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교황권에 대한 유럽인들의 불만 표현은, 15세기 초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었다. → 16세기 말 드디어 교황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 나타났다. → 루터는 1517년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95개조 반박문.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는다!>으로 나타냄(비텐베르크 성 정문에 부착) → 루터의 종교개혁의 참뜻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회복’이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그리스도 보혈의 은혜로 받은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 루터의 주장은 중세 교황이나 가톨릭 교권이 부르짖는 ‘여러 형식적인 절차나 내용들’에 의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 이것은 중세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가톨릭 문화권에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교황과 교황의 권위에 굴복한 황제를 대신할, 새로운 권력을 희망하던‘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다. → 루터와 손을 잡은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和議)’를 통해, 교황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 프로테스탄트(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함 →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는 독일에 있어서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 회의를 말한다. 그 내용은 제후 및 제국 도시는 신구 신앙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가톨릭 제후가 루터 파로 개종할 때에는 그 지위와 영토를 상실하며, 루터파의 영토에는 가톨릭 교회의 사법권은 행사되지 못한다는 것 등이다. 이 화의는 루터파 신교의 공인을 의미하며, 제후에 의한 종교의 선택은 독일 영방 국가의 국가 종교 채택이라는 면에서 국가 종교의 시작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화의를 계기로 개인에 의한 종교 선택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루터파만의 공인은 결국 30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 종교개혁 이전 : 교황 > 성서(성경)
* 종교개혁 이후 : 교황 < 성서(성경)
*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루터파를 가리켰으나, 점차 루터파 뿐만 아니라 칼뱅파, 영국 국교회 등 다른 신교파도 모두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루터파 신교 |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 스웨덴 · 노르웨이 등지로 전파됨 |
칼뱅파 신교 | 프랑스 | 위그노 |
네덜란드 | 고이센 |
영국 | 청교도 |
스코틀랜드 | 장로파 |
*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 절대주의 국가에서, 왕권은 신(神. 하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 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 교황(敎皇. Pope) : 가톨릭교의 최고위 성직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전(全)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인 로마 대주교이다.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이자 로마의 주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