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홍언충의 「적중(謫中)」, ‘빈 방의 진실을 찾아가는 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도 유배객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은 원래 동생 홍언국의 딸(조카)이 매우 미치도록 아름다워 연산군이 강제로 입궁시키려 하자, 아버지 홍귀달과 동생 홍언국이 이를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연산군이 온 집안을 처벌하여 아버지는 유배 중 사사 당하고, 형제들은 거제도 등지로 유배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는 약 2년간 거제시 장평동에서 귀양살이를 했으며, 전해오는 거제유배문학은 약 60편에 이른다. 또한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현재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 이번 편에 소개하는 오언고시(五言古詩) 34(句) 「적중(謫中)」 ‘귀양 중에’는 갑자사화로 인해 바다 섬(거제도)으로 가혹한 유배를 떠난 작가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담은 작품이다. 본래부터 병약했던 홍언충은 사방이 고래 같은 거친 파도로 에워싸인 좁은 땅(거제도)에 갇혀 모진 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작품의 주요 내용을 보면, 자신이 처한 유배지를 좁고 외딴 땅으로 묘사하며, 거친 파도에 둘러싸인 그곳이 사실상 감옥의 형국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시들어버리는 물버들('포류')처럼 유배지에서 날로 병약해지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래서인지 저자 홍언충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깊은 소외감과 비장한 슬픔을 느꼈다. 또한 비록 육체와 정신은 괴롭고 옥죄여 있으나, 시를 짓고 글을 쓰는 행위(학문과 문학)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애썼다.
고로 그에게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유배체험은 결국 ‘빈 방의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었으며 또한 거제도 유배문학은 그가 걷는 그 길 위에서 쓴 순명(順命)과 내 ‘빈 방’의 진실이었다. 그의 아버지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호가 허백당(虛白堂)과 함허정(涵虛亭)인데 ‘虛白堂’은 텅 비어 있어서 흰빛(정명한 지혜)이 생겨나는 방'이라는 뜻이고 ‘涵虛亭’은 '맑은 물이 허공(하늘)을 비추어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자식들 또한 아버지의 가르침 그대로 모두 "마음속의 사사로운 욕망을 깨끗이 비워냄으로써 도달하는 맑고 지혜로운 정신 세계"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 [홍언충(洪彦忠)과 이행(李荇)의 거제유배작품에 담긴 의미의 비교 분석]
먼저 거제유배 동료였던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은 거제도에 있는 8개월 동안 쉼없이 시를 썼다. 그의 문집 『용재집(容齋集) 해도록(海島錄)』에 이때 지은 181제의 시가 실려 있다. 한 제목에 여러 수가 실려 있기도 하니 실은 거의 날마다 시를 쓴 것이다. 이행은 이들 시에서 유배생활의 외로움과 괴로움, 경관 등을 읊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미래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이에 비해 홍언충은 2년 동안 있으면서 60제 안팎, 110여 수의 시를 남겼다. ‘남쪽에 온 뒤로 시를 많이 지었다’라고 했지만, 기간에 비해서 작품 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시가 일실된 탓도 있겠고, 혹은 <진안도중음(眞安途中吟)>에 시사된 대로 유배생활 동안 남의 이목을 꺼려 시 짓는 일에 상대적으로 신중했을 수도 있다. 시 내용도 전반적으로 볼 때 바깥, 미래의 삶을 능동적으로 경영하거나 계획하기보다 내면, 현재의 삶을 다듬으며 순용(順容)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까닭인지 이행의 시에서는 살아있는 거제도, 생생한 유배체험이 감촉되는 데 비해 홍언충의 시에는 이런 점이 약하다. 그의 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조선전기 거제도의 구체적인 풍물, 현지인의 문화 수준과 내용, 유배객들의 입체적인 생활 모습 등을 읽기 원한다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홍언충 유배 한시의 한계라고 하면 부인하기는 어렵다. 홍언충의 유배체험‧유배한시는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이행 등 유배객들과 함께 일군 유배문화‧유배문학에 기여한 측면이다. 홍언충은 벗들과의 왕래, 놀이, 시 창작 및 품평을 통해 유배생활의 괴로움과 소외감을 위안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문학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기 계발의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다른 유배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더불어’ 이루어낸 문화적 성황(생활, 놀이, 문학)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들의 접촉이라는 점에서 볼 때 거제도는 훌륭한 교유의 장, 문화공간, 문화교섭 공간의 의미까지 획득한다. 조선시대 유배사, 언제 어느 곳에 이런 성사가 있었던가? 홍언충은 이 성사를 이룩하는 데 이행과 함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인물로서 충분히 평가될 가치가 있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학‧생애의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그는 시에 자신의 유배체험을 얼마나 진실하게 담아냈는가? 이 유배체험을 생의 자료로 삼아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내었는지? 그의 시에는 거제도에서의 생생한 체험이나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삶과 생각의 결을 자신의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는 급박하게 떠밀려 와서 줄곧 거제도 한 곳에 붙들려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처형되고 형제들이 함께 거제도에 유배된 극한의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또 이행 등과 어울리면서는 정서가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이행처럼 ‘유배의 땅을 즐거움의 땅으로 삼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처한 현실이 그만큼 강퍅한 탓이고, 근본적으로는 그가 순명(順命)과 내 ‘빈 방’의 진실을 발견하는 쪽으로 마음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당초 본고에서 구도한 세 차원의 표상은 순차적 변화 양상(감옥에서 문화공간으로, 문화공간에서 길로)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통틀어 볼 때 그 최종적인 의미는 ‘길’로서의 섬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감옥이든 문화공간이든 그 역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거제도 유배체험이 갖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는 ‘빈 방의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었으며, 그의 유배작품은 바로 그 길 위에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 [연산군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킨 유일한 사람]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선생은 드디어 방환되었으나, 선왕과의 위질위신(委質爲臣, 유교적 충성의 맹세)의 의리를 생각하여 중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읍취헌 박 공은 끝내 처형되어 죽었고, 허암 정 공은 방외에 노닐었으며, 용재 이 공은 성군을 만나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출처의 완전한 절개를 가지고 따진다면 논자들은 4분 중에 선생을 으뜸으로 꼽는다. 홍언충은 중종 원년(1506) 가을에 사면을 받았다. 그는 출발할 때 지은 시에서 다시는 도성 거리에서 말안장에 걸터앉을 마음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어 사가독서를 명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그는 2년 뒤인 중종 3년(1508)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찬묘명에서 소원한 대로 고향 무림 마을에 묻혔다. 홍언충이 중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은 병약함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어떤 임금이든 그 임금에게 신하의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러나 정작 좋은 임금을 만나서는 세상에 나가는 길을 접었다. 그는 폐조 연산군을 위해 끝까지 절개를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에 반해 이행은 해배 뒤 30여 년 간 조정에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다. 사림의 맹장으로 유배지에서 곤궁한 시간을 보냈기에 조정에 돌아온 이행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홍언충과 이행의 해배 후 행로는 대조적이다. 두 사람의 충절관(忠節觀)이나 출처관(出處觀)이 다른 까닭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각자 유배체험을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을 생의 어떠한 자료로 삼았는가? 이것이 두 사람의 행로를 달라진 이유였다. 요컨대, 홍언충에게 거제도 유배생활 동안 시 짓기는 곧 ‘빈 방의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었으며, 이것은 해배 후의 삶으로 분명한 결론이 지어졌다고 생각된다.
● 다음 ‘支’ 운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 34(句) 「적중(謫中)」 ‘귀양 중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우암고(寓菴稿)』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갑자사화(1504년) 당시 아버지 홍귀달의 사건과 연루되어 참혹한 국문을 당한 뒤, 영가(안동)에서 홀어머니와 생이별하고 거제도로 유배를 떠나온 시인의 절절한 효심과 절망감을 담은 오언고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집안에 닥친 참화에 대한 탄식, 그리고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을 생생하고 격정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적중(謫中)」** / 홍언충(洪彦忠 1473~1508)
母兮兒不寒 어머니시여, 이 자식은 춥지 않습니다.
母兮兒不飢 어머니시여, 이 자식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生子乃女慶 아들을 낳은 것은 본래 어머니의 경사이어늘
反爾遺汝悲 도리어 이처럼 어머니께 슬픔만 남겨드렸군요.
孰云積善家 선을 쌓은 집안(積善家)이라 누가 말했던가
無妄禍更奇 뜻밖의 재앙(무망의 화)이 이토록 기이할 줄이야.
三載痛荼毒 삼 년 동안 몹쓸 독형(고초)을 뼈저리게 겪었고
百口生瘡痍 온 집안 식구(백구)들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네.
安危或未料 집안의 안위조차 혹 헤아릴 수 없으니
甘旨詎可期 맛난 음식으로 봉양할 날을 어찌 기약하리오.
今春永嘉別 지난봄 영가(안동)에서 나누었던 이별은
天老亦應知 하늘(하늘의 신)도 응당 알고 계시리라.
母扶子未去 어머니는 붙드시고 자식은 떠나지 못하는데
簡書更催遲 관청의 공문(압송 명령)은 지체 말고 가라며 재촉하네.
忍愛棄如讎 사랑을 차마 끊고 원수처럼 버려둔 채 떠나오니
道路皆涕洟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 콧물 흘렸다네.
淸霜白晝下 맑은 서리가 한낮에 살벌하게 내리치니
碧草成黃萎 푸르던 풀들이 누렇게 시들어버렸구나.
一落彈丸地 탄환처럼 좁은 땅(彈丸地, 거제도)에 한번 떨어지니
鯨濤日渺瀰 고래 같은 거친 파도만 날마다 아득히 넘실거리네.
沈憂目月遷 깊은 시름 속에 세월(일월)은 흘러가고
秋風蒲柳衰 가을바람에 물버들(시인의 몸)은 쇠약해지네.
蒲柳何蕭蕭 물버들은 어찌 이리도 쓸쓸히 시들어가는가
亦恐傷葛藟 칡덩굴(남겨진 가족)마저 상할까 오직 두렵구나.
矯首望東北 머리 들어 동북쪽(고향과 한양)을 바라보니
白雲遮天涯 흰 구름만 하늘 끝을 가로막고 있네.
愁魂屢驚轉 시름겨운 넋은 자주 놀라 뒤척이고
正是嚙指時 지금이 바로 (어머니가)손가락을 깨물며 자식을 생각할 때(嚙指時)다.
海沙不足算 바다의 모래알도 다 셀 수가 없고
海波無定姿 바다의 파도는 정해진 모습이 없네.
匪兕我爲柙 들소(兕)도 아닌데(匪兕匪虎) 나는 우리(柙)에 갇혔고
匪虎我爲縻 호랑이도 아닌데 나는 밧줄(縻)에 매였구나.
天道或好還 천도(하늘의 이치)는 언젠가 반드시 되돌아오리니
慷慨歌此辭 북받치는 슬픔과 분노(慷慨)를 담아 이 노래를 부르노라.
[주1] 적선가(積善家) : 『주역(周易)』 문언전의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보답이 있다)"을 인용한 구절이다. 평생 올곧게 살아온 집안에 도리어 가혹한 화(갑자사화)가 미친 현실에 대한 강한 회의와 슬픔이 서려 있다.
[주2] 교지시(嚙指時) : 공자의 제자 증삼(증자)의 고사. 증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을 때 집에 갑작스러운 손님이 오자, 그의 어머니가 증삼을 부르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때 증삼이 멀리서 가슴이 아파 옴을 느끼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어머니와 자식 간의 지극한 텔레파시와 깊은 유대감을 뜻한다.
[주3] 비시비호(匪兕匪虎) : 『시경(詩經)』 소아(小雅) 하초투(何草不黃) 편의 "들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광야를 헤매는가(匪兕匪虎 率彼曠野)"를 변용한 구절이다. 자신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평범한 선비일 뿐인데, 마치 위험한 맹수를 가두듯 가혹하게 유배를 보낸 조정을 원망하는 은유다.
○ 내용인즉, 이 시는 유배지에서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향해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간 사모곡(思母曲)이다. 도입부인 "어머니시여, 자식은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습니다"라는 반어적 위로는 오히려 듣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유배지로 압송되던 봄날, 공문에 쫓겨 어머니를 길바닥에 원수처럼 떼어놓고 돌아서야 했던 이별의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병약한 신체를 '포류(蒲柳, 물버들)'에 비유하며, 자신이 쓰러짐으로써 고향에 남은 가족들(갈류)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전전긍긍하는 유배객의 심리적 압박감이 잘 묘사되어 있다. 덧붙여 그는 자기 사는 곳을 ‘彈丸地’라고 표현하며 감옥이라 여겼다. ‘蒲柳’는 물버들인데 가을이 가까워지면 잎이 시든다. 허약한 신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실제 홍언충은 본래 병약한 체질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의 시름을 더 심각하게 부추기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바다 모래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바다 파도는 일정한 모습이 없네.”라는 것은 객관적 풍경이면서, 그가 맞닥뜨린 또는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 상황의 종합적 투영이다. 그의 시에는 ‘匪兕匪虎․南冠․南囚․楚囚’와 같은 시어들이 종종 보인다. 이는 죄수 특히 남쪽에 유배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것은 일반 시어로 투입되기보다 일종의 주제의식의 차원으로 존립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것은 단절의 심상들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마지막에는 비록 맹수처럼 묶여 섬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정의가 회복될 것이라는 천도호환(天道好還)의 믿음을 붙잡으며 비장하게 시를 마무리하였다. 이 시는 홍언충의 다른 유배시들에 비해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비장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