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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한 2년전쯤 된 일일까요?
화려한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있었습니다. “Life is beautiful !”
이 영화는 귀도라는 아버지가 아들 죠수아에게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를 몸으로 가르쳐 주는 영화였습니다.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아들에게 고난을 게임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절대절망에도 눈부신 희망의 삶을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직접 몸으로 보여준 주인공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인생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인생을 게임처럼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인생을 신나고 아름답게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언제나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인생은 한번입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연습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속히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까?
어떤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함께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1)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인생!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이란 열심히 살라는 명령입니다.
생명할 때 “명”자는 목숨“명”자인 동시에 명령할 명자임. 그러므로 생명이란 인생을 열심히 살라는 하나님의 진지하고 엄숙한 명령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태어난 줄 아십니까?
우리의 생명은 정자와 난자의 신비한 만남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TV에서 하버드 대학 의과대에서 제작한 생명과학 영상을 보고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가 만나서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되는 신비롭고 놀라운 창조의 광경을 찍은 영상이었습니다.
그 영상에 의하면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약3억 마리의 정자가 “우”하고 소리를 내면서 난자를 향하여 생명의 강을 힘차게 달려갑니다.
그때 많은 정자가 도중에 힘이 없고 지쳐서 도중에 탈락을 합니다.
그런 와중에 가장 용감하고 씩씩하고 패기가 넘친 용감한 정자 한 마리가 생명의 강을 열심히 건너며 소리를 지릅니다.
“사랑하는 난자씨! 나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난자 씨가 화답합니다.
“네, 정자씨! 어서 오세요. 제가 기다라고 있습니다. 저는 오직 용감하고 씩씩하고 열심인 정자만을 맞이한답니다.”
이렇게 해서 용감한 정자, 열심이 넘치는 정자 한 마리만 난자의 몸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억 9천 999마리는 떼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는 3억대 1의 격렬한 싸움을 거치고 나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3억대 1 !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기에 비하면 서울대+하버드대를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적어도 1당 3억이나 되는 엄청난 경쟁률을 통과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보통 열심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씨 자체가 보통 열심종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실 때 3억마리 중에서 제일 열심 종자를 쓰셨습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열심히 살게 하려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인생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3억분의 1의 경쟁률을 이기고 태어난 인생이 왜 게으르게 살아야 합니까?
왜 그렇게 비리비리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할 일없이 빈둥빈둥 노는 사람입니다.
이런 인생은 참으로 초라하고 너무나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 인생이 어떤 종류의 삶이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업의 빈부귀천이 문제가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농사짓는 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장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놀기만 하면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ex)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엔지니어, 공순이, 공돌이, 운동하는 운동선수(스포츠맨), 공무원, 기업인... 열심히 사는 자가 아름다움.
물론 열심히 산다는 말은 꾀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착하고 선하게 산다는 말까지 포함합니다.
죄짓고 탈선하고 악을 행하는데 까지 열심이란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혹시라도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에 관한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인생이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 축원!
2)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즐겁게 사는 인생! 이는 정말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아까 우리는 영상을 통해서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도 인생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의 게임으로 보는 패러다임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은 게임이다. 인생은 마치 오락과 같다.” 이런 패러다임을 가지고 우리는 마치 게임을 하고 놀이하는 인생처럼 인생을 정말 즐겁게 살아야합니다.
과연 인생은 놀이(게임)와 같습니다.
인간은 원래 에덴동산에서 놀이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놀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놀이 자체였습니다.
그 놀이 속에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최대 불행은 놀이를 상실한데 있었습니다.
이유는 죄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놀이의 기쁨과 즐거움은 떠나가고 온통 싸움과 전투와 슬픔, 고민, 걱정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회복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놀이의 회복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놀이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 놀이는 창조의 완성이요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자기 일에 즐거워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즐겁게 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즐겁게 살 수 있습니까?
보이는 현실상황은 기분 좋은 일도 하나도 없고 화내고 성질낼 일만 생기는데 어떻게 기쁘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한마디로 패러다임 쉬프트를 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분 좋은 일이 생겨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생겨야 즐거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기분 좋은 일을 스스로 만들고 기쁘지 않는 일도 기쁘게 생각할 패러다임을 갖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기분 좋은 사건이 생기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런 일과 그런 분위기를 창출하고 귀도라는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 가서 집회를 하던 중 둘째 날이었습니다.
보통 둘째날 저녁은 “예수 믿는재미,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데 아주 재미있고 기쁨이 넘치는 설교입니다.
웬만하면 온 성도가 입을 벌리고 박장대소하며 은혜를 받는 시간인데 그날 따라 처음부터 앞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사람이 있음. 첫날에 안보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설교할 때 제일 기분 나쁘게 하고 김빠지게 한 사람 :
①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인상쓰고 보는 사람
②계속 조는 사람임.
저는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절대로 설교 못함.
어떻게 해서든지 고개 처박고 있는 사람은 저를 보게 하고 조는 사람은 반드시 깨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깔깔 웃고 난리인데 무슨 대한민국 십자가를 혼자 지고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팍 숙이고 한숨만 쉬고 있습니다.
아무리 웃겨도 웃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성질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 요법을 썼습니다.
그 사람이 완전히 대머리였거든요.
대머리가 머리만 푹 숙이고 있으니까 더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특별요법을 썼습니다.
사실은 우리 교회를 다녀간 어느 목사님께 배운 것인데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어도 왜 대머리가 되는 줄 아십니까?”
그랬더니 얼른 쳐다보는 거예요.
자기하고 관계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장 고개를 쳐드는 거예요.
ex)대머리가 될 때의 고민 :
대머리가 다 되어버린 후에야 고민하지 않지만 그러나 대머리가 시작될 때엔 보통 스트레스 받는 것이 아님.
대머리는 주로 20대때부터 시작함.
그러면 대머리를 막기 위해 중국제 대머리약도 발라보고 애기 오줌도 발라보고 별짓 다 해봄.
아마 이분도 그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그러니까 왜 예수 믿어도 대머리가 되느냔 말에 당장 고개를 들지요.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그 쎈 손으로 아침마다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시니까 머리가 홀랑 벗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손으로 매일 아침마다 쓰다듬어 주시니 어찌 안 벗어지겠습니까?”
그랬더니 마침내 이 양반이 “어허허”하고 웃어 버렸습니다.
인상쓰던 사람이 마침내 웃기 시작하니까 그 웃은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그 양반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고 설교 듣는 태도가 싹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설교가 다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그 양반이 제게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생 예수를 믿어오면서 오늘같이 큰 은혜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머리가 벗겨져서 거울을 볼 때마다 열을 받았는데, 이게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그 쎈손으로 쓰다듬어 주셨기 때문에 벗겨졌다니 이제는 거울을 볼 때마다 기왕에 벗겨진 것 더 벗겨져라, 더 벗겨져라, 더 벗겨져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 양반의 인상+기분이 확 달라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 양반의 머리에서 털이 나겠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대머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머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니까, 머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니까, 사람의 기분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인상+기분이 확 달라졌어요.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패러다임 쉬프트를 하면, 다시 말하면 세계관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면 평소에 기분 나쁘게 생각하던 것도 기분 좋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아주 성질나게 했던 것도 즐겁게 생각될 수 있어요.
패러다임을 언제나 하나님 편으로 바꾸어 보세요.
사람이 아주 달라지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부러 의도적으로 즐겁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유머를 적절히 쓰는 것도 좋습니다.
예컨대 피곤하고 따분해서 들어오는 남편에게 마누라가 “까꿍”하고 인사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들이 기쁘게 인사하고 식사전 조크타임을 갖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ex) 티코에 대한 조크 : 주행전의 점검 사항
① 앞바퀴 뒷바퀴를 조사해서 껌이 붙어 있으면 반드시 뗀다.
또 주차장 주위를 살핀다.
혹시 가래침이 있으면 반드시 청소하라.
왜? 티코 바퀴가 미끄러울 수 있으니까.
② 운전자 및 승차인의 핸드폰은 절대로 진동으로 맞추면 안됨.
핸드폰이 진동하면 티코가 흔들려 전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③ 주행중 창을 열고 손을 밖으로 뻗어서는 안된다.
그 팔이 날개 역할이 되어 티코가 뜰 위험이 있기 때문에
④ 운전자 및 승차인은 반드시 풍선껌을 씹니다.
만일 충돌하게 될 때에 훌륭한 에어백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유머어라도 하면서 인생을 게임+놀이 하는 것처럼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고 즐거움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이 패러다임도 바꿀 수 있고 즐겁게 하는 유모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날마다 솟아오르는 복락의 강수가 흘러 넘칠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즐겁게 삽시다.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3)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
이 역시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습니까?
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며 살 때 그것은 자꾸 하나님을 닮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나 자꾸 미워하고 싸우면 그것은 마귀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랑하며 삽시다.
왜 싸워요?
사랑하며 살아도 아쉽고 짧은 인생인데 왜 싸우냔 말이예요?
왜 부부간에 싸우고 형제간에 싸우고 성도끼리 싸우냔 말입니다.
제발 사랑하며 삽시다.
그래야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 사랑은 먼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관심 좀 갖고 삽시다.
② 존경(존중)하는 것입니다.⇒
소중히 여기라.
③ 그 다음엔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이해를 못하니까 자꾸 싸웁니다. 그 사람편에서 이해해 보세요. 이해하면 포용+용서+사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하며 삽시다.
④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서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⑤ 다음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받는 것도 사랑이지만 더 큰 사랑은 주는 거예요.
사랑을 주고 도와주고 수고해주고, 봉사해 주고 십자가를 져주고...
여러분! 이제부터 받지만 말고 줘보세요. 거기서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되는 겁니다.
일본 도쿄 올림픽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벗기려는데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가 살아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도마뱀이 못 박힌 벽에서 꼼짝도 못한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도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부들은 그 원인을 알기 위해 철거 공사를 중단하고 숨어서 사흘동안 못에 박혀 있는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에도 몇번씩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규칙적으로 시간을 맞추어서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도마뱀이 먹이를 먹을 때 얼마동안을 그 주위에서 춤을 추며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만 생기게 되었을까요?
오래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오던 도마뱀 동네에 신흥도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갑작스레 이주해 와 톱으로 나무를 베고 불도저로 땅을 밀고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며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 도마뱀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만 한 놈은 불행하게도 꼬리쪽에 못이 박히게 되었고 한 놈은 못이 박히진 않았지만 도망가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못 박힌 도마뱀을 먹여 살리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못 박힌 도마뱀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정녕 몸부림 칠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콕콕 찔러오는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렇게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도마뱀은 수일, 수주동안을 박힌 못에서 해방하기 위해 몸부림과 절규를 쳤을 것입니다.
도마뱀은 원래 사람이 꼬리를 잡으면 꼬리를 잘라버리고 도망을 가 버리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 도마뱀의 운명은 꼬리를 스스로 잘라 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나 봅니다.
그러니 이 도마뱀은 얼마나 한숨을 지었을까요?
참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날이 가면서 이 도마뱀은 자기 운명, 자기 형편을 체념 하였으리라 봅니다.
자기의 가련한 신세를 하나의 운명의 장난에 의한 숙명, 그 자체로 탓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훌륭한 것은 바로 곁에 있던 도마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도마뱀이 받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먹이를 물어다 주며 옆에 있어 주는 그 도마뱀! 먹을 것을 물어다 주면서 자기 삶을 이미 체념하고 포기해 있는 도마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넌 그래도 살아야 한다. 너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너에겐 희망이 있으니까”.
만약에 도마뱀간에 이런 의사소통이 있었다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이는 너무도 위대한 생명의 교훈이요 한편의 감동적인 설교이기도 합니다.
그때 못에 박혀 있는 도마뱀은 친구가 먹이를 물어다 줄 때, 그러면서 함께 자기와 놀아 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찮은 미물도 이렇게 더불어 살건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갑니까?
가정에서는 어떻게 살고 교회에서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제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더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4) 계속해서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피터 드래커가 쓴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40대 최고 경영자들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성공인이었는데 지금껏 이룬 성공의 자리를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피터 드래커는 그 이유를 성공관리, 혹은 자기 관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기 까지도 중요하지만 성공의 관리, 자기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를 살펴 보십시오.
좀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공관리+자기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대부분 모임+식사+골프+사우나 등, 접대나 인간관계를 갖는데만 신경을 씁니다.
계속해서 공부+연구하고 꾸준히 독서하는 것을 보기 힘듭니다.
배울려고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관리, 성공관리가 안되고 자꾸 삶의 진공상태, 공백상태를 느끼며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성공이 부도가 나게 되지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지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학교를 다니든지, 독서를 하든지, 대화를 통해서 배우든지, 심지어는 어떤 사건이나 고난을 통해서 배우든지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성공관리, 자기 자신의 관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배우며 사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배우며 사는 인생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갈수록 튼튼해지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을 경외하며 받는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감.
⇒ 파스칼은 이런 인간을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② 하나님을 탐구하며 사는 자 - 하나님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이 많음.
⇒ 파스칼은 이런 인간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사람 -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사랑 ⇒ 주신 사명대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은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고 그 분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은 여생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삽시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삽시다.
그리고 받은 사명대로 삽시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을 소유하며 사는 것입니다.
ex)소목사의 삶 : “나보다 행복한 사람, 나보다 아름다운 인생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런 자신이 생김.
여러분!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두 번다시 오지 않는 인생을 정말 멋지게 살고 싶습니까?
그럴려면 인생을 열심히 사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사십시오.
인생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인생을 배우며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받은 사명대로 사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워집니다.
참으로 멋지고 눈부신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