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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중보기도
출 32: 7
우리는 얼마 전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난 두 여인의 세계적인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았 지만 두 사람 모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긴 채 소천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수녀 마더 테레사가 그 두 분 입니다.
최근 또 우리에게 큰 아쉬움을 남긴 두 분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4월 19일 소천하신 한경직 목사님 이 그 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약 6개월 전인 지난 해 10월 12일 소천한 일본소설 '빙점'의 작가인 미후라 아야꼬입니다.
먼저 미후라 아야꼬는 한평생 결핵과 척추 카리에스, 대상포진 즉 습진, 그리고 직장암, 파킨스시병 등 많은 병으로 어 려움을 겪었습니다. 꽃같은 청춘인 나이 스물네 살부터 서른일곱 살까지는 아예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지냈습니 다. 그리고 그전이나 그 후 어느 한 순간이라도 난치병에서 벗어난 날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말했듯이 그의 생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로 살았던 질고의 한 평생이었지만 그 77년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보기와는 달리 참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었습니다.
미후라 아야꼬의 글에는 인생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체험이 들어있으며 그 체험을 보듬어 안고 고민한 끝에 얻어낸 인생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고 그의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품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줍니다. 미후라 아야꼬의 그러한 인생관은 그가 늘 애송하는 '아프지 않으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자 미상의 시 한편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 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여기의 성안이란 하나님의 얼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병상에서 세례를 받은 1952년 7월부터 작년 10월 7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마음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기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음은 미후라 아야꼬의 말입니다. '성경이 내게 없어서는 아니 될 책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의 삶의 목표는 정해졌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전해야겠다는 것이었 다. 내가 소설을 쓰는 작업도 이일의 연장일 뿐이다. 그때 이후 오늘날까지 나는 나름대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계속 글을 써왔다.' 미후라 아야꼬는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니던 일본의 아사히가와 로쿠죠 교회를 방문했지만 그가 죽고 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를 방문했고 앞으로도 그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한경직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기독교 언론뿐 아니라 여러 언론들이 그를 청빈, 겸손 혹은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신 따뜻한 성품이라는 말 등으로 높이 평가하고 치하하고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경직 목사님의 경우에 무엇이라 정해서 평가하는 자체가 오히려 그 목사님을 폄하(貶下)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됩 니다.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성경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처럼 이런 분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느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기자는 그의 빈소를 방문하고 난 뒤 빈소에 문상한 조객들이 모두 다 한 목사님을 돌아가신 분으로 느끼는 것 같지 않았고 마치 살아 계신 분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것입니다. 죽었으나 죽지 아니한 사람, 보이지 아니하지만 보이지 않은 사람이 아닌 분, 만나지 않지만 만나지 못하는 분이 아닌 사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 신앙인들의 진정한 삶이요 부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현실을 봅니다. 믿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영적 지도자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결코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사람들조차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기어이 탐욕 앞에 무참히 무너지는 오늘의 모습들 앞에 미후라 아야꼬나 한경직 목사님의 죽음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진정한 부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 생각합니다. 당사자로서는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서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부활하는 것이지만 그가 떠나고 난 뒤 남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비치었는가는 대단히 중요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죽고 난 뒤 자신만 천국에서 영생 복락며 사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의 흔적이 어떠한가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든지 혹은 단지 몇 사람 밖에 아니 되든지 간에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남기고 가는 사람, 깨끗하고 정직하고 순결함을 남기고 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진정 부활을 이룬 사람이 아닐까? 함께 생각해 봅니다.
출애굽기 32장은 그동안 위태로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기어이 하나님 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율법을 받고 있는 40일 밖에 되지 않 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지 못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진노하셨고 그들 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켜 주 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말 것을 간구함과 용서를 구한 모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겨우 그칠 수 있었습니다 (1-14절).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길이 막혀도, 물이 없어 도 불평하였고 먹을 것이 없을 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결해 줄 그 때 뿐이었고 또 다른 조그마한 일만 생기면 다시 불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죄성이 점점 더 심해지더니 이제 드디어 그 도를 넘게되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십계명 중에서 제일 계명을 정면으로 범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셨습니까? 이것만큼은 백성들을 불러놓고 하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재차 또 3차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의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는 먼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제 1계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출20:1-4). 그래도 미덥지 못하셨든 지 다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출 20:22-23)... 하나님의 모양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정면으 로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9-10절) 하고 대단히 진노하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로 인하여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시고 난 뒤 여호 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 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3-34절) 하 시는 말씀을 보면 세상적인 표현으로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세 또한 얼마나 화가 많이 났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던져서 깨뜨려 버렸겠습니까? 오늘 32장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모세가 하나님의 두 돌판을 깨뜨리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하는 19절 말씀을 보면 마치 모세가 분노에 못이겨 돌판을 깨뜨린 것 같습니다. 만약 모세가 화가 나서 돌판을 깨뜨렸다면 우 리는 주저없이 그를 조금 경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으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물건 가운데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돌판을 부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성품에 대해서 모세보다도 이 땅위에서 온유한 사람은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모세는 온유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세가 이 두 돌판을 깨뜨린 것이 분노 때문이라고 판 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절묘한 지혜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화를 내는 사람의 화를 조금 누그러뜨 리기 위해서 대신 먼저 화를 내면 정작 화를 내고자 했던 사람이 한풀 꺾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런 지 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으므로 모세도 한이 없이 화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는 그 돌판 기록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당장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 신 십계명 중에서 제 일계명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돌판에 명문화된 법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한 모세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이 바로 돌판을 깨뜨린 일입니다. 오늘날 표현대로 말한다면 죄형법정주의를 생각한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즉 죄와 형은 법에 정해지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명문화 된 돌판은 지금 모세의 손에 있습니다. 이 법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계약이 되어야 하기 때 문에 그 돌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판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력 을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돌판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지 혜를 모세에게 준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법이 없으니 죄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궁색해 보이 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티끌만한 근거만 있으며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궁색한 방법을 쓰는 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간에 구워해 주시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장례를 집행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믿지 않은 망자(亡者)가 죽고 난 뒤 어디 로 갈까를 염려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묻는 경우입니다. 잠시라도 예수를 믿은 적이 있다면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아니 합니다. 모세는 이것을 생각했고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실 때 모세는 항의 하기도 하였고 간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돌판을 깨뜨렸고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삼천 명을 처형하였습 니다. 그리고 난 뒤 다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명을, 자기 구원을 빼앗아가서라도 저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곡하게 간청 하였습니다.
여러분, 만약 모세의 이 중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의 이 중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입니다. 예 수가 수치를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주일과 부활주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다 가 기어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를 짓고 맙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 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모두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구원을 주시고 싶어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인간이 행위로서는 도저히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아시고 다른 것을 만들어 내신 것이 바로 믿 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달려 죽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지금 지은 모든 죄, 그 리고 앞으로 지을 멸망할 수밖에 없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깨끗한 몸으로, 흠없는 사람으로 부활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이 방법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 없다가 아 니라 결단이고 선택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는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대신 사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 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이 십자가와 예수의 구원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함께 죽으신 것처럼 부활해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신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신자들은 이 날이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 더 즐겁고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해마 다 우리 신자들에게 부활절을 주시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은 한번의 부활 주일로서는 흠없는 예수와 닮아져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작년에 부활주일을 맞으면서 어떠한 것으로 예수를 닮아갔습니까? 그리고 금년에 부활절을 맞으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또 어떤 부활로 내년 부활절을 맞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기억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
━━━━━━━━━━━━━━━2000년4월26일
에스라의 개혁
에스라 10장━━━━━━━━━━━━━━━━
에스라서의 마지막 10장입니다. 에스라서 전체의 내용을 보면 1차와 뒤이어 2차 포로귀환이 있었는데 1차 포로귀환 때 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한 포로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차 포로귀환이 있은 80년 뒤에 에스라를 주축으로 하여 2차 포로귀환을 하였습니다. 2차로 귀환한 에스라는 자기 동족들이 다시는 지금과 같은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 고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지 넉달쯤 지나고 나서 이미 귀환한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여인들과 통혼하였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에 스라에게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에스라는 주저앉아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통회자복하였습니다. 이 처럼 에스라가 깜짝 놀랐던 이유는 이전에 이방여인들과 통혼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깨끗한 신앙이 다른 여러 신앙들 과 혼합되어 훼손되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 에스라가 본 당시의 상태는 그 때의 반복이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그래서 통회자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통곡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참을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통곡하던 사람 중 한사람 스가냐가 일어서서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사람들의 의논을 따라서 이 모 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오니 이 일은 당신이 앞장서서 시작하기만 하면 우리가 도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힘써 이끌어 달라고 건의하였습니다(3-4절). 이 말을 들은 에스라는 골 방 속에 들어가서 음식도, 물도 먹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명령하면서 누구 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서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낼 것 이라고 공포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자 에스라는 여러분들이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여러분들의 선조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 방 여인을 끊어버리라고 강하게 명령하였습니다(6-11절). 그리고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말을 사람들로부터 듣고 난 뒤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조사하였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110명이 조금 넘 는 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지난주에 소천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생명을 백세가 가깝도록 연장시켜주신 이유를 함께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목 사님의 마지막은 고령으로 힘들어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 종을 힘든 시간 속에서도 붙들어 놓으셨을까요? 창세기의 므두셀라를 969세나 되게 오래 살게 하셨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가 죽으면 이 땅에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토록 오랫동안 이 땅에 붙들어 두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유추하여 한경직 목사님이 고통 가운데서 살게 하셨던 이유가 혹 한 목사님을 대신할 순결하고 깨 끗한 하나님의 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지 않았을까? 한 번 추정해봅니다. 아울러 혹 하나님께서 이 땅의 기독교에 대해서 개혁해야 할 일이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개혁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기 전에 몇몇 사람이라도 바른 기독교를 가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에스라 10장을 함께 봅니다.
에스라는 성전재건과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의 종교개혁이 잘 추진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봅니다. 먼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는 에스라의 자세로부터 비롯되 었습니다. 요즘 우리의 김대중 대통령이 잘하려고 애쓴 결과가 여러 가지 열매로 맺히게 되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울러 여러분들은 그 분이 처음에 가졌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최고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칩니까?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모두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개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불가 능합니다. 에스라는 자신은 비록 깨끗한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죄와 악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통회자복하였습니 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고백하십시다. 부족한 것이 많았고 욕심이 너무 많았으며 세상사는 일에 더 좋은 것만 추구하다보니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우리의 욕심만 남았던 그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최고 지도자인 에스라 는 이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자기는 자복할 죄가 없었지만 민족 의 죄악의 열매가 맺힌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의 죄라고 통회자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의 목사로 서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들이 먼저 통회자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 오. 그리고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자복해야할 죄를 고백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종교개혁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에스라는 이런 혼란 와중에서도 사람들이 건의하는 것에 대해서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철저한 교통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6절).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교통하 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며 건의도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과 사람들의 의 견을 합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하나님 과 교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목사나 영적인 지도자들을 많이 만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그 분들이 하나님과 철저한 교 통을 가지도록 배려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철저한 교통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여러분 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인도할 수 있습니다. 소위 거룩한 욕심이라는 말로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별로 좋지 않으므로 주의 종들이 하나님과 철저한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도 필요합니다. 물론 먼저 주의 종들이 이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 대강 하나님과 교통해서는 어떻게 온전히 하나 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칫하면 하나님과 전혀 교통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많은 교통이 있 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스스로 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일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혼란의 와중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난 뒤 일어서서 하나님으로부터 결재 받은 말씀을 과감하게 공포했습 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이방여인들을 취한 사람들은 그들을 모두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지 만 에스라는 이러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이 조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결단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고뇌가 없는 결 단, 기도가 없는 결단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보기에 뛰어난 방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 를 가지면서 고뇌가 있었고 기도가 있었던 결단은 힘이 있습니다.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적용해보 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고뇌했던 방법만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최고 지도자인 에스라의 자세가 성공적인 종교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고 다음은 지도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동참과 동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스가냐는 에스라에게 건의하였고 그 일은 자신만의 생 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므로 에스라가 해주기만 하면 힘써서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도 자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힘쓸 때 그 뒷 마음이 어떠하든 간에 야당의 총재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보기 에 좋습니까? 교회에서도 절대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목사나 어떤 기관의 간사가 하는 일을 밀어주어야 합니다. 남선교회 나 여전도회의 일에서 다른 사람이 할 때 자신이 하는 것처럼 열심히 도와주지 않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일입니다. 남선교회 회장, 여전도회 회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전부다 하나님을 동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적극적으로 함께 도와 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며 진정한 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미묘한 문제를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그 여인을 버리 고 심지어 거기서 난 자식까지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경전체의 하나님 뜻은 통혼 문제 즉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혼도 하였고 자식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말라는 하 나님의 또 다른 법이 있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통혼금지가 있고 이혼금지가 있습니다. 모순입니다. 통혼도 아니 되지 만 이혼도 아니 됩니다. 더구나 버림받는 이방여인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본문의 태도를 한 번 보겠습니다. 성경은 통혼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스9:11-12). 그 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이방여인들과 자식들을 버리게 하라는 사람들의 건의대로 에스라는 그들을 모두 버리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아주 미묘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실 제적인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하실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말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 명이며 어떤 것이 사람들의 의견인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나 명령만은 아 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땅으로 들어가거든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은 이혼하라 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미묘하지만 잘 보아야 합니다. 그 렇지 않고 성경 한 구절만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게 되면 성경을 잘못 이해할 수 있습 니다.
예를 든다면 회사에서 자기 돈을 회사의 일에 쓰면서 회사에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돈으로 회사 일에 썼으니 회사 돈도 자기 일에 쓸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이것은 철저히 금지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물론 교회는 설사 자기 돈으로 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조금 다르겠지만 논리는 마찬가지입 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정확하게 구별해야지 유추하여 행동하면 아니 된다는 것도 쉽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이방여인들에 대한 성경의 예를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표적인 무흠(無欠)한 사람 인 요셉은 이방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에집트 사람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 니다(창41:5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흠에 대해서 단 한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도 이방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미리암과 아론이 이를 비방하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 하여 진노하셨습니다(민12:1-9).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방여인과 결혼한 모세를 두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아내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내어보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적용을 하 고자 합니다. 먼저 혹 있을 그 당시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통혼이 워낙 큰 사회의 문제이었기 때문에 이혼도 허용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여기에 제기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런 특 수 상황을 사람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교황이 늘 잘 했지만 면죄부와 같은 일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 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이 또 인간의 상황이 변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잘못일 수 있습니다. 상당히 위험 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방안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진상조사 위원회가 결혼한 이방여인들 중에서 여호와의 신앙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조사하였는데 그 조사가 끝나고 난 후 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함부로 출원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조사가 끝났다고 말하고 난 뒤 아무 결론 없이 에스라서가 끝이 납니다. 세상적으로는 조금 답답해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늘 일하는 것에 대한 결과나 열매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혁의지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가식적이 아니라 진정한 의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결론만 중요시 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본문에서 111명 내지 112명 정도의 이름이 나 와 있는데 이 중에서 1차 포로귀환에서 제사장의 이름이 전체 명단의 10%정도인데 반해 오늘 본문에서는 제사장의 명단 이 아주 부끄럽고 죄송하게도 15%나 됩니다. 전체 숫자의 10%밖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의 숫자는 15%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대단한 차이가 아닌 것 같지만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누가 주도했으며 어디 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되다 보니 나라가 온통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도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나라가 신앙적으로 바로 설 수 있는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에스라와 같은 거룩한 제사장의 무리가 있을 때 이 나라가 거룩한 길로 가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살피시고 돌보아 주시며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 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누구를 탓할 것인가요? 먼저 실제 종교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도 모두 제사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앞장서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나라에 하실 일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
내가 배가 고플 때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고
정말 고맙소.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당신은 조용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 석방을 위해 기도해 주었소
정말 잘한 일이오.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소.
그래서 내 옷차림이 달라진 게 뭐요?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 꿇고 앉아 신에게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소.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소.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난 당신이 날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주길 원했소.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소?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외롭고,
춥고,
아직은 고통받고 있소.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작자 미상 <뉴욕 맨허탄의 흑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