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인류역사상 최고 부정주의자 부처와 최고 긍정주의자 공자 그리고 그리스 신화가 만든 예수!
유학儒學의 불교사상의 공격과 이단(異端) 낙인ㅡ숭유억불抑佛崇儒의 공식 선포.
불교를 오랜 동안 공부하면서 가졌던 불교사상의 모순, 즉 불교가 현실을 사라져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불교의 부정적 관점, 또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란 불교의 허무한 세계관의 내용, 동시에 현상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그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윤회를 주장하는 불교사상의 내용이 보이는 명백한 모순에 대하여, 내가 오랜 동안 가졌던 의문들이 바로 선조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내용들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을 유학의 종합이론서, 근사록집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불교사상의 모순적 내용에 대한 나의 사유와 의문을 불교사상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나의 빈약한 지성과 아둔한 지적 능력에서 비롯된 나의 이해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의 사유는 당연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것임을 알게 되어 사유의 지평을 상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유학을 불교와 비교하면서, 유학의 기본 내용을 이해함으로 인류의 영적 탐구의 기초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게되었고, 진리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얻었을 수 있게되었다.
定慧雙修정혜쌍수!
지혜와 선정禪定은 수행의 필요충분조건이다.
8년전 쿤달리니 각성으로 시작된 명상의 신비한 이끌림에 의해 공부가 공부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 다시 알게된 것도 중요한 점이다.
유학은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유학을 국시로 채택한 조선왕조의 국가정책은 이를 따른 것이다.
아래 내용은 근사록에서 밝힌 유학이 불교를 이단시하는 합리적 이유를 정리한 내용이다.
1. 좌망坐亡과 선정禪定의 부정
거울은 만물을 비추는 것이다. 거울의 본래적인 성질로서 사물을 비추지 않도록 하기가 어렵다. 마친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만물과 서로 교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기는 어렵다.
노자의 성인을 끊고 지혜를 버리는 것과 부처의 앉아서 참선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천리를 끊고 인심을 해치는 가르침이다.
마음의 주인됨을 확립: 외부 대상으로 부터 자극에 의한 마음의 동요를 피하고자 한다면 오직 이 마음이 주인됨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주인됨은 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에 주인됨이 없으면 마음은 사물로 채워진다.경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주된 일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근사록 1의 제4귄 존양편 480.
2. 부처의 거짓유혹.
불교를 잘 섬기면 천당에 가고, 잘못 섬기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거짓 유혹이다. 죽은 자는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신체는 흙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고, 정신은 바람과 불 처럼 표현히 날아가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어찌 지옥과 천당이 있을 수 있겠는가? 755
(전체 14권 중 13권 한권 전체를 불교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내용으로 구성했다.)
제13권 이단(異端)의 변별
배우는 사람은 불교에 대하여 음탕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여겨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그속에 빠져들게 된다. 정씨유서 895
불교의 가르침은 공경함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은 있지만 의義로써 바깥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없다. 즉, 불교는 정(禪定)을 익혀 이 마음을 수렴하여 허정함(虛靜)을 얻고자 하니, 이른바 공경함으로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는 있으나 용은 없는 것이다. 윤리를 끊으니 어찌 의가 있겠는가? 불교에서 선이란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이 의지하는 것이 없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다스리는 의가 없으니 그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금이 없는 자와 같고 눈금이 없는 저울과 같으니 안을 곧게한다는 근본도 잘못된 것이다. 890
불교는 사물을 떠나 도를 말하므로 일사의 사물에 대하여 어떤 자는 얽매이고 어떤 자는 멋대로 하여 모든 것이 병이 된다. 이름은 크게 자유자재힌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편협하여 조금도 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교는 도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각각 올바르게 되어 집착하여 병이 되지 않고 방자함에 이르지 않는다. 891
불교에서 선이란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란마음이 의지하는 것이 없게되는 것이다. 신령하게 깨달아 어둡지 않게하는 것이 항상 밝게 깨어있는 법이다. 그러니 경으로 안을 곧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을 다스리는 의가 없으니 그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금이 없는 자와 같고 눈금이 없는 저울과 같으니 안을 곧게한다는 근본도 잘못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삶과 죽음을 두렵게 여겨 이익을 도모하니 어찌 공공의 도라할 수 있겠는가?
석가는 "나면 죽음이 있기에 윤회가 있다"고 말한다. 불생불멸의 이치를 구하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이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위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일상적인 삶을 통한 배움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도달한 진리가 어찌 옳은 것이겠는가?
사물을 버리고 이치를 밝히려고 하면 자취를 버리고 마음을 구하려고 하니 어찌 도를 아는 자이겠는가?
주자왈, 불교는 황홀한 사이에 심성의 그림자만 대강 얻고 그 속의 맑은 도리는 전혀 보지 못한다. 그들로 하여금 보존하여 기르는 공부가 있게 하더라도 그들이 본 그림자만 기르게 될 뿐 끝내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도는 인류에 근본한다. 인륜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선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891
불교는 본래 삶과 죽음을 두렵게 여겨 이익을 도모하니 어찌 공공의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석가는 '나면 죽음이 있기에 윤회가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불생불멸의 이치를 구하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에는 오직 위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할 뿐이고 일상적인 삶을 통한 배움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도달한 진리가 어찌 옳은 것이겠는가? 불가의 진리는 원래 서로 연속되지 않는다. 끊어짐이 있으면 도가 아니다.
893
주희왈 불교는 황홀한 사이에 심성의 그림자만 대강 얻고 그 속의 많은 도리는 전혀 보지 못한다.894
만물을 낳고 또 낳는 것을 역易이라고 한다. 천지의 이치가 유행하며 조화를 이루어 사물이 균등하게 생명을 갖추고 있으니 이치도 균등하게 갖추고 있다. 사람이 만물이 하나라는 이치를 알고 사사롭게 자신의 견해를 내지 않으면 자연히 만물과 더불어 각각 마땅한 바를 얻게된다.
불교는 이러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부터 생각을 일으킨다. 그의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도리어 싫어하고 미워하며 근진을 다 없에고자 한다. 그리고 마음의 본원이 안정되지 않기때문에 마른 나무나 식은 재처럼 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치는 없다. 이런 이치를 얻으려면 죽음밖에 없다.
(불교의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한 잘못)
불교는 만물이 일체여서 이치를 따라 행하면 본래 장애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사사로운 견해를 일으킨다.
내 몸이 사물과 교류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드디어 근진을 모두 제거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텅 비우려고 한다. (육진과 육근의 제거) 그러나 마음은 본래 생성의 도여서 체가 있으면 용이 있게되니 어찌 끊어 없앨 수 있겠는가?
체(體)와 용(用). 불교는 본래 자기를 사랑하고 망령되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여 생사를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자기라는 생각을 버리면 본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899
불교는 음양,주야, 생사고금(천명의 유행을 의미)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이 말하는 형이상자(성명)가 성인의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형이상자는 성명이다.
(우주의 운행에 대한 불교의 잘못)
음양,주야,생사,고금은 곧 천명의 유행으로 음양 두 기가 펴고 굽히는 것이다. 불교가 성명을 윤회라고 하고 환망이라고 하니 불교가 말하는 성명도 성인의 것과 다르다. 900
(천지는 환상이라는 불교의 주장은 거짓된 것이다.)
불교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하늘의 작용을 재단하여 이를 줄 모른다. 도리어 미미한 육근을 인연하여 천지가 생겨난다고 하며, 다 밝힐 수 없자 천지일월을 환영이라고 하여 사람을속인다. 903
위대한 역에서는 유무를 말하지 않는다. 유무를 말하는 것은 비천한 견해이다. 역에서는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대게 음양의 운행에서 그렇게 되는 까닭이 도이다. 체와 용이 서로 의지하고 정밀한 것과 조밀한 것이 간격이 없으므로 유무로 나눌 수 없다.
후세에 이단이 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므로 도는 무이고 기器는 유라고 하였다. 유는 헛된 환상이며 띠끌이고 무는 현묘한 것이고 진공이라고 하여, 유무를 나누어 둘로 만들었다. 이는 비루한 견해이다. 907
불교에서는 정기가 모이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신이 된다. 그러나 진실은 흩어지면 없어질 뿐이다. 불교에서는 신식은 흩어지지 않아 다시 형체를 받아 태어난다고 하니, 이는 귀신의 이치에 밝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인생을 환상이라고 하니, 사람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이치이다. 지금 사람의 일을 버리고 천성만을 구하니 어찌 하늘을 아는 것이겠는가? 908
깨달음을 얻으면 마땅함과 천명이 있어서 생사를 하나로 보고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보게된다. 태어나면 태어나고, 죽게되면 죽는다. 생사를 동일하게 편하게 여기니 어찌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겠는가? 하늘과 사람이 일치하는데 어찌 취하고 버리는 바가 있겠는가?
옛날의 치우치고 음란하고 사악하고 도피하는 말들이 모두 한결같이 불교에서 나왔다. 사악한 설과 이상한 가르침에 대하여 학문으로 그 폐단을 상고해야 한다.
구경회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