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리는 스물예닐곱쯤 돼 보이는 여자였다. 향기(香).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녀의 본명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가오리를 만난 건 'K 요리사 서비스'라는 업체를 통해서였다. 요즘에는 하루가 다르게 별의별 서비스 직종이 생기곤 하는 모양이다. 전화 한 통이면 원하는 요리 재료를 든 요리사가 직접 집을 방문한다. 물론 요리사는 모두 젊은 여자들이다. 가명이 필요한 직업이긴 할 것이다.
누가 창안해냈는지 모르겠지만 퍽 괜찮은 서비스 직종이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것에 지친, 그러나 딱히 다른 상대가 없는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말이다. 게다가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요리가 끝나면 요리사는 손님과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을 먹는다. 단, 매춘은 하지 않는다.
뜨거운 해물탕이 먹고 싶었던 그는 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 온 요리사가 가오리라는 여자였다. 벨소리가 나기도 전에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장바구니 가득 새우며 조개, 낙지 따위를 든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약간 맵게 끓인 듯한 해물탕을 가오리와 나눠 먹었다. 설거지까지 끝낸 가오리는 정확히 세 시간 뒤에 돌아갔다. (조경란 소설집 『코끼리를 찾아서』 230~231쪽, 「나는 마을의 이발사」에서)
가오리, 노가리, 고도리.
다소 천박하게 들리는 이 세 단어들의 공통점은 다만 '리'자로 끝난다는 사실뿐만은 아니다. 가오리, 노가리(명태의 새끼), 고도리(고등어의 새끼)는 모두 바다에서 나는 생선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한묶음이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출장 요리사 가오리가 고객인 그를 위해 맛나게 끓여 내놓은 음식이 해물탕이었던 게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다. 해물탕을 요리하기 위해서 가오리는 장바구니에 조개와 낙지 따위를 들고 왔다고 하는데, 그 '따위'에는 새우나 미더덕 또는 꽃게가 포함되어 있었을지언정 가오리나 노가리, 그리고 고도리는 분명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위 인용글에서 '가오리'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그와 더불어 노가리, 고도리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 한때 유행했던 '못난이 삼형제' 인형세트처럼 내게 있어 이 세 단어들은 항상 함께 붙어다닌다.
그런데 바닷속을 누비는 이 세 단어들은 뭍으로 올라와서는 실제 지명으로도 쓰인다는 점에서도 한묶음이다. 물론 이때 이 단어들은 가오리(加五里), 노가리(盧佳里), 고도리(古道里)처럼 제법 운치있는 한자어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이 단어들을 발음할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천박함과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가릴 수는 없다. 가오리에 사는 사람들은 어쩐지 모두 색(色)을 밝힐 것 같고(왜 그런가는, 80년대에 유행했던 음담패설 '앗싸, 가오리'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노가리에는 수다쟁이에 거짓말쟁이들만 모여 살고 있을 것 같으며, 고도리의 주민들은 눈이 씨뻘개지도록 허구한 날 화투패만 작살내고 있을 것만 같다. 가오리, 노가리, 고도리는 한자어의 뜻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마을 이름으로는 낙제점이다.
그렇다면 일본어로는 어떨까? 위 인용글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가오리는 일본어로 '향기(香)'라는 뜻이다. 우리말 가오리에서 느껴지는 색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제법 잘 나가는 일본 작가의 이름에서도 발견될 정도이니 가오리는 품격 있는 요리사 이름으로도 어울릴 만하다. 네이버로 검색해 보니, 고도리는 '새 다섯 마리(五鳥)'라고 하는데, 이건 화투의 고스톱 게임에서 점수가 제법 높은 '고도리' 패 세 장에 그려져 있는 새가 모두 합쳐서 다섯 마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의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새들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성공한 셈인가. 하지만 그 새들도 결국은 노름꾼의 손이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더러는 고도리를 잡는 낙에만 푹 빠져서 자신의 삶마저도 그 그물 속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으니, 일본어 고도리는 경계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어로 노가리는? 그건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웃기면서도 슬픈 이 단편 소설에는 그 제목과는 달리 이발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오리'라는 좀 웃긴 이름의 요리사 여자와 그저 '나'와 '그'로만 지칭되는 백수건달 두 남자가 나올 뿐이다. 이름 없는 그 두 남자에게 '노가리'와 '고도리'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어떨까. 물론 '노가리'라는 이름은 살아 남아서 자살한 남자를 추억하는 남자, 맥주를 즐겨 마시는 그 남자에게 더 잘 어울리겠지. '고도리'는 끝내 점수를 내지 못한 채 자신이 꿈꾸던 조용한 세상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가 음식과 섹스를 함께 나눴던 가오리와 그가 함께 술을 마셨던 노가리의 기억 속에서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첫댓글 조경란이 이런 소설도 썼군요.
한번 시간내서 읽어보겠습니다.
작가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세상 사람들에게 새 공기를 불어 넣어 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오리, 노가리, 고도리.
세 어원도 은이후니 님 덕분에 살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네. 다른 소설들도 꽤 재미난 작품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