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나는 단 하나의‘나’가 아니라 수많은‘나’로 구성되어 있고, 이 수많은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끌어나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론적 위상이 달라지게 된다.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다. 대학총장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고, 대통령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다. 무한한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고, 이상과 욕망을 적절히 조정하고 제어할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무시하고 머나먼 이상을 쫓아가는 나일 수도 있다. 이처럼 수많은 나와 수많은 나들의 만남의 장소가 나의 정신이며, 이 수많은 나들이 그 모든 능력과 지식의 총체로서 조화를 이룰 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문화적 영웅이 될 수가 있다. 이 수많은 나들은 잠재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그리고 이상적 자아로 그 유형들을 분류할 수가 있으며, 한국시문학사상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윤동주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라는 시구에서의 나는 현실적 자아가 되고, 백골은 잠재적 자아가 된다. 백골은 그 욕망의 실현을 꿈꾸다가 죽어버린 잠재적 자아가 되고, 그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나는 그 잠재적 자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현실적 자아가 된다. 다시 말해서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현실적 자아가 될 때, 그는 백골의 무모함(잠재적 자아의 무모함)을 안타까워 하는 자가 되고, 백골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 보는 잠재적 자아가 될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욕망의 실패를 안타까워 하는 자가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골을 들여다 보며 우는 것이 이상적 자아인‘아름다운 혼’이 될 때, 그는 잠재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서 그 이상적인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함 때문에 우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백골은 그의 잠재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총체로서 그의 전면적인 실패를 뜻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낙향은 실패한 인간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뜻하고, 낙백은 뜻을 얻지 못하고 넋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전면적인 실패를 이룩한 시인이 돌아간 곳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 고향마저도 더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는 그런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덕은 자유의 존재근거가 되고, 자유는 도덕의 실천 근거가 된다. 윤동주 시인은‘부끄러움의 시학’의 완성자이며, 이‘부끄러움의 시학’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실패----그것이 대 서정시인의 꿈이든, 대한독립이든지 간에----는 그의 양심의 가책이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이처럼 백골로 희화화시키고, 그 백골의 형태를 꾸짖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꿈을 잃어버렸던 것이고, 꿈을 잃어버린 시인은 백골이 되었던 것이다. 이 꾸짖음의 극치가‘지조 높은 개’이며, 이 지조 높은 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의 유령(백골)을 쫓아버리는 파수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너는 윤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후손도 아니고, 너는 더군다나 자랑스러운 한국인도 아니다. 이곳은 네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너와도 같은 문약한 패배주의자가 머물만한 곳도 아니다. 자, 이 밤이 밝기 전에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가거라!”
윤동주 시인은 그의 일생내내 자랑스러운 도덕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고, 이처럼 자기 스스로 그 무엇보다도‘지조 높은 개’를 키우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꾸짖고 단죄를 해왔던 것이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하지만, 그러나 그는 결국 또 다른 고향에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조 높은 개는 그의‘아름다운 혼’이 키우는 또 하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혼을 지닌 자는 고향을 떠나가도 고향에 살고, 아름다운 혼을 지닌 자는 고향에 살아도 또다른 고향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