 속에는 이 세계의 정경을 가리는 그 어떤 잡음도 없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말한다. 우리들의 영혼은 침묵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하여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무는 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 노래 부르기
많은 보행자들이 좀 적적하거나 안심이 될 때면 뜨내기들이 부르는 옛 노래나 기억나는 유행가를 부른다. F. 어베이는 전부터 늘 가보고 싶어 했던 어떤 장소에 고생스럽게 다다르자 소리 높여 기쁨의 찬가를 부른다. ~~~~어떤 풍경이나 나무들이나 암소 떼들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회적 행위다..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기리는 일이며 동시에 그곳에 존재함을 기리는 일이다. 옛날의 순례자들은 혼자, 혹은 무리를 지어서 콤포스텔라나 로마를 향해 가는 길에서 자기들 고향의 발라드나 성가를 부르면서 서로를 정신적으로 격려하고 타향의 외로움을 달랬다. 노래는 보행의 도반이요 마음의 균형추다. 뜨내기는 주제넘은 남의 시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함께, 관습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체면이나 난처한 평판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므로 한껏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편다. 낮 모르는 사람,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항상 점잖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붙박이의 중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따로 떨어져서 걷다보면 문득 갑작스런 생각에도 사로잡히고 경박하고 엉뚱한 짓도 하게 된다. 혼자뿐인 보행자는 오솔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심한 나머지 좀 외설스런 유행가를 큰 소리로 불러재끼며 익살을 부리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항상 또 다른 고독한 산책자나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와 마주쳐서 아주 바보 같은 꼴이 될 위험이 따른다.
• 움직이지 않고 오래 걷기
•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다
보행은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이므로 겸손과 순간의 철저한 파악을 요구한다.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 서서 걸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 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보행자는 걷는 동안 흔히 자기가 걸어서 지나가는 장소에 대하여 일련의 조사를 계속한다. 그는 아마추어 인류학자처럼 정원 가꾸기, 창문 치장, 집의 건축 방식, 요리, 손님을 맞는 주민들의 태도, 말씨 심지어 지방마다 다른 개들의 행동 등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동물, 식물, 나무의 존재를 말해주는 징후를 찾아 온갖 지표들의 숲속을 답사하듯이 수풀 속을 전진한다. 줄리앙 그라크 같은 작가는 삼림에 대한 예리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자신의 발 앞에 솔방울 한 개가 떨어지는 의미도 놓치지 않는다. ~~~물이 오른 솔방울은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 마른 솔방울이 떨어질 때는 그런 무거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보행은 가엾은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제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 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 니체는 <환희의 지혜>의 한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잘라 말한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들판을 건너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당당히 해낸다. <차라투스트라>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극단의 육체적 탄력과 충만.
• 이름
이 세계의 한 토막 한 토막이 다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생울타리 쳐진 이름 없는 빈 터도 있고 무명의 밭도 있고 아무도 이름을 붙여줄 생각을 해보지 않은 들이나 골짜기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운명적으로 세상의 무한하게 많은 지명들 중에서 겨우 몇 가지를 아는 것이 고작인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마땅한 사람, 즉 우리가 알고 싶은 이름을 잘 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타관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이며 장소의 이름을 묻는 사람이다. 길 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장소들 속에서 어디가 어디인지를 분간하는 일. 지도나 풍경들의 색깔과 산들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 위치를 헤아리는 일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눈대중의 척도에 따라 계산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지를 예측하는 일이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보여행자는 아직 어느 것 하나 그 정확한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삶의 차원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차원 속에서 그가 더듬어가는 장소들은 한 결 같이 미지의 장소들이며 마치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것만 같은 장소들이다. 이름은 공간의 세계 내적 자리매김이며 개인적 지리학의 고안 혹은 육체의 척도에 적용한 지리학이다. 길을 걷는 사람이 지금 자신이 와 있는 나라나 지방의 이름을 몰라 남에게 물어볼 정도로 부주의한 경우란 거의 없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길을 가면서 차례로 만나게 되거나 눈앞에 나타나는 국지적 장소들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이름들이 꿈속에서 본 이국적 꽃이 되고 그 이름을 들으면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여행은 수많은 이름들 속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 세계라는 극장
여행자는 끊임없이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누구인가? 이처럼 인간 조건을 에워싼 질문들이 그것이다. ~~~~갑자기 누가 사라지거나 아프거나 죽거나 하는 경우는 예외에 속하겠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근원적인 문제들은 항상 잊혀져 있는 법이다. 그러나 매순간 최소한의 의문들에 절박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보행자의 경우는 다르다.
• 물, 불, 공기, 땅, 그 원소들의 세계
풍경과의 관계는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기 전에 어떤 정서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장소가 자아내는 느낌들의 갈피갈피는 거기에 접근하는 사람과 그때의 기분과 심리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저마다의 공간에는 무수한 의미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풍경이나 어떤 도시에 대한 관찰과 탐색과 음미가 완전히 다 끝나는 법은 없다.
걷기는 원초적인 것, 원소적인 것과의 접촉이다. 걷기는 대지와의 만남이다. 걷기가 대자연 속에서 사회적인 특징을 갖춘 어떤 차원(길, 오솔길, 여인숙, 방향표지판 등)을 동원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공간 속으로의 침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공간은 사회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리, 천문기상, 환경, 물리, 음식 문화 등과 관련된 공간이다.
몸은 점점 고단해지고 땀은 비 오듯 하는데 문득 수풀이 무성한 지역 한구석에 그렇게도 오랫동안 고대했던 시냇물이 불쑥 나타나고 여기저기에 작은 폭포들이 쏟아진다. ~~~~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숲속이나 들판을 걷게 되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민주적인 것이어서 만인에게 주어진다. 지극히 아름다운 곳들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 같은 날, 같은 산책에서 경이로운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나타나서 어떤 배경, 분위기, 풍경, 소리, 얼굴을 남긴다.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 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거리낌 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오솔길은 물론이지만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놓은 어떤 연대감의 자취 같은 것이다. 그리로 지나가는 행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지극히 작은 서명이 그기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찍혀 있다.
흙길이나 오솔길에는 삶의 밀도가 매어 있다. 그런 길들에는 사람 발자국, 말이나 암소의 발자국, 혹은 비 온 뒤의 물웅덩이, 군데군데 덮인 눈 , 웃자란 잡초, 쐐기풀 같은 어떤 구체적인 인간성 혹은 동물성이 압축되어 있다.
• 동물들
로베르 랄롱드는 퀘벡에 있는 숲 속을 걸으면서 한 세계가 통째로 그의 눈앞에 열리는 것을 본다.~~~~나는 뇌조와 흰머리독수리를 보았고 가슴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우는 이상한 물수리를 보았다. 길들지 않은 야만인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우리들의 발소리에 놀라 선연한 발굽 자국을 남기고 달아나는 고라니를 보았다. 나는 머리 위 높은 곳에 서려 있는 전나무 냄재, 바위틈의 용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젖은 모래에서는 얼마 전에 내린 비 때문에 아직 가시지 않은 하늘과 천둥과 신선한 골풀 냄새가 풍겼다.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게 짓눌려 죽은 짐승들의 공동묘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장 클로드 부를레스는 여러 해 전부터 콤포스텔라의 길을 누비고 다녔는데 공교롭게도 길을 물어보려고 어떤 농가에 들어갔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농가의 문턱을 막 넘어서는데 독일산 양치기 개 두 마리가 미친 듯이 짖어대며 털을 세워가지고 금방이라도 물듯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사납게 대드는지 나는 죽는 줄 알았다. 너무나도 무서워서 꼼짝도 하지 못했는데 그게 나를 구했다. 짚고 있던 지팡이 때문에 그들은 저만큼 발을 멈추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 사회를 비껴가는 길
• 산책
• 글로 쓰는 여행
여행은 어떤 것이나 다 담화요 이야기다. 그 중 하나는 여행 중 귾임 없이 상상 속에서 떠올리는 앞쪽 담화 혹은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여행이 끝난 다음인 나중에, 지나다가 마주친 사람들, 집에 돌아와 만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뒤똑 담화 혹은 이야기다. 글쓰기는 길을 가는 동안 수집한 수많은 사건들의 기억, 숱한 감동들, 그리고 느낀 인상들이다. 그것은 여행자가 시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그 시간을 공책의 페이지들로 탈바꿈시켜가지고 나중에 향수로 젖으며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보는 방식, 텍스트 여기저기에 점철된 수천수만 가지의 표적들 덕분으로 그 시간을 추체험하는 한 방식이다. 기억이란 그것대로 한계를 가진 것이기에 우리가 걷는 동안 경험한 것들 중에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들의 전체는 우리들 앞에 보잘 것 없는 몇 토막이 남았을 뿐인 기록의 합에 비긴다면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은 것이다. 길을 가면서 일기를 쓰게 되면 그때의 우여곡절들을 규칙적으로 기록하고 또 더듬어온 길들을 회상해보거나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상기해보기 위한 독서에 바쳤던 노력 덕분에 그 도보여행은 그만큼 더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상상이 실제 경험과 뒤섞이고 간결하게 기록한 몇몇 문장들에서는 실제로 표현된 것 이상의 암시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글 속에는 여행으로부터 축적된 수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은 도보 여행을 했을 경우, 그 여행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억의 노력은 몇 가지 잊지 못한 우여곡절들을 제외하고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루소는 고백론을 집필하면서 그에게 도보여행은 끝없는 행복의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에 느꼈던 인상들을 기록해두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한다고 적고 잇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삶의 소소한 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것은 여행일기를 적어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찬차키스는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거의 변한 것이 없는 필체로 휘갈겨 쓴 학생 노트들을 문득 발견하게 됨으로써 각 개인에 관계된 경험을 그의 회고록에서 고스란히 되살려낼 수 있었다. 옛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기억의 세계 속으로 불현듯 다시 빠져 들어가면 문장 하나하나마다에서 그때의 미세한 감각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놀하게 바랜 여행수첩을 뒤적여본다.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죽어 없어진 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w마들어 있었다. 이제 이렇게 그 모든 것이 깨어나서 반쯤 지워진 해묵은 페이지들로부터 솟아올라 다시 수도원이 되고 수도사가 되고 그림들과 바다가 되다니! 그리하여 나의 친구도 그때의 아름답던 모습 그대로, 꽃다운 청춘의 모습 그대로 독수리 같은 푸른 눈으로 시가 가득한 가슴으로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땅속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퇴퍼는 늙어가면서 건강상의 문제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친구들, 제자들과 발끝 닿는 대로 자유롭게 하던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붓에 의지하여 중이 위로 전진하는 글쓰기의 여행이 길 위의 여행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여행자의 지팡이를 손에서 내려놓고 나서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수비사리 그 지팡이를 다시 잡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슬픈 마음으로 예감한다. 바로 그러한 예감 속에서, 그는 산악탐험 시절에 자신이 밟아 갔던 길로 들어서고 싶어질 훗날의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추억과 경험의 이야기를 이 기록 속에 담아두고자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걷기의 이야기들은 여행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한 장을 이룬다. 지금 이 글 속에서 나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저자들이 실제로 그 점을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로테르담으로 떠나기 위하여 영불 해엽을 건너는 배에 오르는 즉시 P,리 퍼모는 살롱에 자리를 잡고 여행일기를 꺼내어 그 첫줄을 쓰기 시작한다. 세례의 순간인 진정한 출발은 그런 텍스트의 첫줄에서 시작된다. 불행하게도 그는 나중에 일기를 뮌헨의 어느 여인숙에서 배낭과 돈과 함께 도둑맞고 만다. 그러나 P. 리 퍼모는 실망하지 않고 곧 다른 노트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실 글을 쓰기 위해서 걷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감미로운 환상에 빠져들기 위하여, 추억과 계획을 쌓기 위하여 걷는 것이다.
• 걸을 수 있는 세계는 줄어들고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사라지고 오직 자동차들만 씽씽 달리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걷는 것이 장소를 이동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걷는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 사회의 특징인 육체의 기술적 무력화에 대한 저항의 한 고의적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어떤 사람들은 연장통이나 보기에도 한심한 마분지 상자를 메고 다녔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저 평소에 입던 옷 쪼가리를 등에 걸친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날의 걷는 가람들은 전과 같지 않다. 원칙적으로 길에는 걷는 사람이 없고 오직 자동차들만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다. 길의 문화는 달라져서 여가로 변했다. 비록 오늘날까지도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거주할 곳이 없는 유랑자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지만.
[지평을 걷는 사람들]
• 카베사 데 바카
카베사 데 바카는 1527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플로리다를 향해서 먼 길을 떠난다.
• 스마라의 길
1929년 9월, 미셸 비외샹주(Michel Vieuchange) 형제는 사막과 위험의 한복판에 버림받은 신화적 도시 스마라에 접근하는 최초의 유럽인이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미셸 비외샹주는 캐러번 속에 섞여 길을 떠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면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여자로 변장한다. 그는 카이예에 뒤이어 마찬가지의 피곤, 질병, 말라리아, 추위와 더위의 급격한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 멸시, 배신, 모욕의 끝없는 형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의 동생 장은 멀리서 여행자의 운명을 보살핀다. 두 달 동안 대부분 걸어서, 때로는 낙타를 타고, 적대적인 부족들 지역을 거쳐간 1,400킬로미터에 걸쳐서 그것은 고통의 대횡단이다. 그들 두 사람의 비용을 지불한 안내인들은 비밀에 부쳐졌다. 도보여행의 처음부터 비외샹주는 비밀리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데 그것은 그의 사후에 발표된다. 거기서 그는 부어오른 발과 몸에 입은 찰과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지만 스마라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시련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를 강조한다. 고통은 그의 탐험대의 성공을 위하여 자청한 희생인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캐러밴에서 길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다리가 부러진 한 사내를 발견한다. 그는 십여 일 전부터 거기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더욱 험해지는 데 직사고아선 아래서 마실 물도 별로 없이 이제부터는 전쟁 때문에 낙타도 타지 못한 채 걸어서 하루에 40~50킬로미터를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비외샹주는 필요하다면 이런 식으로 열흘이라도 더 걸을 태세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마라가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잠을 이룰 수 없는데 그의 몸에는 이가 끓는다. 어느 날 밤에 그는 무려 이백 마리나 되는 이를 잡는다. 캐러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특 하면 전투가 벌어져 희생자를 낸다. 자신들의 힘을 내세워 까다롭게 구는 안내인들과 흥정을 해야 하는 일이 점점 잦아져 비외샹주는 이만저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토록 고생을 하고 나서 스마라에 이르지 못할까봐 겁이 난다.
그는 쌍안경과 가방을 도둑맞는다. 사사건건 몸값을 강요받는다. 그는 목적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경 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도 더 많은 시련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는 최악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고 일기에 쓰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비외샹주는 스마라를 생각하면서 강렬한 행복의 순간들을 경험한다. 내가 마침내 그 속에 있음을 마음속으로 느낀다는 것은 내게 얼마나 큰 행복, 얼마나 큰 힘을 주는가. 고통, 허리가 휘는 피곤, 태양 갈증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희열로 터질 것만 같다.
때로 인근의 부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오랫동안 커다란 광주리 속에 들어가 지낸다. 여러 시간 동안 몸에 상처를 입은 채 구역질을 참으며 엎드려 있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피폐가 장기간 지속되다보니 결국은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스마라라는 이름이 내게도 메마른 것으로 변해버린다. 나 자신이 송두리째 바싹 말라버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자나깨나 오직 한 가지뿐인 의지, 즉 끝을 봐야지. 목표를 달성해야지 하는 일념 쪽으로만 머릿속의 생각이 조여들 뿐이다.
1930년 만성절 다음날 그는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도시 스마라에 도착한다. 그는 톰북투에 처음 발 디뎠던 카이예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서는 예상했던 열광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마라는 몇 채 안 되는 집들- 거의 모두가 공공건물로 회교사원 하나, 성채 둘-이 고작인 죽은 도시다. 오아시스는 반 이상, 그러니까 사분의 삼쯤이 파괴된 상태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다시 음미해보면서 그 퇴락한 회교사원 안으로 들어갔던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억한다. ‘지난날에는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던 그곳을 지금은 그저 한번 둘러보려는 것뿐인 사람의 입장에서 거닐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문득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참고:Smara, Carnets de route. p205)
그는 동행했던 사람들이 재촉하는 바람에 그 죽은 도시에 겨우 세 시간을 머물고 나서 또다시 큰 광주리 안에 몸이 묶인 신세가 되어 온갖 학대를 다 받는다. 그는 귀로를 꿈꾼다. ‘새로워진 우리들의 생활, 아니 어쩌면 멋들어진 길 위로 대담하게 떠밀려 나온 생활 - 그게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다-에서 발생하는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그 기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미셸 비외샹주는 동생 장을 다시 만나고 나서 불과 몇 시간 뒤에 이질로 사망했다.
[도시에서 걷기]
• 도시의 몸
길을 걷는 사람이 자신의 도시, 혹은 가로나 동네와 맺게 되는 관계는 무엇보다 먼저 어떤 정서적 관계인 동시에 신체적 경험이다. 그가 그 도시를 익히 잘 알고 잇는 경우든 한발 한발 내딛는 가운데 도시의 길을 차츰 발견해 나가는 경우든 마찬가지다. 도시는 청각적 시각적 배경이 되어 소요하고 있는 사람을 동반해준다. 매시간 그의 피부는 변화무쌍한 외계의 기온을 감지 기록하여 물체나 공간과의 접촉에 반응한다.
• 걷기의 리듬
• 듣기
프루스트의 <갇힌 여자> 나 쥘 로맹의 <선의의 사람들>에는 하루의 시간 시간마다 수없이 많은 장사꾼들이 독특한 소리로 외치고 다니면서 도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도시의 길에서 그런 소리들을 들을 일은 없어졌다. ~~~소음은 부정적인 값을 지닌 소리요 침묵이나 보다 낮은 음향에 대한 공격이다. 소음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느낌을 구속하는 공격이다. 소음은 고통이다. 소음은 공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 견디기 어려운 간섭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진정한 의사소통을 왜곡시키는 동시에 불안과 초조를 야기하는 기생적 정보들을 생산한다.
• 보기
시각은 도시의 사회성을 경험하게 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감각이다. 행인은 쉴 사이 없이 도시가 보여주는 온갖 스펙터클(상점의 진열장, 광고, 교통기관의 끊임없는 왕래, 보행자, 사소한 사건들 등등)의 유혹과 자극을 받는다. G.짐멜은 20세기 초에 그 사실을 예감하고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도시에 있어서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는 소도시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청각보다 시각이 훨씬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소도시의 경우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늘 서로 한두 마디씩 건네고 지내는 아는 사람이어서 얼굴만 보아도 그 인격 전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공적인 의사소통 수단 때문이다.
도시는 무수한 얼굴들의 숲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산책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에서 타자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와 동시에 그들의 시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서로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가시성은 행로의 막힘 없는 흐름을 보장하고 행인들이 원칙적으로 부딪치거나 떠밀리는 일이 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 느끼기
걷는다는 것은 더위와 추위를, 바람과 비를 만난다는 것이다. ~~~한순간 비는 하늘과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물과 도시를 어떤 우주론 속에 하나로 합쳐서 거리에서 인간들을 쫓아버리고 w마시 동안 신들이 그 공간 전체를 장악하게 한다.
• 냄새맡기
[걷기의 정신성]
• 정신적 순회
성서에 나오는 백성들은 가장 전형적인 순례자들이다. 아브람은 히브리 사람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야영에 야영을 거듭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간다. 아브람과 그 자손들은 가나안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 기록된 긴 장정의 첫 번째 에피소드다. 수백 년이 지난 뒤,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 고작이었던 이집트를 탈출한다. 모세의 보호아래 사막 속 20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데 무려 사십 년,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거하고 바빌론에 유대인들을 추방한 이후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순례는 하나의 의무가 된다. 특히 홍해를 건너 시나이에서 율법의 판(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리는 부활절 때와 일주일 동안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축제인 장막절 때가 그러하다. 열다섯 장에 달하는 시편(119장에서 133장까지: 이는 모두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노래들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자꾸만 높이 올라가야 하니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스러운 도시를 향하여 걸어가는 기쁨을 나타내는 순례자들의 찬가였다.
중세나 르네상스시대의 순례자는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는 가운데 길을 걷는다. 그는 성스러운 장소에 이르러 마음을 가다듬고 죄를 뉘우치고자 한다. 그는 어두운 밤에 발길을 멈추고 쉬거나 깊은 숲을 통과할 때면 혹시나 무슨 함정에 걸려들거나 혼을 빼가는 마귀의 제물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 마음 졸이면서도 신의 가호를 굳게 믿으면서 창조한 세상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자 한다.
• 신들과 함께 걷다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순례가 있고 먼 길을 걸어 다니는 승려들이 있다. 고빈다는 어느 날 그보다 앞서 떠난 스승을 만나기 위하여 대상들과 함께 티베트 쪽으로 향한다. 여행은 꿈속 같았다. 비, 안개, 구름 때문에 처녀림과 바위와 산과 고개와 절벽들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몽환적인 형상들이 어찌나 빨리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지 도무지 현실세계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히말라야 산맥 속에서의 느린 걸음은 서로 다른 식물군과 기후의 층계참들을 거쳐 구름에서 구름으로 기어오르는 길이었다. 티베트로 가는 고갯마루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자 고빈다는 전통에 따라 돌탑의 주위를 여러 번 돈다. 이곳에 이른 저마다의 순례자가 아무 탈 없이 도착하게 된 것을 산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돌 하나씩을 얹어 쌓은 탑이다. 그도 자신의 불굴의 각오를 다지고 또 같은 길을 걸어온 다른 모든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보내기 위하여 자신의 돌 하나를 보탠다. 이때 그는 아직 떠도는 승려 시절의 불타가 하신 말씀을 생각한다. ‘나는 고독하게 수 천리 흰 구름의 길을 가노라.’
• 거듭나기로서의 걷기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가지고 가는 짐은 얼마 안 되는 옷가지, 그릇,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땔감, 방향을 가늠하는 도구, 양식, 혹은 무기, 그리고 물론 약간의 책 등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상의 군더더기는 괴로움과 땀과 짜증을 가져올 뿐이다.
걷는 것은 헐벗음의 훈련이다. 걷기는 인간을 세계와 정대면하게 만든다. 소로는 sauntering산책이라는 말의 어원을 근거로 걷는 기술은 상징적으로 성스러운 땅에 도달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길의 자력에 발을 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강물이 구불구불 흘러가긴 하지만 그렇게 흐르는 동안 줄곧 고집스럽게 바다로 가는 가장 짧은 지름길을 찾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 가게 한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외면의 지리학이 내면의 지리학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평범한 사회적 계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길을 걷다보면 세계가 거침없이 그 속살을 열어 보이고 황홀한 빛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는 어떤 개인적인 변신의 문턱 같은 것이다. 인간의 발걸음과 키 높이에서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그는 소용돌이치는 사건들 속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삶과 마찬가지로 도보여행도 예측할 수 있는 일들보다는 더 많은 불가해한 일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면 길 위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의 자초지종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나는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며 기어오르고 미끄러지고 또 기어오르다보니 숨이 턱 끝에 찬다. 짐승처럼 기진맥진한 상태. 한편 저 위에는 얼어붙은 바위를 붉게 물들이고 단단한 하늘을 하얀빛으로 번뜩이게 하는 석양 속에 기도의 깃발들이 펄럭거린다. 깃발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은 하얀 설벽에서 춤을 춘다. 이윽고 나는 마지막의 드높은 고개에서 다시 햇빛을 받는다. 서늘한 바람에 머릿속을 식히려고 나는 털모자를 벗는다. 나는 기쁨에 넘치면서도 피곤해 죽을 지경이 되어 두 세계 사이의 좁은 모서리 위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Edward Abbey, Desert solitairer. 고독한 사막)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걷는 것은 죽음, 행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 일으킨다. ‘길을 나타내는 선은 단순히 물질적 질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표지들을 갖추고 있는 범이다. 그 표지들이 없다면 길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냥 길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수많은 개인적 추억들, 혹은 유형학적이고 감정적인 친근감 같은 것들이 길을 만든다.’(Pierre Sansot. Variations Paysageres.풍경의 변주)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나는 처음으로 쓴 책에서 브라질의 북동부지역의 길들로 비탄에 잠긴 한 남자가 오랫동안 걸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지어낸 이야기와 개인적인 경험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는 매우 흐릴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오래 길을 걷는 동안 맛보는 극도의 피로와 자기 상실의 느낌은 이미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거칠음과 정다움에 대한 첫 번째 학습이었다. 어두운 밤을 육체로 관통해가야 자아를 잉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걷기는 세계의 자명함을 되찾게 해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흔히 자아의 변두리에 내던져졌다가 중력 중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걷는다. 한발 한발 거쳐 가는 길은 절망과 권태를 불러일으키는 미로이기 쉽지만 지극히 내면적인 그 출구는 흔히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련을 극복했다는 느낌 혹은 희열과 재회하는 순간이다. 수많은 발걸음들에 점철되어 있는 고통은 세계와의 느린 화해로 가는 과정이다. 걷는 사람은 낭패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 한 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온몸이 피로에 취하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저곳으로 간다는 보잘것없지만 명백한 목표를 간직한 채 그는 여전히 세계와의 관계를 통제. 조절하고 있다. 물론 그는 방향감각을 잃기도 하지만 아직은 알지 못할 어떤 해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걷기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 불행을 기회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을 바꾼다는 연원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
정신적 시련의 통과는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 속에서 효과적인 해독제를 발견한다. 인간의 중력중심을 바꾸어 놓는 해독제를 다른 리듬 속에 몸담고 시간, 공간,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체는 체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그 가치를 상대적 시각에서 저울질하게 되고 스스로의 자력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다.
• 여행의 끝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그 지구를 태연한 마음으로 한 바퀴 돌고 나면 우리는 어느 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여행의 준비를 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길들, 마을들, 도시들, 산과 숲들, 바다와 사막들이 있는 한 그곳에 이르고 그곳을 느끼고 그곳에 도달한 기쁨 속에서 우리의 기억을 껴안기 위한 그토록 많은 코스들이 또한 열려 있는 것이다. 오솔길, 땅, 모래, 바닷가, 심지어 진흙탕이나 바위까지도 우리의 몸과 어울리고 존재한다는 희열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
[Review]
요즘은 남녀노소 누구나 손목시계 형태의 ‘건강시계‘ 가 유행이다. 시간뿐 아니라 자신의 다양한 신체 정보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 집 안에 있을 때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하루 만 보 이상 걸어야만 한다지만 사실 일상에서 만 보 걷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반더포겔(Wandervogel)은 철새라는 뜻으로 20세기 초 독일에서 이루어지던 청소년들의 집단 도보 운동 또는 그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다. 철새처럼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다지는 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낯선 지방을 순회하면서 견문과 체험을 쌓아, 인간적인 성장을 꾀하려 했던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에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무전여행’이라는 문화가 유행했다. 당시에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군용 배낭 장비를 갖추고 최소한의 경비로 먼 지방을 다녀오는 도보여행이다. 그 후 교통망이 좋아지고 또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이 문화는 사라졌다. 최근에 도보 문화가 부활하면서 둘레길이 생겨나고, 해안을 따라 해파랑길, 남파랑 길, 서해랑길을 다녀온 사람들이 여행 기록을 남기며 확산하여 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여행을 떠난다. 그중에서도 도보 여행은 그냥 육체적 운동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어떤 본질에 화답하려는 갈망에서 선호한다. 권태로운 현실 세계의 속박을 떨쳐낸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도보여행은 인생의 경험이 쌓인 중년에 어울린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본문)
그러기 위해서 도보 여행은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닌, 여행의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 속에서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내면의 갈급한 본질에 화답하는 사유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스치는 미풍에도 화답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본문). 쿤츠는 <상상의 인간학적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도심의 고풍스러운 공원에서 2월 초에 들려오는 올빼미 소리, 곡식 익어가는 들판에 여름이 내려앉을 때 한밤중이나 한낮에 들려오는 메추라기 울음소리, 밤거리에서 찾아드는 노랫소리, 이러한 ..... 사건들은 ..... 아련한 먼 곳에 감싸여 형언하기 힘든 마력을 풍긴다.'
또한 여행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한다. 기록은 어떤 의미에서 감각의 창조물이다. 감각은 언제나 구름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다른 형상으로 바뀌기 때문에 여행에서 본 것들을 그때그때 기록해 두는 일은 중요하다.
“루소는 고백론을 집필하면서 그에게 도보여행은 끝없는 행복의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에 느꼈던 인상들을 기록해두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한다고 적고 있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삶의 소소한 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것은 여행일기를 적어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문)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이자 사회학자이며, 파리 낭테르 대학교와 스트라스부르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2022년 은퇴 후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에는 도보 여행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하다. 도보여행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배낭 속에 이 책 한 권쯤은 넣고 가기에 좋은 책이다.■
(본문)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세상의 아득한 저 끝에 대한 꿈은 언제나 사납고 매혹적인 법 그리하여 그 세상 끝에 이르러 허리 굽혀 들여다보면 바닥없는 심연이 보일 것 같고 몸을 일으켜 세우면 거대한 벽이; 가로막을 것만 같은 느낌은 바로 그 꿈에서 자양을 얻어 생겨난 무의식 속의 풍경이라고 하겠다.”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 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거리낌 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어느 해 부터인가,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바쇼) 바다 기슭을 떠돌았는데 이윽고 지난해 가을에는 강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묵은 거미줄들을 쓸어버렸다. 이내 한 해의 끝이 되었고 또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여행벽의 신이 내 정신을 흔들고 길의 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지라 나는 찢어진 바지를 궤메고 모자 끈을 손보는 즉시 슬개골 밑에 쑥뜸을 붙이고서 벌써부터 마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 서서 걸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 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 서서 걸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 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걷기는 세계의 자명함을 되찾게 해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흔히 자아의 변두리에 내던져졌다가 중력 중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걷는다. 한발 한발 거쳐 가는 길은 절망과 권태를 불러일으키는 미로이기 쉽지만 지극히 내면적인 그 출구는 흔히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련을 극복했다는 느낌 혹은 희열과 재회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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