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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여호와의 시간이 채워졌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때부터 성민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해 놓으셨던 은혜를 값없이, 일방적으로 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고난과 억압과 고통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이나 이어진 광야 생활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의 패권을 행사하던 강력한 두 왕 시혼과 옥도 손쉽게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넘쳐흐르고 있었던 요단강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던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부족들은 정복하려는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성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전쟁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그것도 국지전 한번 벌이지 않고, 너무나 쉽게 무너뜨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만 해주신다면 제아무리 강력한 대적이라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의 앞을 영원히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한동안 아니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이 채워질 때까지는 힘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차면 반드시, 무조건, 필연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순간순간 수없이 많은 갈등과 번민이 밀려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니까 그렇게 쉽게 하지,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 하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의 무수히 많은 각오와 결단과 희생과 헌신은 물론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을 칠지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일방적으로, 선물로 부어주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입니다. 난공불락이라는 여리고 성까지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거침이 없었습니다. 서쪽으로의 진군을 계속했습니다.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아이 성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아이를 살피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거만했습니다. 꺼드럭거렸습니다. 몹시 우쭐거렸습니다.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올라갈 필요 없이 이삼천 명 정도만 보내도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고 마치 외치듯 보고했습니다. 그만큼 자신만만했습니다. 참고로, 아이 성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아이 성은 최소 천 명에서 최대 만 이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천 명 정도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삼천 명의 군사들을 따로 떼어주며 아이 성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쉬운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전술적으로 볼 때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결과는 예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그동안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가던 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값없이 허락해 주신 승리에 도취 되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었던 그들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원래부터 새가슴이었던 그들의 가슴은 더욱 쪼그라들었습니다. 무거운 침묵과 함께 절망이 흘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상황 앞에서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던지듯 대고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넘어가는 저녁때까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평소 여호와의 일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었는지 또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치며 살아왔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어떤 신을 선택하든지, 자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겠다는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도 그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함께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굳게 다물고 있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반응 역시 그가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회개도, 믿음의 고백도, 도움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호와께 이전까지는 너무나 평탄하게 잘 이끌어주시더니, 이제 와서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듯 외쳤습니다. 차라리 이미 정복한 요단강 동편 땅에서 살게 하지 그랬느냐고 외쳤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던 어이없는 패배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행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쭉 지켜보고 있던 주변 부족들이 지극히 작은 성 아이에 패한 자신들은 물론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까지 만만하게 여길 텐데, 땅에 떨어진 여호와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하실 것이냐고 외쳤습니다.
패배의 책임이 마치 전적으로 여호와에게 있는 것처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흔들려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패배 앞에서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그랬었습니다. 유대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모세도 그랬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일이 잘 돌아갈 때는 몰라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환난과 시험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환난과 시험 앞에서 무기력하게 넘어진 이들을 판단하고 신랄하게 정죄하기보다는 넉넉한 마음으로 공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책임을 돌리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이스라엘이 (파렴치한) 죄를 지었다. 나와 맺은 언약, 지키라고 명령한 그 언약을...어겼다. 전멸시켜서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도둑질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 물건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수7:10b-11)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성민 이스라엘이 어이없는 패배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해서 당신께 바쳐야 할 물건들 가운데 일부를 누군가가 은밀하게 가로챘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와의 주도하에 치러지는 거룩한 전쟁이었습니다. 곧 성전聖戰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이끄는 실제적인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가 아니었습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이시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다.”(시24:7-8)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전쟁에서 누구도 맞서 싸울 수 없는 강력한 능력과 용맹을 발휘하시는 여호와였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을 엄중하게 징계 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노아의 때처럼 그들 가운데 죄가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깊이 명심하라.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전리품 가운데 무엇이든 탐내지 마라. (절대로)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전멸당하는 운명을 이스라엘 진영에 스스로 불러들이게 된다.”(수6:18)라는 여호수아의 경고에 따르면, 성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명령이 하나 있었습니다. “진멸חֵרֶם(헤렘)”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건을 드리는 방법은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호흡하는 생명을 드리는 방법은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불에 태우고, 죽이는 이유는 다시 고쳐서 쓸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편에서 볼 때, 더 이상 존재 의미와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오래 참아주시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고쳐서 쓸 수 없을 때까지입니다. 존재 의미가 없을 때까지입니다. 죄에 완전히 찌들어 있어서 그들이 죄이고, 죄가 그들인 가나안 족속이 그랬습니다.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랬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얻게 되는 모든 전리품은 거룩하게 구별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 거룩한 희생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한 분에게만 온전히 돌려져야 했습니다. 혹, 누군가가 전리품 가운데 지극히 작은 물건 하나라도 빼돌리게 되면 범죄였습니다. 개인은 물론 성민 이스라엘 공동체가 진멸 당할 물건 대신 진멸 당해야 했습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진멸이라는 두렵고 떨리는 징계를 당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 7장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룩한 희생 제물로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야 할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다.”(수7:1a)라고 시작됩니다. “범죄 하다מָעַל(마알)”는 단순한 실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여호와와 맺은 영원한 언약을 버리고 떠나서 거역하고 배신하는 중차대한 범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수 7장은 누군가가 성전을 이끌고 계시는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할 물건들 가운데 일부를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가로채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고발과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어이없는 패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실패들을 경험하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언제나 저와 여러분 안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게 되면 언제든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튀어나옵니다. “네 자손은 아모리 족속의 죄가 찰 만큼 찬 다음, 사 대만에야 돌아오게 될 것이다.”(창15:16)라는 증거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족속의 죄가 찰 때까지 성민 이스라엘을 이집트에 맡겨두셨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죄가 차자 곧 진멸할 때가 되자 지체하지 않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두렵고 떨리는 진멸이었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원래 가졌던 하나님의 모양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에게 거룩하여 구별하여 바쳐야 할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원수를 대적할 수 없었고, 원수 앞에서 패하여 물러섰다. 그들이 자청하여 저주를 불러들여서, 그들 스스로가 전멸시켜야 할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에서 전멸시켜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없애지 않으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다. (그러니)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라.”(수7:12-13a)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여호와께 죄를 저지른 죄인을 찾기 위해서 열두 지파를 소집했습니다. 제비를 뽑았습니다. 마침내 아간Archan의 범죄가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왜 그랬는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라고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려야 할 전리품 가운데 몇 가지를 훔쳐서 몰래 숨겨두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입해 온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였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말로만 듣고 있던 물건을 실제로 보게 되면 불쑥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도덕도 윤리도 없었습니다. 나라와 민족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몰라도 여호와만큼은 절대로 속일 수 없다는 너무나 엄중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리를 판단하고 분별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탐욕의 주체입니다. “나”입니다. 또 탐욕의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우상숭배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탐욕에 사로잡힌 “나”들 곧 우상 숭배자들이 정치와 종교와 문화는 물론 사회 전반全般에서 득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풍조와 경향까지 쥐락펴락하는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너를 죽입니다. 나를 위해서 가정을 파괴합니다. 나를 위해서 선한 일군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붙입니다. 나를 위해서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나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뜨립니다. 심지어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이렇게 “나”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끼치는 해악은 너무나 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라오겠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나”를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를 완벽하게 내려놓은 다음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맞고 버려져 있었던 사람을 본 제사장에게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못 본 척 지나쳤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나에게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것도 모자라서 모욕하고 경멸까지 하던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당장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마자, 자신 역시 강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상처에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포도주를 부어주었습니다. 급한 대로 당장 필요한 응급조치를 해주었습니다. 말에 태워주었습니다. 자신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이는 길을 걸어서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미 잡혀 있었던 자신의 일정과 계획을 잠시 뒤로 미뤘습니다.
밤새도록 뜬 눈으로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주막 주인에게는 필요한 경비를 충분히 주며 자신이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추가되는 경비가 있다면 돌아와서 정산해 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필요한 은혜를 일방적으로, 값없이, 그것도 충분히 베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고 죽으셨다고 부활 승천하면서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Abraham Joshua Heschel는 “누가 사람이냐?”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필요와)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누구에게나 필요가 있습니다. 요구가 있습니다.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볼 수 없습니다. 나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야수성의 반대는 인간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서로를 생각하는 인간성보다는 오직 나만 생각하는 야수성을 훨씬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끝마친 야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영혼을 깨우고, 목숨 걸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너무나도 소중한 사명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안위와 평안만을 추구했던 타락한 선지자들은 야수였습니다. 목구멍 차 올라온 탐욕을 추구하기 위해서 죽은 영혼을 살리는 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 역시 야수였습니다. 타락한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야수들로 채워져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생명까지 기꺼이 포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센터 직원 가운데 한 명이 조용히 저를 불렀습니다. 몸도 살피면서 살살 일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 영광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불신자인 그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떡여주었습니다. 그날 하루, 몸은 정말 피곤했었지만, 어느 때보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께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라는 증거대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낮고 천한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나를 철저하게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나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가증스러운 자기 숭배를 철저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너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곧 나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기꺼이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필요를 가진 사람을 맡겨주신다면 자신의 일정과 계획에 손해를 보면서도 기꺼이 채워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복된 삶, 이웃의 기쁨이 되어주는 복된 삶,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는 탐욕 하나만 추구하는 야수들로 가득 찬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드는데 미력하지만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