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의 뜻은 '비난하는 자'이고 '사탄'입니다.
간극, 사이를 뜻하는 Dia~의 의미를 볼 때, 온갖 비난과 시기와 질투가 바로 이 '간극과 사이'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립과 간극도 말굽처럼 볼 수 있는 메타적 차원에서는 한 극의 '사탄'이나 '기대'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던 아브라함이 경험한 자아-자아, 신-자아의 대립. 그 둘 사이가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상고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뱀의 지식이 세상에 들어온 방식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사이와 간극은 항상 있을 진대 믿음은 항상 "이미 이긴 소망"으로부터 나오며, 벌어진 사이도 인간의 역사를 생산해 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에 서 있고 지향점은 어딘지 좌표가 드러납니다.
삶에서 멀어진 이성도 나와 세계의 분열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성경이 진리인 것은 삶과 생명, 구원이 모두 궁극으로부터 지향 되어 오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역사성의 위치, 믿음의 지향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날 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어수선하게 흩어진 '無我'의 실존을 대면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無我가 자신을 입은 것도 대단합니다. 마치 이미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이제라도 그리스도로 옷 입었던 사도와 성도들처럼!
이처럼 아브라함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개별자였습니다. 그의 모든 여정은 모두 불가능과 죽음의 연속이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목적지나 보상이 있을까요? 무엇을 위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아들 이삭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 끝이 결코 보상이라든지 자기 욕망이 원하는 사건의 촉발 따위의 목적은 부정됩니다.
단지 "지독한 처해짐"이란 절벽에서 비로소 진실해진 이성과 삶의 일치를 경험했습니다. 비로소 눈이 열려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 속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강 깊은 곳에 잠기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앎(이성)이란 강가에서 더 깊이 들어가야 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죠. 바로 여기에 '사자'라는 심장이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한 치의 '사이'도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마 성경은 지금까지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는 환타지가 이뤄져야 했다면 아마 2천 년 주님이 벌써 이루셨겠죠. 하지만 성경은 여전히 구원의 자리 즉 이삭을 바치던 날로 우리를 다시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극이 사탄의 종이 되게도 하고, 주님을 만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디아블로냐? 둘로스(δουλος)냐? 사자가 없으면 이미 이성과 삶이 분리된 것입니다. 다시 모리아산으로 올라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