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렘 12:1-17)
차 준 희
한세대 신학부 교수
1.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예레미야 12:1-6은 예레미야의 두 번째 고백에 해당되는 본문이다. 여기서 예언자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변론할 때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심을 고백한다(1a절). 그리고 바로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따지듯이 묻는다(1b절). “변론하다”라는 단어는 법정용어라는 점과 질문의 내용으로 보아 이는 불평의 수준을 넘어서 고소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는 예언자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불평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고소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으시고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도록 해주셨음을 지적하고 있다(2a절).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늘 하나님을 내세우지만, 중심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다(2b절). 인간 예레미야가 보아도 그들은 경건한 체하는 것이지 본심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가면으로 가려진 그들의 본 모습을 모르실 리가 없지 않은가!
뒤이어 탄원시의 주요한 요소인 무죄선언이 나온다: “야웨여...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3a절). 예레미야가 보기에 처벌받아 마땅한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고난받는 쪽은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던 예레미야 자신이었다(렘 11:21). 그는 악인을 처벌해 달라는 간구로 그의 기도를 마감한다(3b절).
여기에 덧붙여서 4절에서 그는 악인들의 악한 행실은 인간간의 공동생활을 파손시킬 뿐 아니라 온 땅의 자연질서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된 악인의 정체가 4b절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이 땅의 거민 즉 유다 백성이었다. 그들은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고 은밀히 말하며 죄의식은커녕 오히려 악행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인간의 감추어진 의도를 간파하시고, 스스로가 올바르게 행하신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과 무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자신들이 악하고 패역한 삶을 살아도 별탈이 없이, 아니 오히려 더 잘살고 있으니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부인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처럼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은 예레미야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점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고민하는 것은 악인의 불의한 행위가 아니고, 악인이 형통하도록 방치하는 의롭지 못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어찌 한두 번인가(사 55:8-9). 사실 알고 보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 않은가.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언제나 새롭게 배워야 하는 영원한 “학생”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앙은 곧 배움이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알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장성한 분량까지 겸손히 배우며 자라가야 한다(엡 4:13-16).
2. 하나님의 동문서답: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 12:5)
드디어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이 떨어진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5절). 이게 무슨 말인가? 악한 자들을 처벌할 것이라는 11:21-23의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대답이 전혀 아니다. 오늘의 우리도 당황스럽다. 예레미야의 진지한 질문은 하나님의 동문서답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당한 격이다. 이는 사실 질책에 해당된다. “본 게임도 아니고 예선 게임 아니 몸푸는 연습단계에서 벌써 지쳐버렸느냐” 하는 질책이다.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가 앞으로 감수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지금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처사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의 물줄기가 졸지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갑자기 복종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하나님의 대답 즉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는 인간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좀더 철저한 복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여기서 멈춘다. 야속할 정도로 복종이 가져다줄 유익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질책에 그만 압도당하였을 것이다. 마치 욥이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압도되어 침묵하였듯이(욥 40:3-5; 42:1-6). 이때 하나님의 대답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어떻게 반문했는지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후 그의 생애를 볼 때, 그는 하나님의 촉구에 복종하여 그 어려운 예언직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태양이 빛나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는 신앙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날 우리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고 신앙의 회의에 부닥치고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해도 계속 믿음을 지켜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레미야처럼. 이쯤 되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신앙인”이라는 존칭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히 11:38).
3. 믿을 것은 하나님밖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렘 12:6)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은 질책을 넘어 경고에 이른다: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6절). 예레미야의 고통은 외적인 요인인 타인과의 갈등과 위험한 주변환경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가족 내에서도 지속된다. 밖에서 받은 온갖 스트레스와 수모를 푸근하게 이해해주고 감싸 안아주고 풀어주어야 할 가족들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렘 15:10), 그의 친한 친구들마저도 그를 버리고 공격하였다(렘 20:10). 예레미야는 갖은 고통을 완전히 홀로 견디어내야 했다.
사회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의 신뢰할 만한 교제와 필요한 도움이 완전히 차단된 고독한 삶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면 누구를 믿고 살란 말인가!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아니다. 네 하나님인 나를 믿어라. 오직 나만을!” 고향(지연의 보호막)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혈연의 보호막)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향하는 아브라함,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에 남은 삶을 맡겼다(창 12:1). 인간의 보호막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 앞에 고독하게 홀로 서 있어 본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허울뿐인 인간의 울타리를 벗어 던지자 강력한 하나님의 울타리가 그의 둘레를 감싸고 돈 것이다(참조. 욥 1:10).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고독체험을 통하여 인간이 홀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느끼는 영성을 가르치신다.
4.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렘 12:7)
예레미야 12:7-13은 황폐해진 자기 땅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을 묘사하고 있다(이 본문은 왕하 24:1-4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집을 버리고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7절). 7-9절에서 계속해서 “소유”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이 “소유/기업”(히브리어: 나할라)라는 말은 본디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씨족의 전체 소유지에서 개인적으로 차지하는 몫의 땅이다. 이 소유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참조. 왕상 21장). 그러나 하나님은 동족인 다른 지파에게도 양도가 불가능한 것을 다른 민족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고, 내 던지고, 원수의 손에 넘겨버리고”만 것이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유다 백성과 나라는 하나님의 귀한 소유이고(신 32:9), 하나님이 특히 사랑하는 백성이 아닌가? 그런데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자가 되어버렸고(8절), 주인에게 대드는 포악한 매가 되어 버렸다(9절). 그들은 포악해졌고 파괴적이며 난폭해졌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백성이 오히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온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도 그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11절).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들(목자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을 짓밟아 버리도록 할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10절). 하지만 그들을 사랑하셔서 심히 괴로워하신다. 하나님은 심히 슬퍼하신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점점 깊어만 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계를 내리면서도 고뇌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징계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징계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징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징계에 담겨진 하나님의 피 눈물나는 심정(파토스)을 헤아릴 수 있는가?: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야웨의 말씀이니라”(렘 31:20).
5. 유다의 원수나라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그들을 다시 인도하리니”(렘 12:15)
예레미야 12:14-17은 유다의 원수 민족들에 대한 예언이다. 유다 나라를 황폐하게 한 원수 나라들도 선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꾀어서 바알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가자 유다의 소유지(기업)도 차지했다. 그 대가로 그들도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14절). 유다 백성들도 심판을 받았지만 심판이 그들의 마지막이 아니며, 심판은 과정이고 궁극적인 결과는 구원이다. 그들에게 심판은 구원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유다의 원수나라인 이방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그들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한 민족으로 국한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이 유다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함께 사이좋게 사는 것이다(사 2:2-4; 미 4:1-5).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먼저는 심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스스로 돌이키심으로 본래의 위치로 각자를 되돌리신다(15절). 두 번째는, 하나님의 법을 부지런히 배우며 지켜야 한다(16절). 즉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수용하면 유다의 최대 적들이라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이 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유다 민족의 피가 흘러야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소속성은 인종적인 것도 혈연적인 것도 지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신앙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출발부터 혈연 중심이 아니라 신앙중심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 즉 이방인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욜 2:32). 나의 원수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우리의 원수는 나와 우리에게만 원수이지 하나님의 원수는 아니다. 그도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다(욘 4:10-11). 나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