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입문 하권
제3. 색문色門 부정관문不淨觀門이라고도 한다(亦名不淨觀門)
제21장 구상九想
구상九想이란
첫째 창상脹想, 둘째 괴상壞想, 셋째 혈도상血塗想, 넷째 농란상膿爛想, 다섯째 청어상靑瘀想, 여섯째 담상噉想, 일곱째 산상散想, 여덟째 골상骨想, 아홉째 소상燒想을 말한다. 이 구상을 닦으면 음욕淫慾을 타파할 수 있다.
구상을 닦기 전에 먼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을 관찰한다. 그 사람은 애처롭고 간절하게 말하다가 한번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대가 흩어지고 육식이 끊어진다. 그러면 가족들이 놀라고 서러워하며 쫓아가 돌아오게 하려 하지만 방도가 없다. 그때 “조금 전에 말하던 사람은 갑자기 어디로 갔는가? 생명이 있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니, 어찌 나만 홀로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죽는 모습을 상상한다. 일심의 삼매로 죽은 시체를 관찰하면 마음에 심히 놀라움과 두려움이 생겨 애착심을 타파할 수 있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마음에 떠올리기만 해도 구상 등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근기가 둔한 사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성취하지 못하니, 반드시 직접 죽은 시체를 보아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
첫째 창상脹想이다. 수행자는 죽은 시신이 마치 바람을 잔뜩 불어 넣은 가죽 주머니처럼 팽팽하게 불어나서 본래의 모습과 달라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몸이 살아 있을 때는 자태와 용모가 곱고 아름다우며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사람들이 한 번만 보고도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지금은 이렇게 부풀어 올라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으니, 그 좋던 것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옮겨 놓고 살펴보면 애착할 만한 곳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을 면할 수 없다.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사대는 자성이 없고 오음은 모두 헛된 법으로서, 허망한 식에 이끌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업을 따라왔다가 연이 다하면 흩어지니, 지금 이 한 덩어리의 찬 고깃덩이는 나무나 돌과 다를 게 없고, 하나의 이 가죽 주머니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다. 내가 어찌 탐하고 애착해 온갖 악업을 짓겠는가?”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세간의 탐욕과 애착을 제거할 수 있다.
둘째 괴상壞想이다. 수행자는 다시 죽은 시신이 바람에 불리고 햇볕에 쬐여 갈가리 찢긴 채 땅바닥에 놓여 있고, 썩은 물이 넘쳐흘러 악취가 진동함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또한 이와 같이 똥주머니요 냄새나는 자루인데 얇은 가죽으로 겉을 싼 것일 뿐이다. 지금 이런 모습은 본래 스스로 이러한 법이니, 내가 애착하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또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된다.
셋째 혈도만상血塗漫想이다. 시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나면 곳곳에서 고름과 피가 넘쳐흐르며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깨끗한 곳이 없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하게 부풀어 올라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친근하게 애착하던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또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넷째 농란상膿爛想이다. 시일이 점차 지남에 따라 (시신의) 아홉 구멍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고 구더기들이 온몸을 뒤덮으며, 썩은 물이 뚝뚝 땅에 떨어지고 악취는 더욱 심해진다.
“아름답던 용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몸이나 그대의 몸은 모두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다섯째 청어상靑瘀想이다. (시신에) 황적색의 어혈이 지고 혹은 검푸르게 변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 놀랍고 두려우며 냄새를 맡으면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두 뺨에 빛나던 아름다움과 얼굴의 광택은 잠깐 피었다가 지는 봄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너의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어찌 어리석게도 저런 색에 속아 미혹했을까? 너의 몸과 내 몸은 모두 이런 법이었구나.”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여섯째 담상噉想이다. (시신을) 새와 짐승이 뜯어 먹거나 구더기가 갉아 먹어 문드러지니 피부와 살이 벗겨지고 뼈마디는 산산이 흩어진다.
“지난날에는 화려한 화장과 산뜻한 장식으로 위의가 단아했는데, 지금 보니 거짓으로 겉만 꾸며 자태를 헛되이 과장한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 애착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이 그 사랑하던 사람과 자기 자신을 생각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일곱째 산상散想이다. 세월이 점차 오래 지남에 따라 시신의 형체가 부서져 흩어지니, 힘줄은 끊어지고 뼈는 분리되며 또한 머리와 발이 서로 뒤엉킨다.
“내가 애착하던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내 몸을 생각해 보아도 어찌 또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여덟째 골상骨想이다. 피부와 살은 이미 다 없어지고 백골만이 보이는데, 혹은 기름과 피로 더럽혀져 있거나 혹은 흰 마노나 조가비처럼 하얗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해 서로 닿으면 즐거웠는데, 지금 이 해골을 보니 기와나 돌과 다를 것이 없다. 보면 두렵고 닿으면 섬뜩하니 네 뼈의 모습이 본래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어찌 이다지도 우매해 탐닉하고 또 탐닉하며 버리지 못하였던가. 스스로 내 몸을 생각해 보아도 또한 이러한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아홉째 소상燒想이다. 시신은 불에 태워지거나 매장된다. 불에 태워질 때는 나무가 모두 타서 불이 꺼지면 형체가 재나 흙과 같아지고, 매장하면 살이 썩고 뼈가 녹아서 마침내 닳아 없어져 버린다.
“너는 평소에 목욕하고 향수를 뿌리며 꽃가루로 곱게 단장하였고, 보드랍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좌우를 돌아보며 아첨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으니 마침내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나와 너는 모두 이런 법이니 본래 이 몸은 없는 것이요, 필경에도 이 몸은 없는 것이다. 그 동안의 헛된 속임수는 모두 망령된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은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사람이 막 죽으려 할 때를 관찰해 보면 동작과 언어가 잠깐 사이에 갑자기 사라지며 무너지고 흩어져 제각기 변해 버리니 이것이 곧 무상이다. 만일 이 몸에 집착한다면 무상하게 무너질 때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만일 무상함을 알고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곧 ‘내가 아님(非我)’을 관찰해야 한다. 몸이 더럽다는 것을 알고, 몸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몸이 괴로움이란 것을 알고, 몸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곧 세간의 어떤 법도 즐거워하거나 집착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음식이 입안에 있으면 뇌에 있는 점액이 아래로 흘러 침과 화합해 맛을 내고 목구멍으로 삼키지만, 배에 들어가면 곧 똥이 되니 이 음식은 더러운 것이다. 몸 또한 무상하여 찰나찰나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즐거움을 혐오하고 번뇌는 끊어야 할 것임을 알아 마음에 안온한 적정을 얻고 마음을 오로지해 도에 들어간다.
제22장 팔념八念
팔념八念이란
첫째 염불念佛, 둘째 염법念法, 셋째 염승念僧, 넷째 염계念戒, 다섯째 염사念捨, 여섯째 염천念天, 일곱째 염입출식念入出息, 여덟째 염사念死이다.
염念이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반연하는 가운데 생각하면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수행자가 구상을 수행하여 바깥 사물의 더러움을 알고서 그 몸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면 곧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더러운 똥오줌으로 가득 찬 냄새나는 가죽주머니를 가지고 스스로 쫓아다니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 깜짝 놀라고 두려워 온몸의 털이 곤두서거나 또는 악마가 찾아와 공포를 일으켜 도를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그럴 땐 팔념을 수행하여 두려움을 제거해야만 한다.
염불念佛을 설명하겠다.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삼십이상三十二相ㆍ팔십종호八十種好ㆍ대자대비大慈大悲ㆍ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ㆍ지혜 광명과 무량한 신통을 갖추시고 시방의 일체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이 바로 나의 큰 스승이시다. 이런 분이 나를 보호하고 염려해 주시는데 내가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법念法을 설명하겠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불법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서 사람들이 모든 뜨거운 번뇌를 제거하고 좋은 곳에 이르게 한다. 내가 이런 법을 닦고 있는데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승念僧을 설명하겠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성문승聲聞僧ㆍ벽지불승辟支佛僧ㆍ보살승菩薩僧, 이와 같은 삼승의 성자들은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로서 신통과 지혜가 한량없고, 고난을 구원하며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는 분들이다. 이들이 나의 참다운 벗들인데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계念戒를 설명하겠다.
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율의계律儀戒요, 다른 하나는 정공계定共戒이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계율을 지켜 선은 보호하고 악은 방지하고 있다. 나는 선정을 닦고 있으니 분명 평안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사念捨를 설명하겠다. 사捨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시를 베푸는 것이요, 또 하나는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항상 재물과 법을 베풀고 모든 번뇌를 버린다. 이러한 공덕이 있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천念天을 설명하겠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저 천신들은 모두 옛날에 계를 닦고 보시를 베풀어 선근을 잘 길렀기 때문에 지금 쾌락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항상 계를 닦고 보시를 행하여 널리 복의 밭을 가꾸고 있으니 나중에 분명 저 천계에 태어날 것이다.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
염아나파나念阿那波那를 설명하겠다. 십육특승법에 의거하여 오롯한 마음으로 (호흡을) 세고 따르면 육식六識이 근根으로 돌아와 바깥 경계를 반연하지 않으므로 공포가 저절로 사라진다.
염사念死를 설명하겠다.
“죽음에는 자연히 죽는 경우가 있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죽는 법은 항상 이 몸을 따라다니니, 다른 사람이 죽이지 않는다면 분명 자연히 죽을 것이다. 조만간에 반드시 죽을 몸인데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이와 같이 마음을 편안히 하여 일심으로 죽음을 되새기면 공포가 저절로 사라진다. 또한 팔념을 잘 닦으면 차례대로 수행하여 도에 들어갈 수도 있고, 하나하나의 염으로써 각기 도에 들어갈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차례대로 수행하는 것인가? 수행자가 번뇌의 병에서 해탈하고자 하면 먼저 부처님은 뛰어난 의사와 같음을 생각하고, 법은 좋은 약과 같음을 생각하고, 스님들은 환자를 돌보는 사람과 같음을 생각하고, 계는 음식을 가리고 삼가는 것과 같음을 생각하고, 버림은 보양하는 것과 같음을 생각하고, 하늘은 몸의 병에 차도가 있는 것과 같음을 생각해야 한다. 아나파나를 생각해 선정을 일으키고, 죽음을 생각하면 무상과 사제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잘 생각하여 삼계의 병이 다 없어지면 곧 성스러운 도를 얻게 된다.
하나하나의 염으로써 각기 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컨대 염불은 곧 염불삼매로 도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염법에서는 사제ㆍ십이인연ㆍ육바라밀ㆍ중도실상 등이 모두 도에 들어가는 법이다. 나머지 여섯 가지도 이것을 예로 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3장 십상十想
십상十想이란
첫째 무상상無常想, 둘째 고상苦想, 셋째 무아상無我想, 넷째 식부정상食不淨想, 다섯째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 여섯째 사상死想, 일곱째 부정상不淨想, 여덟째 단상斷想, 아홉째 이상離想, 열째 진상盡想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법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견도見道, 둘째는 수도修道, 셋째는 무학도無學道이다.
괴법壞法을 닦는 사람은 간혜지乾慧地에서 구상九想을 갖춰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고 나서는 무상ㆍ고ㆍ무아 등의 세 가지를 생각하는 관을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육십이견六十二見의 전도된 법을 타파하고 견도에 들어가 초과初果(수다원과)를 얻는다.
수다원須阤洹이나 사다함斯陁含은 식부정상食不淨想ㆍ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ㆍ사상死想ㆍ 부정상不淨想 등의 네 가지 생각을 닦음으로써 사유에 의한 미혹을 끊고 수도에 들어가서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한다.
아나함阿那含은 단상ㆍ이상ㆍ진상 등의 세 가지 생각을 닦아 색계와 무색계의 애착을 끊고 벗어나 무학도에 들어가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다.
첫째는 무상상無常想이다. 일체의 유위법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고 소멸하는데 이것은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또한 증가하거나 누적되지도 않는다. 생겨날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는 가는 곳이 없다.그러므로 무상이라 한다.
모든 중생은 가라라歌羅邏 때부터 몸과 마음이 생멸하고 변화해 늙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정지하는 순간이 없다.무엇 때문인가?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생겨나 머물다가 변하여 소멸하는 네 가지 모습을 따라 변천하기 때문이다. 생겨났다 싶으면 이내 그 생겨난 모양이 달라지고, 머물러 있다 싶으면 이내 그 머물러 있는 모양이 달라지며, 소멸하는가 싶으면 이내 그 소멸의 상태가 달라진다. 이와 같이 변하고 바뀌며 잠시도 머물러 쉼이 없으니, 이것이 곧 중생의 무상함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대지와 초목 모두 닳아 없어지고 수미산 무너지고 큰 바다 또한 말라 버리며 모든 천신 머무는 곳 모두 불타 사라지는 이럴 때 세계의 어느 곳이 영원한가.
이것이 바로 세계의 무상함이다.
수행자는 생겨날 때 머묾과 소멸이 없고 또한 생겨남을 떠나서도 머묾과 소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생겨날 때 이미 머묾과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생겨남이라는 모습이 허물어진다. 또 만일 생겨남을 떠나서 머묾과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세 가지 모습이 모두 허물어진다. 따라서 생겨남을 떠나면 소멸될 것도 없어서 네 가지 모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네 가지 모습이 없다면 무상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만일 무상을 얻을 수 없다면 곧 성스러운 도를 볼 수 있다.이것이 바로 무상상을 닦는 것이다.
둘째는 고상苦想이다. 무상하게 변천하는 일체법을 관찰해 보면 바로 고통의 모습이다. 왜 그런가? 안의 육정六情(六根)과 밖의 육진六塵이 화합하여육식六識이 생기며,
육식에서 세 가지 느낌이 생긴다. 첫째는 괴로운 느낌(苦受)이고, 둘째는 즐거운 느낌(樂受)이며,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捨受)이다.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서 생ㆍ노ㆍ병ㆍ사ㆍ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ㆍ 구해도 얻지 못함ㆍ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ㆍ
오음의 치성함 등 여덟 가지 괴로움에 핍박당하므로 괴로운 느낌이라 한다. 감정에 거슬리는 모든 일을 괴로움이라 하고, 감정에 순응하는 모든 일을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탐욕과 집착을 일으키면 그 대상이 무상하게 무너질 때 현세에서 많은 괴로움을 받고, 후세에서는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로써 즐거움 역시 괴로움임을 알 수 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란 비록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지만 이치에 있어서 무상하게 변천하며 핍박하니, 이것 또한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삼계 가운데에서 즐거워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어 탐욕과 집착을 내지 않고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이것을 고상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무아상無我想이다. 유위법을 관찰해 보면 모두 괴로운 모습이니, 오음이 모두 괴로움인 것과 같다. 괴롭다면 자재하지 못한 것이며, 자재하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음ㆍ십이입ㆍ십팔계의 모든 법은 모두 인연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으므로 그 법 가운데서는 나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또한 그 법들을 여의고 나를 찾아본다고 해도 더더욱 찾을 수 없다. 그 법에서도 그 법을 떠나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일체의 모든 소견과 집착을 버린다. 그리하여 마음에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면 곧 해탈을 얻는다.이것을 무아상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세 가지 상想은 아래에서 설명되는 고제苦諦를 참고하라.]
대개 무상이면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이면 곧 자아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무상함을 알면 삼계의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으며, 삼계의 괴로움과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면 세간을 버리는 것이다. 또한 무상상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생기고,
고상을 닦으면 두려움이 생기며, 무아상을 닦으면 해탈을 얻게 된다.
넷째는 식부정상食不淨想이다. 수행자가 비록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알았더라도 음식에 대해 여전히 탐욕과 집착을 금할 수 없다면 이 식부정상을 닦아 대치해야 한다.
이 음식을 잘 생각해 보면 모두 더러운 인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를 들어 고기는 고름과 벌레가 우글대는 곳이고, 젖은 피가 변해서 된 것이다. 그것들의 시작은 더러운 것에서 생기는 것이고, 그 결말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밥은 흰 벌레와 마찬가지고 국은 똥물과도 같다.
또한 음식이 만들어질 때는 요리사가 만져 때와 땀이 묻었고, 입으로 들어가면 뇌에서 수액이 흘러내려 화합하여 맛을 내는데 그 모양은 토해 놓은 것과 같다.
배 속에 들어가서 창자를 채우면 지대로 인해 유지되고, 수대로 인해 적셔지며, 풍대로 인해 움직이고, 화대로 인해 지져지니, 마치 가마솥에서 음식물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러고 나면 맑은 것은 오줌이 되고 탁한 것은 똥이 된다. 허리에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 고름과 즙을 백 개의 맥으로 흩어지게 하면 피와 화합하여 엉겨서는 살로 변하고, 새살에서는 기름이 나온다.
이러한 인연으로 신근身根이 생기고, 신근으로부터 오정근五情根이 생기며, 오근으로부터 오식이 생기고, 차례로 의식이 생겨 모양을 분별해 취하고는 아름답고 추함 등을 마음대로 헤아린다.
그런 뒤에는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의 온갖 번뇌를 일으키며 이 번뇌로 말미암아 모든 악업을 짓는다.
음식의 본말 인연이 이처럼 갖가지로 더러운 것임을 관찰하면, 안의 사대와 밖의 사대가 다르지 않은데 단지 아견의 힘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 헤아렸던 것임을 알게 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이 음식이 바른 직업으로 벌어서 공양한 것인지 삿된 직업으로 벌어서 공양한 것인지도 생각해야 하며, 이 음식을만든 사람의 수고와 온 곳의 옳고 그름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음식이 된 생명체가 사로잡힐 때 두려움과 죽음을 당할 때의 원통함과 고통도 생각해야 하며, 이 음식이 배 속에 들어가면 이로울까 해로울까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이것을 탐내고 집착하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 가운데 떨어져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거나 더러운 똥을 먹어야 하리라.”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면 싫어하는 생각이 자연히 생겨서 음식을 혐오하게 되므로 오욕도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식부정상을 닦는 것이다.
다섯째는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이다. 수행자가 만약 세간의 색욕, 기름진 음식, 권속, 친구와 무리, 집과 토지, 사업 등을 떠올리며 좋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면 나쁜 생각(惡覺)이 그치지 않아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된다. 따라서 “중생치고 여덟 가지 괴로움의 걱정을 면하는 자가 없다. 어찌 탐내고 집착할 수 있겠는가.”라고 관찰한다.
또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중생들은 탐욕이 많기 때문에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리지 못하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알지 못한다. 성냄이 심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악도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리석음이 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구한다. 혹은 높고 낮음도 알지 못하고, 혹은 은혜와 의리도 알지 못하며, 혹은 인색하고 욕심 많고 교만하며 질투하고 사납다. 아첨하고 속이고 헐뜯고 해치며 사견을 가지고 바른 길을 믿지 않는다.
죄업이 많기 때문에 오역죄를 짓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으며 착한 사람을 경멸한다. 대부분 세간 중생들은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이 많으며, 세간의 국토 또한 괴로운 곳은 많고 즐거운 곳은 적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많고 복을 닦는 사람은 적으며, 허물을 늘리는 곳은 많고 복을 더하는 곳은 드물다. 또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고 질병과 고통이 이어지며, 나쁜 경우가 날로 닥치고 나쁜 것이 항상 틈을 엿보는 등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욕계를 깊이 살펴보면 나쁜 일이 이와 같아 즐거워할 곳이 없다. 나아가 색계와 무색계도 비록 이보다 낫기는 하지만 과보가 다해 사대가 제각기 흩어질 때면 근심과 고통이 역시 심하니, 이것 역시 생사의 윤회일 뿐 해탈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 편안함이 없으며 온갖 괴로움들로 가득하니 매우 무섭고 두렵다’고 하였다.”
만약 항상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싫어해 벗어나려는 마음이 깊이 일어나 애착하는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이것이 세간불가락상을 닦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상死想이다. 수행자는 도를 닦다가 게으른 마음이 생겨 번뇌를 끊을 수 없을 땐 이 몸은 죽어 없어진다는 생각을 닦아야 하니, 사람의 목숨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자 어떤 이는 “한 해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한 달입니다.” “하루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나아가 어떤 이는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모두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어떤 비구가 “저는 숨을 내쉴 때 들이쉴 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매우 훌륭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참으로 사상을 닦는 것이며, 참으로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사상을 닦을 줄 안다면, 마땅히 알라, 이런 사람은 게으름의 적을 무찌르고 일체의 선법이 항상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이것을 사상을 닦는 것이라 한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안다면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저절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구차한 생각도 없어지며 오직 이치에 따를 뿐이다. 또한 무상함은 너무나 빨라서 이와 같이 보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공부를 잠시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또한 한번 죽으면 순식간에 세간을 버린다는 것을 알면 탐욕과 성냄, 나와 너를 따지는 시비를 저절로 마음에 두지 않게 되기 때문에 쉽게 해탈할 수 있다.
일곱째는 부정상不淨想이다. 통명관에서처럼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과 다섯 가지 더러움 등의 법을 보는 것이다.
여덟째는 단상斷想, 아홉째는 이상離想, 열째는 진상盡想이다. 열반을 인연하여
(중생의 몸과 마음을)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끊는 생각(斷想)이라고 하고,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를 벗어나 무루를 얻기 때문에 벗어나는 생각(離想)이라고 하며,
결박하고 부리는 모든 번뇌를 없애 오음이 다시는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다하는 생각(盡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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