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 3,25.34-43; 마태 18,21-35
+ 찬미 예수님
제1독서에서, 우상숭배를 하라는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거부하자 세 청년이 불가마에 던져지는데, 불가마 속에서 아자르야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 기도는 시편 51편의 내용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즉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인데요, 사순시기에 용서에 대한 말씀이 참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껴지나요?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용서하라고 강요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말씀을 유심히 잘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여쭙니다. 당시에 유명한 유대교 랍비는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말을 했는데, 베드로는 이미 이것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뒤이어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고 하시며 비유 말씀을 들려주시는데요,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만’은 그리스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의 단위입니다. ‘탈렌트’는 가장 큰돈의 단위입니다. 즉 만 탈렌트는 엄청나게 큰돈이라는 뜻인데요, 굳이 비교하자면,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이스라엘 전역에서 강제로 거두어들인 돈이 일만 탈렌트였습니다. 즉 한 사람이 빚을 지거나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임금은 놀랍게도 이처럼 어마어마한 종의 부채를 탕감해주는데요,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애원을 듣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 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임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애원하는 동료를 무자비하게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 때문에, 백 데나리온도 800만 원 정도의 큰돈인데요, 하지만 백 데나리온은 만 탈렌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때문에 동료를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너무나 무자비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우리가 형제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심히 새겨야 할 단어는 하늘 나라, 아버지, 형제입니다. 즉 ‘남’이 아니라, ‘너의 형제’에게, 네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비를 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고, ‘하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와 있다’는 말씀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십니다. 그것을 한계 짓는 유일한 것이 우리의 무자비함입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그때 유일하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제한됩니다.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 하나만 있을까요? 내가 이백 데나리온 빚을 진 형제도 있고, 삼백 데나리온 빚을 진 자매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서로 마음의 빚을 지고 있고, 알게 모르게 탕감받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유독 어느 형제 또는 자매가 나에게 진 빚을 용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용서했느냐 용서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느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자비와 무자비함의 문제이지, 내 자비심이 부족한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이는 “제발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하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오늘 복음은, 나에게 용서도 빌지 않는 어떤 사람을 무작정 용서해 주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그의 애원 안에서 하느님께 빌고 있는 나의 애원을 발견하고, 나에게 하느님께서 품으신 가엾은 마음을 나도 그에게 품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읽으며,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수많은 선량하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이미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생 고해성사를 받는 횟수는 몇 번일까요? 일흔일곱 번이 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같은 죄를 짓는 우리를, 그렇게 반복해서 용서해 주고 계시듯, 우리도 우리에게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겠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제자, 무자비한 종의 비유 (또는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사도 10,1-8)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1660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