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24-33번지
제주올레길 1코스에 포함되어 있는 성산포JC공원의 바닷가쪽 해변을 광치기해변이라고 한다.
광치기해변 하단에서 제주올레길 2코스가 시작되기도 한다.
무료주차를 할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중간중간 주차공간도 있어서 예전에는 주차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많이 달라졌다. 썰물일 때도 아닌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줄서서 기다렸다가 겨우 주차할 수 있었다.
광치기해변은 높은 온도의 용암이 차가운 바다와 만나 빠르게 식으면서 굳어져 형성된 지질구조를 하고있다.
썰물일 때 물이 빠져서 바닥이 드러나면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보이는 것도 아녀!
언제 방문해도 좋지만 기왕이면 썰물때 바닷물에 가려있던 비밀스러운 비경들이 속살을 드러낼 때 방문하는 것이 좋다.
용암 단층의 지질구조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녹색의 이끼와 어우러져 연출하는 장관이 매우 놀랍다.
물이 많이 빠져서 높낮이가 다른 신비한 너럭바위가 층층의 아름다운 초록색 돌계단의 모습으로 드러나면
어디를 찍어도 사진 작품이 되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자연이 빚은 비경이 신비로운 물감의 채색으로 완성되어 멋진 풍광을 뿜뿜 선사해 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성산일출봉 옆으로 일출의 모습을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어서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사진명소이기도 하다.
광치기해변 사진을 찾다가 2019년에 막내 민수와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어느덧 훌쩍 4년이 지나버렸다.
광치기 해변의 모래는 현무암의 풍화작용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입자이기 때문에 검은 색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광치기라는 이름은 썰물때 드러나는 용암 바위가 드넓은 평야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치기 해변이라는 명칭이 관치기 해변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기잡이 나간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죽으면 그 시체가 파도에 밀려 온 해안이 이곳이란다.
그래서 관을 짜서 묻어주었다고 해서 관치기 해변으로 불리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관광지는 관련된 마을이 많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고 그러다 보면 유래나 전설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광치기해변 성산일출봉방향 끝자락에 터진목이 있다. 제주4.3 집단학살현장인데 올레길 1코스가 이곳을 지나간다.
1948년 9월 25일 성산포 사람들이 광치기해변 터진목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으로 400여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대살 희생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살"은 학살을 면하려고 한라산 자락이나 일본 등으로 도피한 청장년들 대신 배우자나 어머니를 납치했다가 출두하지 않으면
처형하는 극악한 연좌제였다.
관치기 해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래서 말이되는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을 구상하면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도 겸하도록
가능하면 4.3유적지를 지나가게 설계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조국인 튀르키예 또한 제주도 못지않은 기구한 역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2023년 4월 6일에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73회에서 "백골시신과 시멘트"라는 제목으로
다랑쉬 오름 다랑쉬굴에서는 학살을 재조명하며 제주4.3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1948년 발발한 제주4.3 사건은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명이 희생된 대학살극인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라고 인정한 것이 2003년이었다. 이승만정권과 미군정의 제주도민 학살이다.
그리고 또 20년이 흘렀다.
이승만이 혼자 알아서 했든 김일성이 이승만에게 시켜서 했든 이승만정권과 미군정의 제주도민 학살은 변하지 않는다.
궁핍의 힘은 정말 무식한 사람들만 모아 놓은 것 같고
더듬어 민주당은 구성원이나 지지자들이나 모두 사리사욕에만 빠져서 눈뜬 장님들인 것 같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 단 한명의 정치인도 갖진 못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불행하고 불쌍하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을 생각했던 항일독립운동가 모두가 사상과 이념으로 인해 현실정치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