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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지연전(중동부 지역: 충주-단양전투)
1. 작전 개요
중동부지역 지연작전은 한강방어선이 형성된 '50. 6. 29일부터 7월 13잃까지 충주, 제천,단양 등 중부 내륙의 차령산맥으로부터 소백산맥에 이르는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2사단과 제1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였다.
서울을 피탈 당하고 한강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국군은 신림-목계-장호원-죽산-안성을 잇는 차령산맥 일대에 제2차 방어선을 설정한다. 미군과의 작전지역을 분담,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앙지대에 새로운 진지를 형성하게 된다;
중동부지역에 대한 방어임무를 부여받은 육본직할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은 제6-2연대가 충주 일대에 배치되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1사단을, 제8사단이 제천 및 단양 일대에 배치되어 북한군 제12사단과 공방전을 벌이며 소백산맥과 금강을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 하였다
특히 제8사단 포병인 제18포병대대는 전 병력이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되어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한편 중동부지역의 제6사단 좌측에는 제1군단 예하의 제1사단이 음성-괴산에서 적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을 , 제8사단 우측에는 동해안에 김종원 중령이 지휘하는 제23연대가 북한군 제766부대 및 제945육전대를 맞아 동해안에서 포항에 이르는 축차적인 방어를 하고 있었다.
2. 각 단계별 전투와 탐사 및 발굴 결과
제6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 제2연대장에 함병선 대령, 제7연대장에 임부택 중령, 제19연대장에 민병권 중령이었으며 제8사단은 사단장 이성가 대령,제10연대장에 고근홍 중령, 제21연대장에 김용배 중령이었다.
가. 충주지역 전투
충주전투는 '50. 7.7-7.9일까지 제6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오 제1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충주-수안보를 비롯한 소맥산맥 일대에서 벌인 전투다. 국군 제6사단은 홍천을 피탈당하고 7월 3일에 충주에 집결한다. 우측에서 철수하는 국군을 엄호하기 위해 2개 연대를 급파하도록 명령을 받고 제19연대가 이천 북방으로 그 뒤를 이어 제7연대가 음성을 경유 북으로 추진 중에 있었다.
7월 2일에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은 08:00에- 황성을, 그리고 13:00에 원주를 점령한다. 반면 국군 제6사단은 7월 1일에 사령부를 충주로 옮기면서 7월 3일 집결 완료했다.
그러나 육본의 지시로 제7,19연대가 기동 엄호부대로 급파됨에 따라 제2연대가 19번도로 축선에 방어중점을 두고 대비 하였다. 남한강 남안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충주 경찰 약 200여명을 탄금대 방면에 제1대대와 같이 배치하고 제3대대를 지금의 충주댐이 있는 강 차안상에 배치 하였으며 북한군은 탄금대-충주댐어간에 제12사단 소속이, 좌측으로는 제1사단이 충주로 진출중에 있었다.
이때 계명산 대안에 있는 관모봉 일원에서 일부 적들이 우회하여 도하를 개시하여 포위서멸을 노리다 국군의 수색중대와 조우하게 되면서 격전이 벌어져 충주를 점령한 제12사단은 단양방면으로 선회하고 제1사단이 계속하여 국군을 밀어붙였다.
따라서 제6사단은 축차적으로 수회리-적포산 일원을 거쳐 7월 11일 오전에 문경으로 철수해 내려간다. 이때에 창설된 제2군단에 제8사단과 같이 배속되어 지휘소는 문경초등학교에, 제19연대는 괴산-수안보를 거쳐 우익인 조령을 점령 방어하고 충주의 제2연대는 수안보-연풍을 거쳐 죄익을로 이화령을 점령하고 제7연대는 음성-보천-괴산을 경유 예비로 문경에 집결하며 제16포병대대도 이곳으로 집결 되었다.
"탄금대에 남아 있는 전투흔적"
탄금대는 1,400년존 신라의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제자들을 가르켰다는데서 유래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장군이 문경세재를 지키던 관군이 뒤로 물러나 배수진전법으로 한양으로 물밀듯 올라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진출을 조금이나마 지연한 곳으로 달천강 일대가 평야지대로써 당시에도 8,000여명의 많은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그러나 6.25전쟁터"라는 글짜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곳은 6.25전쟁 당시에도 국군과 경찰이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지금 강 차안상에 그 당시에 굴토된 개인호의 흔적이 양호하게 남아 있다. 탐지기를 들고 탐지하니 많은 금속소리가 나고 우리는 쉬게 탄피등을 발굴할 수가 있었는데 이곳을 담당하는 시청 공무원에게 전쟁사실을 포함해야 되지않느냐고 하니 본인은 힘이 없다고 한다.
아니 지금 남한강 변에 국보급 고구려 비와 탑이 서있고 한때는 충주비료공장이 가동하면서 휘황찬란했던 이곳에 왜 그런 현대사의 기록은 없는지 요상했다.
나는 연대장 시절에 이곳 게명산뿐만 아니라 목벌리와 달천강 일원 대림산 두륭산 등 모든 전투지역을 탐사하고 지역 주민을 만나 당시를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우리 전사와는 달리 열심히 싸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지역빨갱이를 군인과 경찰이 처단하고 내려가고 북한군이 내려와서는 반대로 그 앞잡이들이 뛰어나와 무고한 양민들을 대창으로 죽였다는 극과 극의 이야기만 난무 했다.
그런 어느날에 내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이곳 목벌리 오르는 길에 파크랜드 예식장에서 장교한명이 결혼식이 있어 갔다가 하객중에 당시 국군이 강물속으로 뛰어 들어 도망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어른을 만났다
"국군 19연대가 병력이 북한군에 포위되어 강물속에 죄다 뛰어들었다."
나는 예식이 끝나고 점십을 간단히 먹은 후에 우리 정보장교 정대위(광주고향?)를 대동하고 어르신과 남한강가로 갔다.
당시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강물이 물어 있어 건너가기가 곤란했다고 한다. 그런데 콩볶듯 북한군이 총을 쏘아 군인들이 밥먹다 흩어져 물속에 뛰어들어 많은 인원이 수장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지금 지도에 보면 고향가는길 선착장에서 남벌 선착장에 이르는 어간인데 그 당시에 여름말고는 도보로 걸어서 광산골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한다. 이 제보는 전사적으로 맞는 내용이다.
계명산에 올라 실태를 탐사했으나 개인호는 별로 없었고 지역주민들도 국군이나 북한군이 그냥 왔다가 나갔다고 한다
"우리밭에 6사단이 묻혀있소"
'00년도에 우리는 3번도로상 살미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나 본인의 산밭에 국군이 묻혀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당시에 학교를 간다고 걸어다니다 보면 그 위치가 명확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 육안 식별이 조금 어렵다 한다.
"그럴 어르신은 어떻게 기억하세요?"
"12살인가 되었으니 기억이 뚜렸하지. 우리 집에 부상당한 국군이 숨어들었는데 밤에 간다고 갔는데 다음날 밭에 가보니 그 숲속에 죽었지 뭐야. 그래서 아버지와 내가 괭이와 삽으로 묻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그럼 그 후에 누가 발굴하러 오지않았나요?"
"글쎄 나도 군에 갔다와서 서울에서 직장생할하다 늦게 귀향했고 아버지가 3년전에 돌아가셨는데 누가 발굴 했다는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밭은 지금 다른 사람이 주인이야."
"포크레인을 몰고 온 어르신"
우리는 37사단 병력을 지원받아 박교수팀과 발굴을 직접 했다. 워낙 어르신이 자신있게 대답하셔 믿고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 곳을 파 보았으나 나오질 않는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마치고 잠깐 쉬고 있는데 무슨 포크레인이 들어온다. 어르신이 타고 있다.
"어르신 장비는 뭡니까?"
"기막히잖아요. 나이먹고 헛소리 한 것 같아서 분명히 묻었는데 안 나오니 면에 가서 포크레인을 사왔어요."
그리고 포크레인이 이곳 저곳을 찝어서 파보는 가운데 전투화가 나오고 칫솔이 나왔다.
"잠깐, 장비 스톱"
"뭐가 나왔습니까?"
드디어 찾고자했던 유품이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내눈에 제일 먼저 보여져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동네분들이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는 칭찬을 듣는다. 사실 나는 전문가는 아니다. 물론 전사 사실에 대한 접근방법은 내가 누구보다 앞선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유해에 대한 체질 인류학적 판단은 초보자수준이다.
그래도 유품을 가지고 피아판단을 할 때는 누구보다 목소리가 클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맞다. 발굴이 계속 되고 우린 포크레인이 걷어낸 흙더미에서 많은 유품을 찾았고 드디어 유해를 식별해 냈다. 50여년의 세월 속에 많은 부분이 부패하여 형체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나 완전한 모습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르신이 우신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데 나오지 않으니~!" 우리는 어르신께 포크레인 비용을 지불하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셨다.
"석문동의 미군, 그리고 김일성~"
발굴이 끝나가고 우리는 김일성이 전쟁 당시에 수안보에 왔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추저에 나섰다. 당시는 워낙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무서워 북한군은 점점 주간 이동은 못하고 주로 야간 이동에 공격을 하고 부족한 병력을 점령지에서 전시 동원하여 의용군으로 충당하기 시작한다.
제6사단(-1 : 제19연대는 이천지구 전투후 별도 이동) 제2,7연대는 충주지역에서 물러나 축차적으로 방어하면서 수회리-수안보- 문경세재로 내려서고 있다. 북한군은 계속하여 제12사단 제31연대와 음성방향에서 진출한 제1사단이 밀어붙이고 있다. 우측은 국군 제8사단이 북하군 제12사단(-)의 압력에 원주 밑의 신림-제천-단양-풍기 방향으로 밀려난다.
그러다 7월말에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는데 이 시기에 이미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북한군은 최아긔 발악으로 조기 전쟁을 종식하려 하였으며 최전선을 독려하기 위해 실제 김일성이 전선사령부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수안보에서 597번 지방도를 따라 신라말 경순왕의 아들 아자태자와 덕주공주의 설화가 깃든 미륵사지-하늘재 방향으로 탐문을 해 가는데 드디어 석문동에 이르러 중요한 제보자를 만났다.
"어르신 혹시 이곳에 북한군이 왔었나요?"
"북한군이 뭐요 김일성이도 왔는데?"
"네? 김일성이 여기까지 내려왔습니까?"
"내가 직접 옆에서 보았는데 잘 생겼어. 북한군 높은 놈들이 수없이 왔는데 계급장은 없어요."
"와~, 김일성을 목격한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어떻게 통제가 심할텐데 보게 도었네요?"
"내가 나이는 13세살인데 키가 작고 어리게 보여 그놈들 식당에서 심부름하고 밥 얻어먹고 살았어. 난 굶어보진 안했어. 저기 언덕배기에 미군들이 붙잡혀 왔는데 굶기도 했지."
"아니 이곳에 미군이 있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포로겠지. 저기 집한채가 있었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아침이면 체조도 하고 호자 움직이는데 북한군이 가끔 밥을 갔다 줘요."
"그럼 혹시 나중에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함께 데려갔습니까?"
"뭘 데려가. 귀찮은데. 저기 길건너 산 밑으로 데리고 가더니 둘인가 쏴 죽여버리고 갔지."
나는 너무 놀라기도 하고 흥미도 있어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함께 미군이 죽어서 묻혀졌다는 현장으로 이동해 갔다. 이때 마침 이지역 일대의 광물자원을 조사하는 팀들을 만났다.
옛날에는 더러 보이기도 했는데 요즈음은 안보이던데요
"뭐하시러 다니나요?"
"네, 우린 대한 광물학회 소속으로 월악산 일대의 광물자원을 탐사하러 박사님과 지금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럼 군인들이 여기에 왜 올라오셨나요?"
"우리는 6.25전쟁때 전사했으나 유해를 찾지못한 분들의 유해를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혹시 산에서 사람뼈같은 것 안보셨나요?"
나이가 드신 박사님이 말을 이어 받았다 이분은 한국에 이름 있는 박사님이라 한다. 평생을 광물자원을 찾아 다니고 있으며 대한민국 모든 산을 몇번이고 돌았다 한다.
"예전에 설악산 저항능선일대에 돌 틈에 그저 뼈가 들어나 있었고 황철봉에서 미시령을 넘어 신선봉이 있는데 그 이동구간에도 많았어요."
"지리산도 60년초에만도 여기저기 뼈들이 그저 눈에 보였고 건봉령 어딘가도 많이 있던데~"
"요즘 최근에 보신 곳은 어디신지?"
"요즘 한 20년전부터는 언제 사라졌는지 보질 못했어요."
우린 잠시 이런 저런 정보를 교환하고 광물자원팀은 산 위로 다시 오르고 우린 어르신이 말하는 일대에 표식을 하고 탐지기를 가동시켜 보았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어르신에게 김일성이를 본 소감을 물었더니 "날 잡아갈려고 그러우?"하며 즉답을 피한다. 우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0년도에 이곳에 병력을 올려 정밀 발굴을 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낙동강 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지자 김일성이 독려하러 왔다갔다."
다시금 그 어르신을 만났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당시보다 주름살이 더해지신 어르신은 우리가 하는 유해발굴 업무를 TV를 통해 자주 보았다 하시며 집안으로 우릴 불렀다.
깨끗한 집안에 수석들이 다수 있는 정원도 있고 넉넉한 시골집으로 보였다. 다시금 나는 김일성이가 왔을 때에 정황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비슷한 대답이다. 김일성이가 온다고 누가 말하여 준 것은 아니고 갑작스레 주변에 총을 들고 높은 군인들이 오는데 계급장은 한결같이 안보였다고 한다. 대신 식당이 석문동천가에 있는데 먹는 것은 잘 먹었다고 기억한다. 미군은 많이는 못보았고 야간에는 많은 병력이 남으로 내려갔다 한다.
"헌데 어느날 군인들이 북으로 올라가는데 잠을 자고 식당에 가니 아무도 없어?"
"그때가 기억하기에 언제쯤 되나요?"
"아마 벼들이 익어가고 있을 때라 기억되는 것이 프락치들이 동네에는 없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완장을 차고 나타나 벼이삭 알맹이를 하나하나 세고 주판을 들고 다니던 기억이 나요."
"그들이 철수할 때에 혹시 포로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못보셨습니까?"
"그런 것 못보았어요 주로 밤에 가버리니 국민학교생인 내가 잠자느라고 못 볼 수도 있지요."
수안보 밑에는 바로 문경새제다. 조령산(1,025m), 주흘산(1,108m)이 북쪽에 버티고 있고 이화령과 조령, 하늘재가 있는 곳으로 제6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을 물고 단계적 철수를 명에 의해 실시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북한군은 강제 동원한 의용군을 전선에 거의 20%수준으로 합류시키고 있었다.
차는 통제된 미륵리-하늘재구간을 통과하여 하늘재 정상에 다다랐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선인 이 능선은 800~1,000m에 달하는 주봉들이 연결된 산악지형으로 빨치산들(북한군 제2전선부대: 낙오병 중 일환)의 주요 은거지로써 포암산(962m)이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이 일대가 월악산 국립공원의 남쪽 요충지다. 남쪽으로는 800~900m고지능선을 따라 내리면 바로 조령과 이화령이 나온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마을 집이 별로 안되는 세첨이란 동네 노인정에 들렸다.
"여긴요 절대 북한군이 안왔고 국군도 못보았어요."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노인정에 할아버지 몇분과 주로 할머니들이 많이 모여 화투놀이 중이다.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고 잠깐 양해를 구한다음 대화를 나누는데 할머니 몇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하셨다.
"아이고 고놈들 빨갱이들이 우리집 먹을 것 다 가져갔어요."
"우리 집은 17살 오빠가 있었는데 밤에 그놈들 따라갔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요."
"아이고 그 프락치들이 더 난리야. 못된 짓은 그놈들이 다했어. 닭잡아 먹고 개잡아 먹고 옆집 ㅓ녀데려가고~?"
"할머니 그런 이야기 말고 혹시 군인이 죽어서 이 어디에 묻혀있는 곳 없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선다. "나하고 이야기 합시다."하며 밖으로 나간다. 우리도 따라 나섰다. 그런 할아버지가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잠깐 기다리라며 안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문틈으로 들리는 소리가 조금 요상하다.
"모른다고 해요. 무슨 일이 또 생길지 모르는데 왜 자꾸 말들을 해요.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스런 모습으로 일관되게 이 동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6.25전쟁이 지나갔다고 한다.
전사에 의하면 제6-19-3대대가 수안보-미륵사지에서 소백산맥으로 올라서 평천리로 내려가 진지구축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하늘재를 통과하여 이곳으로 병력이 기동했다는 것은 예측이 가능한데 모른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갈평리가 나온다. 초등학교도 있다. 마을회관에 들러 찾아온 이야기를 하니 군인이 와서 몇 일 머물고 밥도 해서 주고 운달산으로 해서 오정산으로 빠져 나갔다 한다.
"그리고 우리는 '07년도에 이곳 갈평리 초등학교 바로 앞에서 2명의 유해를 발굴한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군인들이 땅을 파고 군인을 묻고 갔다고 한다. 봉분이 4개나 도는데 정상적으로 묘를 일정한 간격으로 양지바른 남쪽을 보고 써놓았다. 우리는 발굴하면서 학교측 교장선생님의 요청으로 이곳을 학생들에게 개방하여 보여주기로 했다
"군인 아저씨, 국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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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여자에요 남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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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왜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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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없었으면 전쟁이 안났나고 하는데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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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6사단은 7월 12일 05:00까지 소백산맥의 관문인 하늘재-조령3관문(문경새제)-이화령 등을 이용하여 조령산, 주흘산 남쪽으로 축차적 내려서며, 문경에서 조령천을 따라 오정산-영강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해 나간다. 이화령-황계산-황학산-옥녀봉, 영강 남안-어룡산-불정동-틀모산의 유곡리일대에서 전투를 하게 되며 북한군 제1사단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충주-수안보전투간 7월 7일부터 7월 12일까지 1,500여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국군은 전사 31명, 전상 205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나. 단양 전투
단양전투는 국군 제8사단이 중앙선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12사단 제30/32연대와 7월 6일부터 7월 12일까지 실시한 전투이다.
1950년 6월 27일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28일 강릉 탈환 작전을 전재하다원주로 철수하라는 육본의 명에 따라 6월 29일 이동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동중에 사단장은 피난민들로부터 북한군이 벌써 원주에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듣고 제천으로 이동방향을 바꿔 7월 2일 철수를 완료한 후에 원주에서 철수하는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10연대와 여기에 제21연대 1개 대대를 묶어 7월 3일 열차편으로 신림역 북쪽의 가리파터널 입구까지 이동하여 하차 후에 가리파 고개 정상으로 올라서는 순간 적의 기습을 받고 급편방어를 하게 된다.
반면 이때 제6-7연대는 적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으며, 원주에서 계속 남하하여 지금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똬리굴 문현고개 일대에서 전투를 하고 제10연대와 교대하는 상황이었다.
충주로 이동하기 위해 7월 5일에 제천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뭔가 명령이 이상함을 느낀 사단장이 육본에 전문을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했으나 답이 없자 직접 달려가 확인하니 사실이 아니였다. 다시 원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미 안동까지 내려간 병력은 7월 6일 18:00에 단양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 제12사단이 남한강 대안까지 진출하는 상항이라 제8사단은 남한강 차안상에 병력을 배치하고 제10연대 제1대대로 매포초등학교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하여 큰 타격을 가하고 남한강 상에서 방어임무를 수행 후에 12일 풍기로 이동한다.
(1)신림지역 전투
1950. 6월 27일 강릉을 철수한 제8사단은 대관령을 넘어 유천리-횡계리로 들어와 부대 정비후 28일에 강릉 탈환전을 하게 된다. 그 후 제6사단장 김종오로 부터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본명령을 전달받고 29일 원주를 목표로 하진부리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동중 피난민으로부터 이미 원주에 북한군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목적지를 제천으로 바꾸어 이동하게 되고 7월 2일 제천에 11:00경 도착한다.
이어서 육본으로부터 제6사단 방어지역을 인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제21연대 1개 대대를 제10연대(연대장 고근홍 대령)에 증강시켜 제6사단 제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와 임무교대를 위해 7월 3일 열차편으로 신림역 북쪽의 가리파고개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12사단은 7월 4일 자주포 포대와 대전차포 중대를 투입하여 직접조준사격으로 진지를 유린함으로로써 08:00경 진지는 무너지고 원주탈환의 기회는 사라진다.
가리파는 지금의 치악산 휴게소가 있는 지역일대로 좌우측으로 900~1,000m고지군이 길게 펼쳐지는데 접근성이 양호한 편이다.
"중앙고속도로 건설시 금대리 계곡에 수많은 유골이 나왔다."
나는 금대리의 똬리굴 일대를 조사하려 많은 노력을 해왔다. 원주천이 남북으로 흐르는 이곳은 원주에서 가리파고개에 이르는 구간에 무려 터널이 5개나 있는 험한 곳으로 고속도로 공사간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한다.
함박골에 들러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런데 바로 맞은 편에 산을 밀면서 많은 수의 유골과 탄피등 유품들이 나왔는데 수습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고 도쟈로 밀어붙여 계곡을 메우고 말았다 한다. 그러고 나면 큰비가 내려 모든 흔적은 다 사라져 버렸다는 제보다.
또한 함박골 똬리굴 입구에 그 당시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군인과 경찰이 일부 죽어 철로변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아무것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다.
"가리파 고개에서 전투는 없었다."
치악재 우측으로 들어가면 절이 동네에 상당히 많다. 아마도 치악산 남대봉(1,180M)에서 사명봉(1,196m)을 거쳐 1,000m고지군 능선을 따라 지맥이 흘러 내리는 곳으로 풍수지리상 기가 모인다하여 절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가장 뒷쪽의 절로 해서 능선을 쉽게 올라설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가면 개인호가 일정한 간격으로 구축되어 전쟁이 많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사실 동네분들의 이야기는 군인이 와서 땅을 파다가 바로 밑으로 내려가 신림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군이 들어왔다 한다.
"여기에 유해가 있소"
어느날 지역 심마니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사람뼈가 보이고 있는데 가리파고개 정상이라 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우리가 현장확인을 통하여 6.25전쟁 당시의 유해는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데 유해가 보인다니 바로 현장에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유해는 마대자루에 들어가 가리파고개 북측언덕 밑에 묻혀 있었다. 전쟁때에 마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어디서 유해가 나오니 마대에 담아서 누군가 옮겨 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나는 10,000여구의 유해발굴을 발굴하는 현장을 통제해 왔다. 정확한 것은 몰라도 일단 보면 남녀노소는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워낙 훼손이 심하면 사실 연령대를 판단하기가 곤란하다. 지금이야 60대하면 젊다고 하지만 그 당시는 40대만 되어도 노인쪽에 속했다.
"전쟁이 없었다는데 웬 유해?"
뼈의 상태나 발굴되는 지표면의 상태를 보니 이건 수상한 유해였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강력사고의 실체라 의중이 갔다. 그래서 지역 경찰에도 알리어 함께 현장을 재점검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우린 변사체로 오래된 시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전에 발굴단에서 다시 그곳을 발굴했다고 한다. '아니다'라고 한 곳을 찾아다니며 발굴하는 요즘 발굴팀의 의도를 모르겠다. 뒷처리는 물어보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니까~?
(2)구단양 외곽전투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가리파고개에서 물러나는 부대를 수습하여 '충주로 이동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제6사단장으로부터 전해듣고 제천역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걸어서 박달재를넘어서 가는 것보다 열차이용이 가능하고 지친 병력의 사기진작일환도 작용한다.
북한군이 7월 4일 18:00경 제천에 진입하고 사단은 7월 5일 02:00에 제천을 떠나 대구-영천-안동까지 진출하고 있으 때에 사단장이 직접 대전으로 이동하여 명령을 확인결과 잘못돈 것을 확인하여 다시 병력을 돌려 단양방어에 돌입하게 된다.
이 당시에 이미 공병반은 모든 다리를 폭파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사단은 7월 6일 10:00에 단양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북한군 제12사단도 남한강 북안에 도착하고 있었다.
(가)매포리 기습전
사단은 제21연대를 남한강상에 배치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 제10연대는 후방지역 경계를 담당하도록 하면서 피난민들로부토 획득한 정보에 의해 매포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적 제12사단 연대병력을 타격하기로 하고 제10연대에서 1개대로 7월 7일 05:00에 강을 도하하여 7월 8일 05:00에 기습하여 적 100여명을 살상하고 다시 강을 도하하여 철수하게 된다.
"매포초등학교 근처에 북한군 살상관련 제보가 없다?"
후퇴해 내려가는 병력이 다시 올라와 기습전을 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우리는 매포읍 평동리의 여러 노인정과 주변 야산을 탐문및 탐사를 3~4회에 걸쳐 해 왔다.
실제 계룡대에 근무당시에는 혼자서 주말에 자가용을 끌고 이곳에 와서 그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믿을만한 제보를 얻지못했다.
전사에는 매우 획기적인 기습전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과 또한 대단하게 기록 되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특별한 제본나 흔적이 없다. 정말 기습전이 있고 성공한 것이지 ~
"성신양회 후문지역에 10여명의 군인 무덤이 있었다."
탐문중에 한 어른으로부터 매우 양호한 제보를 받았다. 본인이 과거 성신양회에 다녔던 간부급이라는 분이 우리에게 던져준 이야기는 시멘트공장을 지을 때에 이곳 도담리 맞은편 지역에 시체드리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한다. 본인이 직접 전쟁은 목격 못했지만 그 후에 복구과정에 직접 참여도 했고 여기저기 무덤들이 많았는데 그것이 북한군이지 아군인지는 잘 모른다 한다.
어쨌든 시신들이 묻혀 있는곳은 이곳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었던 곳인데 건물이 들어서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
"춘천 휴게소에서 어의곡리 이장님을 만나 제보를 듣다."
하루는 우리가 인제지역으로 탐사를 나가는 과정에 춘천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 TV에서 봤다며 본인 동네에 국군 유해가 많이 묻혀 있다고 한다. 무척이나 방가운 제보였다. 장림리와 마조리에도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들었다 한다.
"적성산성-슬음산-664고지에 남겨진 전쟁 흔적"
단양대교를 바로 지나 좌측에 적성비가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성격의 비로 국보다. 이곳에 올라서면 남한강이 다 내려다 보이는데 적성산성이다. 이 산성을 끼고 엄청난 개인호가 굴토 되어 있다. 나는 이곳을 2003년도에 발굴을 추진하여 슬음산에서 이름이 밝혀진 4구의 유해를 찾았다. 바로 묻혀진 9부ㅍ능선상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슬금산의 그 이름 채운석, 전성용, 김동활"
노동리 지역주민의 제보가 이어졌다. 본인이 직접 산에 올라 확인했다는 제보에 의해 2003년도에 부분적인 발굴이 진행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50. 8월경에 부역에 동원되어 가매장 했다는 것인데 누군가가 돌에 이름을 음각하여 놓았다는 것이다. 발굴 결과 나오는 유품도 모두가 모시나칸트 탄에 북한군 별모장, 북한군 단추등이 대부분이었다.
'03년 5월에 시작된 이곳의 발굴은 지금까지 60여구가 발굴 되어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특이한 것은 산 정상마다 많은 개인호가 즐비하게 있지만 대부분 한구덩이에 끌어 묻은 유해로 발굴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이 부역에 참가하여 북한군의 강제에 동원되기도 하고 우리가 밀고 올라간 이후는 우리의 군경의 요구에 또다시 참여하여 그 많은 유해를 묻었는데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은 별 의미가 없었다 한다. 시키는대로 괭이로 끌어당기고 때로는 칡순으로 산에서 목에 걸어 끌어내려서 묻기만 했단다.
"그럼 이 세명의 이름이 새겨진 유해의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채운석, 전성용 유해는 '51년 1월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럼 과연 '51. 1월에 이곳에 전투가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 여기서 잠깐 동부전선의 철수작전을 알아봄으로써 동부전선에 배비되는 부대들의 이동경로를 탐색함으로써 과연 이곳 단양에는 어떤 부대들이 들어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북진늘 계속하여 통일 조국의 앞날이 눈앞에 왔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 전선에서 다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를 강요받게 된다.
'50. 12. 8일 북진 작전간 철수 명령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11일 미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철수가 완료되자 먼저 국군 제3사단이 성진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승선시켜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그래서 결국 제18연대는 제3사단으로 되고 제26연대가 수도사단이 된다.
이어서 미 제1해병사단이 15일 부산으로, 미 제7사단 제32연대와 제31연대 제1대대 및 제10군단 본부, 수도사단이 17일 부산을 향해 24:00에 출항하고 국군 제1군단은 부산으로 이동 중에 명령이 수정되어 삼척으로 상륙하게 된다. 미 제3사단이 23~24일 승선을 완료하고 떠나자 흥남항은 화염에 휩싸인다.
한편 '50. 11월 말 마전리 동양리 일대에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하던 국군 해병대는 미 제3사단에 배속하여 운용되다 제1,3대대는 9일 함정으로, 해병대(-)는 15일 항공기 편으로 부산으로 철수 하였다.
'50. 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한 국군 제1군단은 묵호로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중인 관대리-현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한다. 이에따라 제9사단을 좌전방 관대라-서림에, 우전방에 수도사단을 서림-양양에 배치하고 군단 후방지역에는 3개 경비 대대를 영월, 정선, 및 하진부리에 배치하였다.
제9사단은 '50. 10. 25일에 창설하여 공비토벌작전을 주로 후방지역에서 하다 진출한 관계로 전투경험이 부족하였다. 제30연대가 방어하던 서림-인구리 지역을 수도사단에, 제28연대가 방어하던 부평리-관대리 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하고 관대리-현리-서림 지역만 방어하게 된다.
한편 서부전선의 국군 제2군단은 철수를 개시하여 제3사단을 배속받아 중동부 전선에 들어오고 38도선 경계를 위해 제3군단이 국군 제2사단과 5사단을 가평-춘천 일원 및 각 1개 연대를 연천-철원북방에 투입하고 있었고 후퇴해 내려오는 국군 제8사단을 받아 제5사단의 우측으로 춘천 우측방에 투입하여 적의 남진을 방어하려 했다.
이 당시에 적은 제69여단이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을 완료하고 인민군 제2군단 예하의 패잔병들이 오대산 일원에 2,000여명이 준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군이 '50. 12. 23일경 새로 형성된 방어선을 점령하고 진지 강화에 노력하고 있을 때에 중공군은 신정공세를 계획하고 국군 사단들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인민군 제2군단(4개 사단), 제5군단(1개 사단)을 국군 제1, 2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시켜 홍천 춘천을 차단하도록 한다.
"동부전선의 불안, 인민군의 홍천 돌파기도"
화천-양구-인제선으로 진출한 인민군은 국군 제8사단의 오항리, 제3사단의 관대리, 제9사단의 인제 정면에서 각 전투지경선으로 침투를 개시한다.
'50. 12. 23일 먼저 제8사단의 저항선을 돌파하여 홍천고개 부근으로 진출하여 좌측의 제8사단 제10연대와 협동작전을 개시하지만 결국 소양강 남쪽 내평리를 제18연대는 상실하고 만다.
결국 국군 제7사단이 이곳으로 증원되어 제18연대는 제7-8연대와 협동으로 27일 공격을 개시하여 소양강 남쪽의 정자동 일대를 일시적 회복한다. 29일에는 좌인접 제7-8연대와 병진공격으로 제18연대는 소양강 북쪽으로 적을 격퇴하고 8연대도 물노리 부근의 진지를 확보후에 제10연대에 인계후 양덕원리로 철수하였다.
"동부전선의 불안, 현리부근 전투"
자은리 북방의 소양강변에 제3사단과 제8사단이 인민군과 접전을 벌이는 동안 현리 북방의 제9사단은 방어지역 일부를 제3사단과 수도사단에 인계하고 제28연대를 원대리-현리에, 제29연대를 현리-하치전에, 제30연대는 예비로 창촌에 집결시켜 후방지역을 경계토록 하였다.
'50.12.24일 부대들이 하루종일 부대 배치에 주력하는 동안 인민군 제2군단 및 유격부대는 이러한 부대이동 시기를 간파하여 선제 공격을 감행해 와서 사단은 현리를 피탈당하고 상남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동쪽의 수도사단이 우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서림리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에 적은 산맥을 이용하여 내륙 깊숙히 침투부대를 오대산으로 들여보내고 국군은 별다른 대책없이 밀려나게 된다.
"미 제10군단의 재배치 : 미 제2사단의 홍천-원주지역 이동과 제7사단의 제천 이동"
아군은 '50. 12.23일 38도선을 점령한다.
하지만 국군이 전담한 춘천 동쪽에서 동해안까지의 방어선이 정면이 넓고 종심마저 얕아 취약점이 노출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따라 제8군사령부는 군우리에서 대량 피해를 입고 충주에서 정비중인 미 제2사단을 긴급히 홍천-원주지역으로 이동 시켰다.
흥남에서 철수한 미제10군단은 먼저 철수한 제1해병사단이 부산에, 군단 사령부와 제7사단이 경주에 집결하고 제3사단은 부대가 3/4이 해상에 이동 중에 있었다.
따라서 먼저 집결을 완료한 미 제7사단을 제천부근으로 이동시켜 미 제2사단과 춘천-인제 방면에서 원주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토록 하고 원주-제천-단양-안동간 도로의 주보급로를 경계토록 한다.
마산에 집결중인 미 해병사단은 31일 영천-경주-포항으로 이동하여 제10군단의 에비가 되고 경주 남쪽의 미 제3사단은 평택-안성으로 이동하여 미 제1,9군단지역으로 투이할 준비를 갖춘다.
바로 이 싯점에 12월 23일 미8군사령관 워커중장이 영국군 제27여단을 표창하기 위해 지프차로 서울을 떠나 덕정부근을 통과할 무렵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전사하게 된다. 그는 지난 7월 13일 부임하여 "사수방어(stand or die)" 정신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반격의 발판 마련한 진정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중공군의 신정공세('50. 12. 31~'51. 1. 1)-서울의 재실함"
중공군 제13병단이 12. 31일 일요일 17: 00에 임진강을 도하하여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신정공세의 포문을 열었다.중공군 제13병단은 자정무렵에는 증원부대를 투입하여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에 배치된 국군 제6사단을 그리고 3시간 후에는 춘천 북쩍의 제5사단을 , 새벽에는 철원-포천도로 우측의 국군제2사단을 공격하게 된다.
이 당시에 동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 제해병1사단과 장진호전투간 입은 피해가 엄청나 전선에 복귀하지 못하고 함흥 일원에서 재편성 중에 있었다.
(가) 임진강 부근 전투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낙동강-청천강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임진강변으로 철수하게 된다. 주저항선을 임진강 남쪽의 장파리-마포리-도감포일대에 구축하고 좌전방 비장리 일대에 제11연대를 우전방 도감포 일대에 제12연대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15연대는 마지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중공군 제116사단이 도감포지역으로 집중 포격 및 도하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사단의 죄익은 미 제1군단 미25사단이 문산 정면을 그 좌측은 영국군 제29여단이 임진강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나)동두천 부근 전투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이 전곡-동두천 도로 좌측 고능리 부근에 제7연대를, 우측 추동리에 제19연대로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그 좌측은 국군제1사단이 그 우측은 미 제24사단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적이 미 제24사단 지역을 은밀 침투하여 그 선두가 덕정까지 내려가는 상황에서 '51.1.1에 동두천 진지가 무너지고 철수를 하여 1. 2일에 한강 남안을 방어하기 위해 철수를 계속하여 제2연대가 광진교-신장리선에, 제19연대는 수진리에 재편성하고 제7연대는 경기도 광주에 집결하고 있었다.
(다)춘천 부근 전투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 고지군에, 제5사단을 하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 일대, 제8사단(제7사단 제3연대 증강)을 화천 저수지 남쪽 내평리에,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의 청구리 일대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51. 12. 31일 자정을 지나면서 중공군이 제2사단 좌전방 만세교리 동쪽에 배치된 제17연대를, 우전방 화악산에 배치된 제32연대를 집중공격하여 무너지고 만다.
제5사단은 북한강 서쪽 지암리 일대에 36연대, 제35연대는 북한강 동쪽의 송암리에, 우전방 고성리 일대는 제27연대를 배치하였으나 좌인접 제2-32연대의 화악산이 무너지면서 제35,36연대는 거의 건재가 무너진 상황에서 북한강을 도하하여 북배산과 용문을 경유하여 양평으로 철수한다.
제8사단은 내평리를 방어중 좌우인접 사단이 철수하게 됨에 따라 홍천으로 철수한다.
(라)인제-현리 부근 전투
중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고 있으 대에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2군단(배속 제3사단)과 제1군단(배속:제9사단, 수도사단)은 상황이 달랐다. 신정공세 이전에 후방으로 침투한 이닌군 제2,5군단 일부 부대와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은 소양강변 관대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였으나 적이 횡성 북쪽 창봉리에 출현함으로써 제23연대와 원주지역으로 올라 오고 있던 미 제2사단의 23연대가 합동으로 31일 야간에 삼마치 일대의 적을 격멸하여 퇴로를 개방하게 된다. 그후 사단은 지역을 이탈하여 평창으로 이동하게 된다.
국군 제9사단은 현리 남쪽의 상남리에서 '51. 1. 1일에 현리를 탈환 하려 용포를 목표로 공격했으나 좌측 제3사단이 무너지면서 측방이 노출되어 2일에 오히려 방대곡으로 철수하게 된다.
동해안을 방어중인 수도사단은 도채동-서림-양양선에서 주저항선을 구축했으나 적이 정면공격보다는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후방으로 진출함으로써 대사리-하진부리 일대의 적과 격전을 한다.
이에 제8군 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권을 인수한지 6일 만인 '51.1.1 정오에 미 제1,9군단은 서울 교두보선으로 철수하고 국군 3개 군단을 C방어선(한강-양평-홍천-원포리)으로 철수를 명하게 된다.
(마)서울 교두보선 확보
미 제1,9군단은 서울 교두보선(행주-의정부-퇴계원) 확보를 위해 미 제1군단은 접적이 경미한 문산지역 미 제25사단을 국군 제1사단의 엄호하에 이동시켜 원당일대로, 영국군 제29여단을 고양일대를 점령토록 하였다.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과 미 제24사단이 덕정일대에 배치된 영국군 제27여단의 엄호하에 축차 철수토록 하였다.
(사)서울 철수
그러나 계속 증강되는 중공군의 전투력과 한강의 결빙으로 도하장비 없이도 신속한 도하가 가능하다는 공병의 보고에 적의 우회공격에 대한 우려와 동부전선에 국군 부대들이 '51. 1. 3일에도 C방어선(양평-홍천-원포리)을 점령 못하자 그 남쪽의 D방어선(평택-안성-장호원-원주-원포리)마저도 점령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한강이남 D방어선으로 처수를 명하게 되어 1.4일 서울을 넘겨주게 된다. 전쟁 발발후 3번째의 서울 실함이었다.
(아)평택-삼척선으로 철수
미 제1,9군단이 서울교두보선에서 철수를 준비하는 동안 중공군의 위협적인 공세는 없었었으나 아군이 D방어선으로 철수하게된 결정적 동기는 동부전선이 돌파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원주 이남지역으로 침투하고 산악지역을 통하여 내륙으로 진출한다면 미 제1,9군단이 포위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중동부전선의 위기 : "단양-영월 돌파구"
신정공세 당시에 중공군은 주공을 서부전선의 미 제1,9군단 지역으로 지향하였고 조공은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을 공격하였다.
인민군 제2,5군단은 중서부전선 부대의 측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태백산맥의 험한 준령을 이용하여 중동부전선으로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원주를 방어중인 미 제2사단 정찰대가 포로를 잡아 심문과정에 적의 기도를 알게 되었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5군단(제6,7,12,27,28,43사단)은 전면공격으로 원주를 점령하고 최현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2군단(제2,9,10,31사단)은 29번도로의 동쪽 산악을 타고 접적을 회피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하여 원주, 제천, 단양 그리고 대구로 공격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5천~7천5백명의 유격부대를 단양부근에 집결시켜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국군 제1,3군단은 '51. 1. 1일에는 C방어선(홍천-원포리), 5일에는 D방어선(원주-원포리)로 철수하게 된다. 이때 현리 부근의 제9사단은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로 이동 중에 있고, 홍천의 제3사단은 홍ㄹ천-횡성을 경유 평창에 집결하고 퐁천-춘천으로 북상하던 제7사단은 춘천 동북방에서 퐁천-횡성-원주를 경유 목계-창동으로 철수하게 된다.
미8군사령관은 국군이 D선을 점령도 하기전에 다시 64km 후방으로 수정된 D방어선인 원주-정선-삼척선으로 수정하여 점령토록 한다.
이에 따라 제3사단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이동하고 제7사단은 신림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적과 격전을 하고 제9사단은 장평리에서 적과 격전하며 정선으로 이동 중에 있어 아직 지정된 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민군 제2군단은 아군의 전투지경선이나 부대 교대등의취약점을 이용하여 내륙 깊숙히 침투하여 선두 부대인 제2,9사단이 새로운 방어선인 원주-삼척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길원팔부대를 통합지휘하게 된 인민군 제2군단은 군단 주력으로 정면을 공격하고 제2전선부대를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에 침투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 되었다.
따라서 영월일대에 대돌파구가 형성됨에 따라 미 제8군은 미 제10군단에 적이 영월 남쪽으로 넘지못하도록 저지하도록 한다. ###
이상에서 북진에서 다시 38도선을 넘어 서울을 실함하는 1.4후퇴, 적의 중동부 전선의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 단양-영월돌파구가 형성되는 '51. 1월 초의 위기에서 단양은 많은 부대들이 거쳐가는 격동의 현장이었다.
초기 전투에서는 국군 제8사단과 인민군 제12사단이 접전을 치렀지만 그후에 중동부 전선의 병참선 방호에 주요 거점이 되면서 국군은 1.4후퇴시 제3사단 제7사단이, 미군 또한 제2사단과 제7사단이 그리고 제1해병사단이 이 지역을 점령 내지는 일시적 거쳐가는 중에 북한군 제2군단 주력과 유격부대, 제2전선 부대원들이 소백산맥의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실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너무나 많은 애환이 남아 있는 것이다.
"미국놈들 조~0으로 맹그러진 새끼"
마조리와 장림리 그리고 어의곡리에 들어가 동네 어른은 다 만나 보았다. 이곳 단양은 석회석의 산지다. 어디를 가더라도 시멘트냄새가 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동굴이 많기도 하다. 고수동굴, 천동동굴, 노동동굴, 온달동굴/온달산성이 있으며 불교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가 있는 곳이다.
이렇게 구단양, 남한강 남안지역은 소백산 국립공원으로 천연자연이 숨쉬고 있지만 '50년대 전쟁의 아픔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우리가 처음 마조리지역에 들어간 것은 2000년도였다. 영화 엘컴투 동막골의 미군조종사와 인민군의 동숙을 보면서 그 현장이 아직 있다는 제보에 따라 이곳을 찾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그런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남아서 구전되고 있었다.
"그때는 누가 빨갱이인지 서로 고자질에 다 죽었다."
동네에 들어가 연세가 가장 많은 어른을 찾았더니 바로 마을 입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궂이 집으로 올 필요가 없다는 말에 약간은 의아했지만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기다리는 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70세가 되었다는 아버지는 바로 길옆 밭둑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으셨다. 아버지는 지금 이 동네에서 그런대로 잘 사는 집안이다. 자식들은 서울에 올라가 있어 내외분 둘이 살지만 넉넉한 편이다. 6.25전쟁 당시는 19살이었으나 병을 얻어, 그 당시에 장티푸스인지 결핵인지 걸려서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다.
전쟁이라는데 국군이 우하고 모려 오더니 집안에 남아나는 것 없이 다 가져갔다. 그러더니 얼마 있어 인민군이 왔다는데 얼마전 동네에서 사라진 형이 앞장서서 들어왔다
"어르신, 아니 이 산골짜기에도 그 당시에 프락치들이 많았습니까?"
"조금 배웠다는 사람은 대부분 빨갱이가 되었다고 보면 돼요."
"혹시 동네에 전쟁 전부터 그런 사람들이 있지않았나요?"
"맞아요, 전쟁 나기전에도 밤이 되면 모여서 곧 해방군이 온다는 등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
"여기도 그런대로 잘사는 집들은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까?"
"뭐 동네라야 화전민이 태반이었지. 일제시대에 먹을 것이 부족하니까 못사는 분들이 이 계곡으로 들어와 움막을 짓고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지금 단성역 일대로 나가 노무자를 많이 하고 살았지"
"그당시에 이미 이곳에는 빨갱이라고 하는 좌익분자들이 들어와 못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역활을 했겠네요?"
"그때는 선동인지도 몰랐어. 다같이 힘든 세상이다보니 다들 해방이라니 잘사는지 알았지."
"동네는 숙대밭이 되었다. 개들이 여우들이 판치고 다녔다."
그런데 전쟁이라는데 국군은 하루이틀 만에 빠지고 인민군이 들어왔다. 동네에서 환영행사도 했다고 한다. 지금 말하면 다 알만한 동네사람이 앞장서서 태극기를 들고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언젠가 동네에서 사라진 형이 멋진 복장을 하고 앞에 서 있다.
총을 들고 수류탄을 차고 나타난 병력앞에 태극기를 흔들며 맞이한 장소가 바로 마을 입구에 있는 지금 정자가 있는 곳이란다. 해방이 되었다고 모두를 좋아하는데 밤마다 모이게 하여 장백산가를 부르고 김일성 만세를 불러댔다.
어르신은 병에 걸려 나가고 싶어도 못나가는 신세였다. 동네는 소백산이 바로 남쪽에 버티고 서있어 해도 늦게 들어오는 곳으로 숨어지내기에 좋은 곳이다. 국군이 밀려 올라간 곳이 이곳 동네보다 높은 산악지형이라 돌고 도는 계곡으로 인해 수시로 총소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처음 전쟁은 얼떨결에 지나갔다. 국군이 많이 죽은 것도 아니고 별로 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산속에 죽은 시체들이 더러 있었다. 옛날에는 여우도 많았다 한다. 그러다 보니 여우들이 시체를 물어뜯고 냄새가 나다보니 동네 개들이 몰려 올라가 물어뜯고 다녀, 어떤 개는 허벅지를 물고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개는 팔뚝을 하나 물고 오기도 했다.
"우리집이 인민군 대장이 머물렀다."
꽤나 잘생긴 놈이 벨트를 차고 나타나더니 어르신네 안방을 차지한다.
7월이 다가고 8월이 왔는데 그때는 비도 억수같이 내렸다 한다. 그런데 서서히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의용군을 모집한다며 해방전선에 모두 가야한다고 떠들석 거렸다.
동네라봐야 군에 갈 또래는 불과 몇 안되는데 다 잡아간다. 어르신은 이때도 병으로 위기를 모면했는데 대신하여 아버지가 노무자로 밤마다 어딜갔다 새벽에 오곤 한다. 이제 먹을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심지어 부녀회장이란 엉뚱한 여자가 나타나 이집저집 뒤지기도 한다. 이 여자는 이곳 광산골에 일하는 남정네들 하고 노는 여자인데 감투를 쓰고 난리다.
"이갓나새끼 죽이라우?"
그런데 하루는 어디서 젊은 사람이 한명 붙들려와 마당에 삼각대를 펼쳐 만들고선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수시로 두둘겨 패고 물을 붓고 난리인데 물어보는 소리가 아마도 군인이 어디 숨어 있다 붙잡혀 온 모양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죽었고 다른 인원들이 멍석에 말아서 어디로 들고 나갔는데 위치는 모른다고 한다.
이제는 어디서 오는지 어린 학생들이 모자를 쓴채로 이곳으로 들어와 밤새 산을 타고 올라간다. 아버지는 이 사람들의 안내역으로 풍기를 지나 영주넘어 안동까지 갔다 온다고 한다.
"전쟁에 밀리는 북한군의 종말"
전염병 덕택에 군에 끌려가지않은 어르신은 집안에 있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고같은 곳에 머물며 어머니가 갔다주는 밥을 먹고 연명했다.
농사를 짓는 한 여름의 마조리는 하지만 총칼이 눈앞에 서있고 논에는 피들이 삐쭉삐쭉 벼들을 재치고 고개를 들고 있어 어느게 벼고 어느게 피인지 구별이 힘들게 되어갔다.
자연의 섭리는 계절을 따라 찾아와 어느새 벼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데 갑작스레 주판을 들고 나타난 알지못하는 인원들의 세금을 받아내기 위한 착취가 시작되었다.
노동자, 농민의 천국이 온다던 구호는 어디가고 현물세를 받기위한 그들의 집요한 노력이 점점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데 하늘에 비행기가 나타나 뭘 떨어드리고 갔는데 바로 뻥하고 검은 연기와 함께 번쩍거리는 빛이 온 동네를 휘감쌌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난리가 났다. 집들이 불타기 시작하고 산에 나무잎들도 까맣게 타들어가 세상이 시꺼멓게 변해갔다. 이제 낮에는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한다. 밤에는 더욱더 빛을 내면은 바로 잡아가 족쳐버린다. 미군의 공습이 다가서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군인들이 잡혀와 꿇어앉아 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군인들이 포로가 되어 오다니 지켜보는 아저씨는 비록 군대는 못갔지만 같은 젊은이로써 동질감은 있었다. 군인만 있는게 아니라 어느날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민간인들이 끌려와 있다 사라지곤 했다.
끌려와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키가 크고 코가 큰 외국인도 있었고 여자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낮에는 비행기가 빙글빙글 돌면서 불폭탄을 터트리고 밤에는 이제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체로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아니 군인 양반 그거 불폭탄이 원지폭탄 아니요?"
"아닙니다. 네이팜탄이라는 폭탄 입니다. 하늘에 휘발류를 뿌리고 공기중에 산소를 압축하여 불을 붙이면 큰 굉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산소가 응집하여 폭발하게 되어 3,000도의 고열이 발생하여 순시간에 검게 태워버리고 절명하게 되어 큰 피해가 나며 주변에 불이 붙게 되는 포탄입니다."
"북한군들이 원저폭탄이라고 했어요?"
"혹시 포로들이 있으면 부상자가 있어서 죽으면 어디에 매장할텐데 그걸 보신 적은 없나요?"
"있지, 그놈들이 동네 부역자와 그리고 군인들 몇이서 죽은 사람을 저기 산밑에 밭언저리에 수시로 묻었다고. 미군놈도 있었는데 미군은 양키들이 와서 파 갔어요?"
"네? 미군은 파 갔다고요?"
"그럼, 그놈들은 들어오자마자 동네사람들을 쫒아다니며 한국군이 물어보고 다니고 알려주면 바로 파서 무슨 비닐백에 담아 가고 함께 있던 시체는 그대로 다시 덮어버리고 가더라고."
우리는 어르신을 모시고 산 밑에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진입하여 걸어서 현장을 확인했다. 칡순이 엉켜서 자라고 잡목이 자라고 있지만 비교적 평이한 곳이다. 어르신 이야기는 분명 국군을 본적은 없지만 군인이 죽어서 묻혀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이것만이 아니였다. 바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마을 입구 정자아래에 개울물이 흘러서 돌아나가는 곳에 수많은 인민군이 묻혀 있다고 한다.
"아니 그건 어떻게 인민군인지 알고 계세요?"
"그건 나도 국군이 들어와 동네에 죽어있는 시체를 거둬서 한 곳에 묻는 일에 참여를 해서 알지요. 그러니까 '50년도는 아니고 '51년도 4월쯤 되는 것 같은데 봄이 와서 쑥들이 자라고 있을 때거든."
"얼마나 묻었는지 혹시 기억않나세요?"
"그때 인민군이 동네에 들어왔다가 미쳐 도망치지 못하고 미군폭격이 폭격을 해서 미군도 거의 1개 소대는 죽었을 거야. 미군은 바로 들어와 다 찾아갔고 나머지 시체만 그슬린체로 창자도 뛰어나오고 눈알도 빠지고 차마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이걸 동네 사람들을 불러내서 단가로 들어다 저 물가에 크게 웅덩이 파고 다 집어넣었지."
"미군들은 어떻게 발굴해갔어요?"
"그놈들은 들어와서 천막을 치고 발굴하는데 우리는 얼씬도 못하게 하더라고. 헬리곱터도 저 밭에 와서 앉아 있었지."
"이 동네에는 미군이 의외로 많이 죽었네?"
"장림리 대강터널에 가면 지금도 그 당시에 미군이 죽어서 묻혀 있다고 하는 분이 있던데?"
"네?. 그렇습니까?"
"광옆에 미군이 피흘리고 죽어 있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저기 철로 밑에 묻었다."
찾아간 아저씨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나와 같았다. 나이는 나보다 12살이 많아 전쟁때는 5살이었다. 원래는 집안이 노동리에 살다가 해방되면서 이곳 장림리 철로변으로 왔다고 한다.
전쟁이 나서 국군을 따라 소백산을 넘어 풍기까지 갔으나 더이상 가지 못하고 산속에 있다가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에 소백산 안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피난민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특히 1.4후퇴 당시는 서울사람도 있고 이천사람도 있고 계곡에 숨어서 뭉쳐 있었다 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집안이 잘살고 있지 않했기 때문에 프락치들의 손가락질 대상이 아니라서 피해는 보지않했다. 그때는 머슴이나 조금 없이 사는 사람들이 살판이 나서 동네를 휘젖고 다니고 완장을 차고 기고만장하게 한 몇개월 지냈다고 한다.
우리는 알려준 분을 모시고 그 집으로 찾아가 아저씨를 만나 그 광이며 묻혔다고 하는 장소를 탐사했다. 바로 집위로 철로가 있고 대강터널이 있었다.
"혹시 미군이 들어와 발굴을 해 가지는 안했는지요?"
"미군이 들어와 찾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곳은 왔는지 모르고 이후에 나는 군대에 갔다왔서 서울에 직장생활을 하다 40넘어 들어 왔어요. 그리고 일부 철로변의 밭이 개간으로 평탄하게 된 곳이 있어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가 가져온 탐지기로 주변을 탐사했으나 뚜렷한 징후를 찾지는 못했다. 동네 마을회관으로 안내되어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덕산리 강변에 당시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뗏목처럼 몰려들어 그걸 건져서 다 묻었다고 해요."
"제천 청풍면 수산리에 가면 눈섭산도 있고 뱀산도 있는데 북한군 탱크가 뒤집혀 북한군 장교가 죽어서 묻혀 있다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 것은 조사하지 않나요?"
"제천 오미저수지에 우리 8사단이 물속에 들어가 엄청 들어가 죽었다고 하던데."
"제천 장락동에 아군을 화장해서 수십구를 묻었다고 한다."
"제천 강제동 망월리 야산에5구의 참전영사 무덤이 있다."
"제천 대랑골 5번 국도 정상에 6.25참전 용사인 국군 대위의 무덤이 있다."
"신림 감악산(945m) 백련사 부근에 많은 군인이 죽었다고 들었다."
"미노리 아세요? 그곳에 가서 나이 많은 선생님을 찾아봐요.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알거요."
"내가 연화봉 천문대 공사에 가서 일했는데 교통호를 파다보니 별개 다 나왔는데 지금은 어덯게 되었느지 궁금하네요?"
"많은 제보가 쏟아졌다."
"아니 어르신들은 이곳 사람인데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고 있어요?'
"그당시에 제천이나 단양, 봉양은 같은 생활권이었어요. 춥고 배고픈 시절이라 주로 역전에서 하는 일이니 시멘트 탄광에 나가는 일이 전부라 모이면 그런 이야기야. 죽령역 일대는 길거리에 시신이 널려 있어서 걸어가면서 차고 다녔는데 어느날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고."
"전후에 누가 와서 시신수습을 안했나요?"
"하긴 뭘해? 보기 싫으니까 길 옆 개울창에 밀어 넣어버리는거야. 배고픈데 뭐 보이는 것 없어요."
"아니 미군이 단양지역으로 발굴 작업하러 왔다던데 못만나 보셨나요?"
"오긴 왔지. 그런데 뭘 좋다고 누가 일하다 말고 나서겠어?"
"포상금도 주고 나름 주민들에게 성심껏 했다고 하던대요."
"그런소리 말아요. 우리가 말을 안해서 그렇치 그 놈들 나쁜짓 많이 했어. 어찌나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인민군이 집에 총을 들고 숨어들어 있는데도 '색시 색시'하며 들이대는거야" 이 일대는 제대로 된 여자없었어요. 늙은 할망고부터 어린애까지 다 겁탈했다고 보면 돼. 오죽하면 "미군놈 조0으로 망그러진 놈"이란 비속어가 있겠어요."
"죽령역의 비밀-음지마을 아주머니의 고백"
"이곳 장림은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55번 도로와 36번도로, 5번도로가 죽령을 관통하여 풍기 영주 안동으로 이어지고 철도가 지나간다. 또한 지방도 927번도로를 이용하면 미노리에서 저수령 고개를 넘어 경북 예천으로, 직타리에서 도락산(964m)동쪽을 경유하여 황장산(1077m) 쉼터를 경유하여 경북 문경 동로 적성리로 들어서는, 전쟁당시 인민군의 유격대와 제2전선부대들의 주요 이동 통로였다.
우리 제8사단은 이곳 일대에서 전투를 하고 축차적으로 소백산을 넘어서며 금강-소백산선을 지키게 된다. 죽령을 깃점으로 우측에는 강원도 경찰병력이 죽령 일대는 사단 공병이 축차진지를 구축하고 남한강 남안에서는 국군제8-10연대가 우측, 21연대가 좌측에서 혈투를 거듭하며 7월 12일까지 소백산(1,440m)~죽령~도솔봉(1,316m)선에서 지연전을 실시 하였다.
그후에 이곳은 주요 병참선 방호작전이 실시 되면서 인민군이 동네에 들어와 약 3개월간 안전히 아지트를 구축하고 행정기능까지 갖추면서 주민을 통제한다. 그러다 북으로 밀리면서 많은 북송 포로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다시 북으로 가지도 하고 이 어디에서 죽는가 하면 미군도 포로로 붙잡혀 오거나 정찰대로 들어 왔다가 미쳐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오열들에게 붙들려 죽기도 하고 포로가 되어 머물다 북으로 끌려 가기도 한 곳이다.
"마조리의 38구 유해"
"마을 입구에 묻혀 있다는 대량 유해는 누구?"
"장림리의 미군유해"
"연화봉에 피는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