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채를 손에 쥔채 쪼그리고 앉아 어항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 구피가 출산을 시작했다. 관상용 열대어인 구피는 모체에서 수정된 알이 태내에서 그대로 부화하여 새끼로 태어난다. 어류치고 오색영롱한 화려한 색깔을 가졌다. 성질이 온순하여 키우기는 수월할뿐더러 다산의 능력을 자랑한다. 저출산 시대에 본받을 일인가 싶어 남매를 둔 나로서는 녀석이 은근히 부러울 때가 있다.
결실의 가을에도 조락이 있듯,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생과 사도 그렇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주어진 시련은 가혹했다. 동반자를 잃은 상실감에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다. 이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언니는 어느 날 구피를 키워보라며 떠안겼다. 구피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녀석들이다. 그날부터 구피와의 사귐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키우는 법을 익혔다. 어항 앞에 턱을 괴고 앉아있는 시간도 늘어갔다. 구피가 화려한 색깔의 지느러미로 유영하는 모습은 마치 무희가 무대에서 현란한 춤을 추는 듯했다. 무아지경에 뻐져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의 외로움은 서서히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물고기 세계에도 질서가 있다. 한 물고기만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사랑을 구하는 순정이 있다. 주체하지 못해 설쳐대는 젊음이 있는가 하면 둔해진 몸으로 무리에서 뒤처지는 외로움도 있다. 우리네 인생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생명을 탄생시키는 산고의 고통은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유리 벽에다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꼬리를 심하게 흔들기도 한다. 첫 아이를 낳을 때 심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지켜보며 애간장을 태웠을 어머니가 생각난다. 구피는 한 번에 치어들을 스무 마리에서 서른 마리 남짓 낳는다. 산통은 예닐곱 시간쯤 걸린다. 그 많은, 새끼들을 낳고 나면 풍선같이 부풀었던 몸이 멸치처럼 야위어버린다. 있는 기력을 소진하고 어항 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안쓰러운 마음에 미역국이라도 끓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구피의 출산에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치어들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어미 꽁무니에서 새끼들이 고물고물 나오면 얼른 뜰채로 건져내 분리해주어야만 한다. 큰 놈들의 습격이 번개 스치듯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치어들을 모조리 삼켜버린다. 그들만의 생존 법칙이라며 무관심하면 좋으련만 이를 두고 보지 못하는 내 성미다. 내 손놀림에 따라 수십 마리의 생명이 오락가락하니 어항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구피를 보면서 겉모습이 아름답다고 막연히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간혹 신문이나 TV에서 보기도 한다. 자기가 낳은 생명을 해했다는 보도를 가끔 접하고 그 비정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치어들의 재롱에 넋을 놓고 있다. 몇 개월 전 태어난 예쁜 손녀를 보는 듯, 구피 사랑에 어항 앞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네 부모들도 자식을 기를 때는 그랬다. 하루의 고단함도 자식들의 재롱에 힘든 줄 몰랐다. 가진 재산이 없어 느지막이 허접스러운 대우를 받아도 부모는 자식의 얼굴에서 무지개를 보고 싶어 한다. 나 역시 그렇다. 대물림 되어진 아들의 그림 재능이 아름다운 색채와 창의적인 선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이다. 서로를 아끼는 애틋한 마음, 그 마음이 싫증 나지 않고 은은히 비치는 천륜의 색이다.
다른 구피들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 산고의 아우성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뜰채를 손에 든 나는 구피 출산 도우미가 되어 어항 안을 주시한다.
첫댓글 구피! 저도 옛날에 많이 키워봤답니다. 조그만 것이 저들 나름대로 질서도 있고 또 강한놈은 약한놈을 괴롭히기도 하지요.
물고기의 세상에도 강, 약의 부조리가 있는지라 생명체라는 것은 참으로 요지경 같아 재미있답니다. 다음엔 '엔젤'을 한번 키워보시면 또 다른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류도 좋답니다. 최 작가님, 건강하십시요.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