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고모
1992년도11월에 미국에 사는 너의 고모가 미소야에 우리를 보러 왔었다. 여기서 너의 고모에 대해 좀 짚고넘어 가야겠다. 너의 고모는 내가 중국에 있을 때 펜팔로 만나서 활발하게 교제했던 분이다. 너의 고모와는 편지거래를 정말 많이 했다. 미얀마와 태국에 살 때도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동안 너 고모의 성원과 관심과 격려는 나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다.
나는 미소야 사람들에게 너 고모를 미국에 사는 나의 여동생이라고 선포 했다. 그랬더니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오누이가 많이 닮았다고 했다. 너 고모는 모델 제안도 받았던 미인인데 내가 어떻게 닮을 수 있겠니. 그건 착시 현상이었다. 아무튼 나의 연출은 성공이었다.
나는 너 고모를 데리고 인사차 교장선생 댁을 찾았다. 가기 전에 나는 너 고모에게
니하오你好,
짜이지엔再见,
쎄쎄谢谢란 인사말을 배워 줬다. 니하오는 안녕하세요란 말이니 만났을 때 써먹을 수 있고 짜이젠은 다시만나요니 헤어질 때 써 먹을 수 있고.
쎄쎄는 고맙다는 것이니 수시로 써 먹을 수 있었다.
너 고모는 이 세 마디 밖에 할 줄 모르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너 고모를 대신하여 그들로 하여금 완벽하게 믿도록 설명을 했다.
갈 때 소정의 선물도 챙겨 갔다. 교장선생 내외는 매우 만족하며 기뻐 했다.
우리는 너 고모를 모시고 산기슭의 못과 동굴, 연못 등 마을의 명승지를 구경시켰다. 너 고모는 겨울철에 여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해 하며 애들처럼 기뻐 했다. 그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많다, 그 사진들은 네가 온전하게 보존하하고 있다. 그것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너 고모는 한국인 가이드가 모시고 왔고 한국에 입국할 때도 그 가이드와 함께 했다. 너 고모는 워낙 순진한 사람이라 남을 잘 믿었다, 가이드는 너 고모와 내가
보통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이용했다.
- 당신의 오빠 일가족을 내가 얼마든지 귀국시킬 수 있어요. 문제는 거액의 돈이 필요하다구요. 내가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내 말만 들어 주면 당신의 오빠 일가족은 꼭 귀국할 수 있습니다.
* 만약 제 오빠 가족만 귀국시킬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떤 희생도 각오 할게요.
- 당연한 얘기죠. 좋아요.
가이드는 너 고모에게 마약운반 을 종용했다.
이건 범죄행위로서 발각되면 영락없는 철창행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을 구하고자 하는 그 일념이 너 고모로 하여금 그 어떤 위험부담도 감내케 했다. 너 고모는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헬로인을 음부 깊숙히 넣고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귀국해서 너 고모가 우리집에 왔을 때 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너 고모가 도중에서 잘못되면 자기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태국 귀신이 됐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중국에서는 탈북자를 귀국시키는 브로커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한 명을 귀국시키는데 가격도 정해져 있다고 한다. 당장 현금이 없으면 귀국시킨 후 정착금
에서 받는다고 했다. 이건 돈벌이니까 모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너 고모는 내게서 바라거나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기의 인생을 걸고 우리에게 헌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 고모를 바보천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 대47가도, 의미도 없는 일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댔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 고모가 내게는 더 고상한 존재로 다가 온다.
너 고모의 그런 순수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귀국도 가능했던 것 아니겠니.
너 고모와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그러나 마음이 끊긴건 아니다. 언젠가는 재회할 날이 꼭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