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노인의 강
박남인
노인도 저리 울 수 있구나.
모처럼 양복을 입고 앉아있던 노인은 갑자기 꺼이꺼이 울었다. 손에 간신히 잡은 마이크를 통해 공연장 좌장으로 맥놀이 치며 퍼져나갔다. 마른 강물 같은 주름살마다 그토록 많은 해학과 반전을 수놓아 70여년 줄곧 무대 위에서 독보적인 연기를 펼쳐놓으시던 강우섭 명인이었다. 공연 무대가 아닌 좌석에서 앉아 있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늘 낡은 두루마기로 몸을 감싸고서 무대를 휘젓고 다니던 모습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81호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 옥주문화원이 8순을 훌쩍 넘긴 이 명인에게 1800쪽이 훌쩍 넘는, 마지막 유랑광대 ‘강우섭(가명)의 공연대본’ 상· 하본을 헌정하는 자리었다. 심청전 한 대목을 무대극으로 만든 뺑파전의 60년 단짝 지기이자 아내인 김애선씨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괜스레 애써 눈을 비빈다. 벌겋게 눈자위가 물들어졌다. 강우섭씨는 올해 84세. 두 사람은 우섭씨가 유랑극단으로 전국을 누비던 시절에 만나 평생 인연을 맺었다.
이 좋은 날. 수리성의 득음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그 목소리가 어린 아이처럼 “응애에” 흐느끼다 목이 잠겨 말을 잇지 못하다 애써 힘을 쥐어짜 “여기 오신 여러분네 고맙승인데. 일 년 삼백예순날 내내 건강하시라”는 덕담 인사말을 겨우 마무리했다. 역시 흥에 젖은 관객과 음악 배경이 있는 무대가 그에게는 더 적격인 듯하였다. 손자뻘인 다시래기 단원이 어깨를 부축해야 할 정도였지만 껌벅껌벅 세상이치 다 훑던 풍자는 어디로 숨긴 채 1막 1장에 그만 기대 인다. 남도사투리 욕을 달작지근하게 ‘이 오살 맞을 놈’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육덕 좋은 중과 마누라 사당이 수작을 부리는 대목에 ‘그라제 그라제’ 넘어가고 말던 우섭노인.
몸이 마음대로 따르지 않기에 이날 행사의 주인공임에도 무대로 오르지 못한 채 소회를 밝히려 하니 서글픔이 몰려왔던 것일까. 이런저런 인연들로 엮어진 무대동료들, 한 시절 소리만으로 무대를 흔들었던 사람들. 인간문화재가 하도 많아서 선술집 자리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고장. 700년이 넘도록 유배의 땅으로 쓰였던 섬. 왜구들이 제집 드나들 듯 해 나라에서 아예 주민들을 이주시켜 공도가 되었던 섬.
이 섬에 피어났던 꽃은 의아스럽게도 예술이었다. 기질이 남다른 유배자들로부터 글을 배웠던 옥주 사람들은 특히 글씨와 그림에 독특한 재능을 내보였다. 남도 연안의 고유한 풍습에 따른 민속도 덩달아 꽃을 피웠다. 강우섭 노인도 그렇게 풍찬노속으로 꽃을 피워냈던 것이다.
작년 봄 까지만 해도 여기 저기 초청공연에 토요민속여행 무대에 올라 노익장을 과시하던 분이 아니던가. 봉사 역할에서 진짜 봉사를 뺨치고 남을 표정 극은 더더욱 백미였다. 평생 동안 상대역을 해온 부인 김애석씨는 김해 출신 아가씨였다. 겨우 열다섯이었다.
옥주의 민속예술은 외진 섬 지역이라는 공간과 조선과 근대사회 시대를 뛰어넘어 늘 나방이 껍질을 벗듯 끊임없는 재해석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통해 상생과 해원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절묘한 매력을 발산해왔다. '칼의 노래‘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이 옥주를 ‘원형의 섬’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恨)이 한으로만 그치지 않고 옥주아리랑의 다양한 가사로 드러나듯이 남녀상열지사로 통속한 제도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버리는 일탈의 멋이 넘쳐나기도 한다. 생각보다 쓰잘데 없는 서방님 흉을 ‘시엄씨’에게 내놓고 질러대는 그 후련함이라니. “지 아들이 염념하면 내가 밤이슬 맞고 마실가겠느냐”는 식이다. 그만치 옥주 아낙들은 고된 일 속에서도 소리장단이 분명하고 억척스럽기로 유명하다. 야산 까끔 아래 거친 들밭에는 돌자갈이 오줌을 싸기도 한다. 나그네게 지나가면 그 돌을 들어 던지며 먼저 수작을 거는 여인네들이다. “노래 한 자루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니요. 불알 달린 사내라믄” 물정없는 사내들은 뒷걸음질로 피해가기 일쑤였다. 조금난리 닷새장에 가면 막걸리 한 잔이라도 목을 축이면 들노래 단가 흥타령이 절로 나오는 곳에서 85년을 살아왔으니 강우섭 노인도 온 몸이 소리가락으로 다지고 또 다졌을 것이다.
강우섭 옹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도 섬이라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일부 신분제약과 편견을 벗어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대 현장을 통해 우리시대의 가장 뛰어난 예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조공례 박병천 김대례 김귀봉, 옥주진도의 1세대 명인들이 세상을 뜨고 나니 강우섭 옹의 보배로움이 더욱 빛나는 듯하다.
노인은 겨우 울음을 그쳤다. 이미 목이 쉬었다. 하지만 그 탁성 하나로 삼천리 방방곡곡 태평양 건너 미국 땅까지 주무르고 다녔다. 가진 것이야 찌그라진 갓과 곰방대 그리고 멀쩡한 눈을 감아 짚어야만 했던 지팽이 뿐이었다. 하기사 그 가심에는 수 많은 대본 대사가 서로 튀어나오려 늘상 대기 중이었다.
일제 감점기 시절부터 그가 운명적으로 해쳐나가야 했던 세계는 시대적 모순과 모험이 기괴한 이데올로기의 함정들로 가득했었다. 현실과 무대는 늘 목숨을 건 상황극이자 치열한 기회의 현장이기도 했다.
어차피 생존의 문제였다. 오히려 무대가 더 절박한 경쟁이자 인간의 동지적 숨결이 그나마 살아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박보아 박옥진 등 주연 배우들도 인생무대에서 떠나갔다.
무대극은 가끔 현실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한 순간이라도 이상향의 세계에서 그는 자기 존재를 단단히 새겨 풍화하지 않도록 부조로 돋움화시켰다. 그 도드라진 몸짓들은, 무대극이 있는 한 달빛에 물들지 않더라도, 언젠가 조명이 꺼질지라도 여전히 빛나는 신화로 남아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자연이 결코 예술의 대체물은 아니지만 모든 예술의 원천이자 어머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 주었다. 강준섭옹은 그 자연을 스승으로 경배하면서 수 백번 대본의 텍스트를 경전처럼 외우며 필사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다시래기는 진도가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등급 위상
다시래기는 토속말로 “다시 낳는다”는 뜻을 담는다. 상갓집에서 상주를 위로하는 풍습에서 생겨났다는 것. 강우섭 옹이 이날 느닷없이 울음을 마치 애기울음소리처럼 낸 것은 기쁨과 회한이 얽혀 나온 것이지만 이 방대한 공연대본을 통해 그는 분명 또 하나의 세상에 태어난 첫 날이 되었을 것이다. 천지간이 씻김 길닦음 질베가 아니던가. 일찍이 ‘죽음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삶의 한가운데에서 찾아라’고 칼릴 지브란은 통찰하지 않았는가.
피는 강물이다. 시대와 시대를 적시는 강물이다.
그가 평생을 몸담은 유랑 극단에서는 창극부터 사극, 신파극에 이르기까지 각종 연극을 하였다. 공연 유형을 이조극, 사극, 현대극, 코미디 등 네 가지로 나누었다. 어려서 초등학교를 나와 신치선(신영희 명창 부친)씨에게 소리공부를 했다. 90년대 마당극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김성녀(중앙대 교수)씨의 어머니 박옥진(의신면 송정마을 출신. 여성국극단 스타) 6촌 동생과 한 살 위 사촌 형 박병두와 함께 가출해 여수로 가 김창동이란 소리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웠다고 알려졌다.
20세기 들어 진도다시래기는 서양문화의 범람으로 전승단절 위기를 맞았으나 전통 민속을 살리려는 국가 지원과 진도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명맥을 잇게 됐다. 강준섭 예인의 할아버지(강용성) 할머니(박간난), 아버지(강보문) 어머니(박색화)는 이 고장에서 대물려 온 세습무당이었다. 강준섭 명인은 옥주 임회면 석교리 태생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15세부터 약장수를 따라 팔도 장터를 누비며 춤 소리 기예로 평생을 살아온 특출한 재인(才人)이다. 지난 2012년에는 세한대학교 진통연희학과 초빙교수가 되었다.
강준섭· 김애선 부부의 만남은 더욱 극적이다. 비 내리는 삼천포 바닷가의 약장수 가설무대에 서 18세 경상도(김해시 진영읍 상당리) 처녀가 30세 된 진도 사내를 만나 부부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 후 60년 이 훌쩍 넘도록 국내외를 동행하며 천생배필로 연기해 왔으니 관객들의 감동은 더욱 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진도다시래기의 꽃인 거사와 사당역은 대역이 불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미 ‘강준섭제’로 정착되었다는 전문가들의 평을 받는다.
그에게 무대와 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이 구분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서 헌신, 열정, 끊임없는 각성, 꾸준한 노력 등이 요구되는 수행자나 다름없는 인생이었다. 수행자도 수준에 따라 보통 수행자, 열의에 찬 수행자, 최상의 수행자 등으로 나뉘어진다. 그의 공연극은 명불허전. 낙이불음하고 애이불상한 경지를 훌쩍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 분에게도 많은 고비가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유랑은 진도아리랑을 배경음악으로 한 서편제 영화처럼 굽이굽이 배고픈 길이었다.
강우섭 명인은 “배역으로 만나는데 극중의 대사와 행위가 뭔 상관있겠소. 네 살 먹은 손자(강근호)도 크면 일찌감치 가르쳐 진도다시래기의 5대 예맥을 잇게 할 것이다”라고 허소치 운림산방 화맥을 견주기도 했다. 또 무대와 가정에서 동고동락해온 김애선씨는 “우리가 연희하는 예능을 보고‘저만큼 호강할 것 같으면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연기하는 것이 아직도 남은 꿈이다”라면서 “못 배운 한은 노력으로 극복해 낸다.”고 했다.
우리 근대 공연연극사에서 또 다른 문화재나 다름없는 이 책자는 민중의 애증과 재치와 해학이 담긴 47편의 창극대사와 영상물 등 그동안의 행적이 담긴 영원한 기록물을 목포대학교 이경엽 교수를 비롯한 이윤선(길은리) 초빙교수 및 군립민속예술단 하미순 박사과정 수료자 등 목포대 연구진들의 채록 정리로 발간하게 되었다.
박정석 옥주문화원장은 “고향을 떠나 유랑극단을 전전하며 천신만고 세상 맛 다 겪어가며 백가지 장르에 능한 만능연기자의 삶을 살아와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 다시래기 예능보유자로 영예로운 국가인정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강 옹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잠시 감은 눈 속에 아련한 자막들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동지섣달 낙동강을 건너온 살 에이는 삭풍이 무릎 뼈마디를 스쳐가기도 했으리라.
1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잠시 떠오른다. 당신께서도 팔십 평생을 장구와 육자배기로 세월을 감아 사셨다. 술상 차리다 지친 어머니는 다리병이 도져 고생이 컸다.
이동진 군수는 “이번 대본집 발간으로 옥주의 문화유산 보존· 전승에 크게 기여하고 진도의 관광 문화 자원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박주언 향토사학자는 이번 공연대본 발간 과정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이 교수의 공연대본 발간 의의를 살피고 나서 무대에는 강준섭 선생의 공연 화면이 흐르고 이어 박남인 시인의 축시가 고운 한복을 입은 문화원 여성회원의 낭송과 함께 비춰졌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기념사진 촬영이 있었다.
전남 옥주문화원(원장 박정석)에서는 군과 군의회의 지원을 받아 옥주가 낳은‘명인들의 예술 기록화 사업’을 연차적으로 시행하여 없어지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뿌리를 찾고 이를 보존하는 작업을 해 나갈 방침이다.
앞으로 남도민요의 대가이며 ‘3대가 부르는 진도아리랑’(이근녀. 강송대. 노부희)으로 널리 알려진 강송대 여사를 비롯해 조오환(엿타령 명인. 조도 닻배노래 예능보유자) 등 명인명창들의 일대기 자료를 수집 발간을 통해 인문학적 재조명으로 한층 옥주가 예향의 본산임을 입증한다는 계획이다.(박남인.010-8604-4002)e-mail(namin4002@hanmail.net.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