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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준비과정들을 보면 당시 일본과 백제는 하나의 혈육처럼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죠. 덴지천황의 생부는 백제대왕이라 호칭되는 조메이천황(서명왕)으로 백제의 일본 발음인 '구다라'로 불리던 구다라강변에 구다라궁과 구다라절을 짓고 살았다는 인물입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학설 중에는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것으로 알려진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 조메이천황이 되었다는 성왕 = 조메이천황 동일인물설이 있습니다. 아울러 한성백제가 고구려군에게 공격당했을 당시 형(혹은 아버지)인 개로왕으로부터 일본으로 지원군을 청하러 갔던 곤지가 현존하는 일본 천황계보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인 게이타이천황(450~534)과 동일인물이라는 설까지도 있답니다. |
그렇고 663년 음력 9월 8일 거대한 규모의 백강전투가 벌어집니다.
당시 전투는 일본과 백제의 완패였는데, 숫적으로 밀리기 보다는 전략에서 완전히 뒤쳐졌다는 게
역사서들에 적힌 동일한 내용입니다.
당시 일본군만도 1만명이 전사하고 병선 400척을 잃고, 백제인 400명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지요. 그래서 백제의 멸망시기를 31대 의자왕 시절인 660년이
아니라 32대인 풍왕(풍장왕이라고도 불림) 663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네요. ^^;;
이 아름다운 오솔길은 부소산성의 중앙 봉우리 주변에 쌓은 퇴뫼식 산성의 경계로 보입니다.
이때 설명드렸듯이 부소산성 전체를 보면 계곡을 감싸고 사람이 주거할 수 있는 포곡식이고요.
그 안에 봉우리 주변을 작게 감싸는 내성을 머리띠를 둘른 듯 하다고 하여 퇴뫼식이라고 부른답니다. ^^
궁녀사는 백제 패망 당시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고 이야기하는 삼천궁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6년 세워졌다고 합니다.
궁녀사 현판은 부여출신으로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종필 씨의 글씨라고 하네요.
이날 설명드렸지만 의자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당나라군이 쳐 들어왔을 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절개를 지켰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삼천궁녀 이야기는 역사서에 나오지도 않고, 당시 백제의 인구수나 국력으로 보았을 때 가당치 않은 수준이랍니다.
당시 백제 인구 등을 감안하면 170명 수준이었을 거라고 하네요.
다만 3천 이라는 숫자를 '많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전설로 구전되었을 것이라는 게 유력한 학설입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신하들의 반대에도 궁녀를 가장 많이 늘린 영조 때의 궁녀 수가 684명이었다네요. ^^;
사자루에서 바라본 백제문화단지의 오층목탑.
저 목탑은 우리가 백제왕릉원(능산리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있던 능산리절터에서 발굴된
능산리사지의 절 규모를 1:1로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여나성을 걷고 박물관을 들린 후 여기를 가보려고 했으나
1박2일이라는 시간적 제약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제 주변에 있던 몇몇 분에게만 설명드렸는데, 이제는 다 아시겠지요? ^^;;
낙화암 백화정입니다.
아직도 백화정을 검색하면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에 세워졌다고 나온답니다. ^^;;
사진에 나오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7기를 중심으로 좌우로 중소형 고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
익산으로 천도를 준비했던 혹은 천도를 했던 무왕과 선화공주를 제외한 사비시대 백제왕(성왕, 위덕와, 혜왕, 법왕)들이
모두 이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숨지고, 낙양성 북망산에 묻혔다고 합니다. 1995년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다시 부여로 모셔오려고 현지 답사팀이 출발했으나 1920년 출토된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의자왕의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흙을 담아갖고 와서 부소산성에 있는 고란사에 봉안합니다. 그러다가 지금 능산리고분군
서쪽 언덕에 가묘를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만들고 백제의 장례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하는 의미의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지석을 만들어서 태자 부여융묘와 의자왕릉에 매설합니다. 오시다 보셨지요?)
이 왕릉 추정 고분군 중 2호분(사진 상의 중앙)은 공주에서 만난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을 아치형으로
마무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무덤을 무령왕의 아들이자 사비로 천도를 했던 성황의 무덤으로 추정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도굴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도 다 쓸어가서 발견된 것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 사진상 오른쪽인 1호분이 이 고분군 중에 가장 유명한데요. 바로 능산리 고분군 중 유일하게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이기 때문이지요. 사신도는 고구려와 백제의 교류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다만 고분을 개방하면서 퇴색이 빠르게 진행되어 지금은 영구 폐쇄하고 같은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지요.
아래 그 모형 내 사신도가 바로 아래사진입니다.
고구려 사신도와 비교하여 굉장히 선이 부드럽고 정감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능산리사지에서 1993년 12월 12일,
백제왕릉원 주차장 부지확보를 하기 전에 혹시 몰라서 진행한 예비시굴 때 백제 당시 토층이 발견되고,
대대적인 발굴을 벌이다가 절터의 목곽수로 안에서 발견된 금동백제대향로의 발견 당시 복원 모형입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더불어 백제문화 최대의 발굴로 일컬어지는 향로의 발견당시 모습이 이랬군요.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무너질 때 얼마나 급한 마음이었으면 향로를 이렇게 감춰두었을까요.
1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렇게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진흙 속에서 진공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우리나라 주요 국보들이 움직일 때 책정하는 보험료를 역산하여 가격을 매긴 것을 보았는데요.
가장 높은 가격은 여러분들 잘 아시는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으로 2013년 뉴욕전시회를
앞으고 보험평가위원회에서 책정한 5000만달러(약 500억원)이라고 하네요.
경주 황남대총의 금관은 현존 금관이 6개나 되어서 가격은 1000만 달러가 책정되었다네요.
그렇다면 백제금동대향로의 책정가격은 과연 얼마일까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 금동 백제대향로가 딱 한 번
움직인 적이 있었는데요. 바로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용산) 개관전시회 때입니다.
그때 보험산정액이 3000만달러(300억원)이었는데, 그것을 현재가치로 추산하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같은 5000만달러(약 500억원)정도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문화재를 화폐가치로 따지는 것이 다소 상스러워보이기도 하지만
수치적으로 분석해보니 백제금동대향로가 더욱 값져보이는군요.
지금 저 뒤로 보이는 기단에 백제문화단지에 있었던 높이 38m의 5층 목탑이 서 있었을 것이라네요.
일본 호류지 5층 목탑이 31.5m라고 하니 더 거대했을 그때를 상상해봅니다.
능산리절은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기리기 위해 세원 왕실의 원찰입니다.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형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요.
당시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이런 투명한 액자가 자리하고 있더군요.
역시나 저 목탑은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 나라의 호류지 5층 목탑을 참조했다고 합니다.
실제 백제문화단지의 목탑 결구방식도 호류지 목탑을 참고했다네요.
일반적으로 목탑의 정 중앙에 있는 가장 굵은 나무인 심주 밑에 심초석을 놓고,
그 밑에 부처님 사리를 묻는 사리함을 둡니다.
90년대 능산리사지 발굴 당시에 목탑 심초석 밑에 있던 화강암 재질의 사리감이
발견되었고, 사리감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이 절이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란 걸 알게 되었답니다.
백제왕릉원 전시관에서 김경남 해설사님에게 전반적인 백제의 사비시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온몸을 써가면서 하시는 해설이 정말 일품이었네요. 근래에 이정도 해설 잘하시는 분 못본 듯합니다. 짱!
능산리고분군과 별도로 이 나성도 세계유산에 등재가된 자랑스런 유적이랍니다.
나성을 걸어 박물관을 향하면서 많은 분들이 뒤돌아보며
뭔지모를 쓸쓸한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패망한 나라의 왕릉과 폐사지가 주는 묘한 느낌에 저도 자꾸자꾸 뒤로 보게 되었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백제가 단지 패망한 고대 국가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의 원류 중 하나를 만들어낸 위대한 나라였음이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닿습니다.
오! 드디어 백제금동대향로 진품을 친견하게 됩니다.
다들 대향로 앞에서 감탄에 감탕을 하시더군요.
주로 복제품만 보다가 진품을 보니 역시나 진품의 품격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로 복제품을 만들 때는 진품보다 조금 크거나 작게 만들어서 오랜세월이
지나도 진품과 복제품을 확실히 알아보게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조금 전 능산리고분군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주 본 금동대향로 복제품과 비교해보면
조각이 매우 치밀하고 세밀했습니다. 복제품을 일부러 진품대비 투박하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봉황과 더불어
다리를 이루며 향로받침을 입으로 물고 있는 용의 발톱 등 디테일이 캬....
높이 64c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금동대향로라는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향로를 바탕으로 백제스타일로 재구성한 것으로 봅니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몸체 하단에는 24개의 연꽃잎이 받치고 있고 그 안에 물고기, 신령스런 새, 짐승 등 도합 스물세 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뚜껑 부위에는 74개의 산과 봉우리가 솟아있고, 그 사이 계곡에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서른아홉마리의 동물과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을 하는 사람과 낚시를 하거나 말을 타고
수렵하는 장면의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나온답니다.
특히 코끼리나 원숭이 처럼 한반도에는 없는 동물들은 국제적인 교류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과거 복제품을 갖고 금동대향로에 실제 향을 피우는 시연을 해 보았는데,
향의 연기가 산봉오리 사이에 걸치면서 퍼지는 모습이 정말 환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동대향로 시연을 정기적으로 하고자 시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종교적인 민원이 들어와서
1회로 끝나고 말았다고 들었네요.
그리고 2014년 제60회 백제문화제 할 때 일본에서 갖고온 백제시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료를 소개하고
백제금동대향로 복제품에 시연한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올해 백제문화제는 9월14일부터 9월22일까지라고 하네요.
정말 감탄 밖에는...
X-선으로 촬영한 결과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 설계에 의해 주조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총 12개의 배연구가 있는데, 그중 두 개는 봉황의 가슴에 있고, 나머지 10개는 산 봉우리 뒤에
살짝 가려져 있더군요.
배연구는 지금 0.6cm의 것과 1cm짜리가 있는데, 1cm 짜리는 만들고 난 후
향연의 배출이 원활하지 않자 추가로 나중에 뚫은 것으로 보여진다고 합니다.
봉황의 날개에 새겨진 깃털 무늬하며... 정말 디테일의 끝판왕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절터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입니다.
백제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부여국립박물관 전시실에 만들어 놓은 서산마애삼존불 복제품입니다.
참 언제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백제의 미소입니다.
--------<익산편>----------------
따듯한 식사를 마치고 찾은 곳은 백제의 일곱번째 세계유산인 익산 미륵사지입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백제의 절터 중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라는 미륵사지는
국내 최대의 사찰터이자 동양 최대의 석탑을 보유하고 있다는 수식어도 갖고 있습니다.
미륵사지의 창건기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인데요.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된 마동, 즉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의 사자사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에 지금의 미륵사지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선화공주 이야기가 허구였을지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니... 그건 저 밑에서... ^^;)
당시 백제의 모든 기술이 총동원되었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신라에서도
기술자들을 보내는 등 국제적인 기술이 모두 집약되어 미륵사지가 당시 지어졌을 것으로 봅니다.
1974년 8월 원광대학교 발굴팀에 의해 발견된 동탑터에 1993년에 현대기술로 9층으로 복원한 동탑이 보입니다.
왼쪽의 가림막 안에서 17년간의 복원을 마친 서탑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유물전시관에서 미륵사지 당시의 복원 모형을 보면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습니다.
저 복원 목탑 역시 호류지의 것을 참고하였다고 하네요.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는 매우 특이한 방식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창건 설화에서 볼 수 있는 미륵 삼존을 모시기 위해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탑과 금당(본당)을 갖춘 삼원가람 형태라는 것이 1974년과 75년 조사에서 밝혀집니다.
그전에는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이곳을 조사하고 백제의 1탑 1금당 방식이 品자 방식으로
배치되었다는 게 통설이었거든요.
아무튼 미륵사지는 국내 유일의 3탑 3금당 가람배치를 갖는 사찰입니다.
(금당이란? 금당이란 표현을 잘 안쓰기에 모르실 분이 계서서 부연합니다. ^^
금당이란 부처님을 보통 금으로 쓰우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이란
뜻으로 금당을 씁니다. 즉, 부처님을 모시는 절의 본당이랍니다.)
잠시 후 만나보게 될 서탑의 복원 전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최고급 건축기술이었던 시멘트로 발라 무너지는 것을 막아놓았는데요.
지금 비용으로 4억원 정도의 보수비용이 들었다고 하네요.
당시 일본 학자들도 미륵사지 석탑이 매우 가치가 높아서 어떻해서든 무너지지 않게 해야한다고
강력하게 보수예산을 요구했다네요.
미륵사지 서탑 복원 중에 2009년 1월 14일, 중앙기둥인 심주를 해체 조사하던 중 금으로 만들어진 사리항아리와
당시는 보석이나 나름없었던 유리구슬 등이 발견됩니다.
사진은 발견 당시를 재현해 놓은 사진입니다. 당시 발견한 분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미륵사지가 선화공주가 발원한 것이라는 기록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이 황금 사리봉영기가
저 사리장치와 함께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오며
삼국유사의 주장인 선화공주 발원설이 살짝 흔들렸답니다.
이 금판의 내용인 즉 좌평대신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리봉영기 때문에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 것이지요.
하지만 미륵사지는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3당 가람체제를 갖고 있기에
서쪽 가람은 무왕의 둘째부인인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하고, 40m 목탑이 당당하게 서 있었을
중앙가람은 선화공주가 발원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정리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었을 것이라는 미륵사지 서탑은 가장 큰 석탑이기도 합니다.
석탑 외부에 노출된 돌만도 580개이고, 내부의 돌까지 합치면 28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여러번 설명드렸다시피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중간쯤에
있는 탑이라고 하겠고, 석탑으로 완전하게 변형되어 완성된 형태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봅니다.
신라의 석탑이 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전탑에서 왔다면
백제의 석탑은 나무로 끼워서 만드는 목탑에서 온 것이지요.
그렇다 보니 미륵사지 석탑은 마치 나무를 끼워서 넣듯이 돌들을 끼워맞춰서 세우게 됩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내부에 쌓은 돌들은 제각각 크기나 쌓는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매우 불규칙합니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 학자들이 궁금해 했다고 하는데, 그 궁금증은
1993년에 현대기술로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이 스스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93년 탑터만 있던 곳에 9층으로 다시 동탑을 세울 때 현대적인 연마기술로
돌을 똑같은 크기와 높이로 균일하고 규칙적으로 쌓아서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쌓은 동탑에서 균열이 생기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겁니다.
즉, 돌을 불규칙적으로 쌓아서 미륵사지 석탑을 쌓은 것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설계에 따라 불규칙하게 쌓아서 오랜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자,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탑을 보러 갑니다.
자, 다시 차를 타고 온 이곳은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백제 세계유산인익산 왕궁리 유적입니다.
이곳은 백제 무왕의 천도설과 또 다른 도읍이라는 별도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자식이라는 안승이 세운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인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공존하는 유적입니다.
실제로 발굴조사결과 이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것으로 봅니다.
백제후기부터 통일신라 후기까지를 보고 있지요.
석탑 동쪽 30m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가마 2기가 발견되었고요.
탑을 둘러싼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도 나왔습니다.
또한 도기로 만든 관과 나무를 이용한 상하수도 시설도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그밖에도 몇몇 옛 사료에도 이곳이 옛날 궁궐터였다고 하거나 마한의 궁성터라고 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근래들어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대규모 화장실 시설이 발견되는 등 익산 왕도설이
힘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것은 아직도 백제사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발고대 왕궁터로 추정되는 정전 건물터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터, 발굴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이 있다고 합니다.
즉, 백제 시대 때 왕궁으로 조성되었다가 후대에 왕궁의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을 건립했다고 하네요.
왕궁의 규모는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정도로 보고 있답니다.
(경복궁의 경우 현재 동서가 약 500m, 남북이 850m 정도입니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향후에 어떤 대단한 자원이 나올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2008년 개관한 유적전시관에서 해설사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석탑의 조성시기를 두고 설들이 분분하답니다.
지붕돌의 모습은 백제계 석탑을 따르고, 탑신부의 결구 방식이나 받침표현은
신라석탑 방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보수공사 시 발견된 사리장치 등을 보아 고려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심초석과 심주의 구조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받침돌 구조와 일치하여
백제시대에 목탑을 석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건립되었다는, 즉, 백제시대 석탑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한다네요.
돌아오는 길에 고도리석불도 보러갑니다.
동서로 미륵불이 한분씩 계시는데, 동쪽을 동고도리석불, 서쪽을 서고도리석불이라고 합니다.
동네 행정명도 동고도리, 서고도리 그렇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궁리터는 동, 서, 북쪽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동고도리석불과 서고도리석불 사이를 흐르는 익산천으로 기가 다 흘러내려간다고 하여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양쪽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보물 제46호로 지정된 이 석불입상들은 음력 12월의 돼지날에 익산천이 얼어붙으면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는
전설도 전한다고 합니다.
발도행의 2018년 첫 정모로 진행된 1박2일간의 백제 세계유산 따라걷기로 우리들이 다녔던 여정입니다. 예고드린바와 같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가야문화 답사여행은 4월 하순으로 예정합니다. 가야문화답사의 전체적인 일정들은 만들어 놓았고, 먹을거리와 숙박 등을 정리하고 있답니다. 가야문화답사는 (김해 대가야 -> 밀양 -> 함안 아라가야 -> 창녕 비화가야 -> 고령 대가야 -> 성주 성산가야) 순으로 진행되며 최소 2박3일 이상이 필요하여 금~일 2박3일로 준비중입니다. 현재는 고령 5일장날을 고려해서 4월 27~29일로 해볼까 생각하며 토로님과 상의중입니다. 이때는 장거리 이동임을 감안하여 25인승 vip리무진으로 추진하려고 합니다. 좋은 먹거리와 숙소 등을 예약하고 진행하시느라 애쓰신 토로님께 감사드리고, 쉬셔야 하는 날인데도 운전을 해주신 태도사님께도 깊은 감사올립니다. 또한 좋은 여행에 함께 동참해주신 회원님들께도 고마운 인사전합니다.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길에서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발견이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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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20180203~20180204 1박2일 백제세계유산 따라걷기 - 공주편, 백제가 다시 강성해지다! [공산성,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국립공주박물관, 곰사당]
04-02 20180203~20180204 1박2일 백제세계유산 따라걷기 - 부여 상편, 백제의 위대한 여정 [정림사지 오층석탑, 장항리 3층 석탑, 대조사, 성흥산성 사랑나무]
04-03 20180203~20180204 1박2일 백제세계유산 따라걷기 - 부여 하편, 백제의 위대한 여정 [부소산성, 능산리절터, 능산리고분군, 국립부여박물관]
04-04 20180203~20180204 1박2일 백제세계유산 따라걷기 - 익산편, 백제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고도리석불입상]
첫댓글 1박2일 총정리 덕분에 백제문화 세계유산 여정을 그대로 다시한번 되새겨 보게 되네요
얼마 지나면 또 잊어버리겠지만 몸으로 익히면서 본것이라 여정이 생생합니다.
자연을 벗 삼아 걷는것도 좋지만 우리의 역사의 흔적을 살피며 걷는것 정말 좋습니다. 가야문화 답사도 참여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생각나지 않아도 몸이 익힌 것은 어딘가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예요.
다음 길에서도 뵐께요. ^^
'금동대향로' 살아 숨쉬는 듯합니다. 사진이 너무나 훌륭하여 더 큰 감동입니다. ^^
아효. 감사합니다.. 진품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백제 세계문화유산 걷기 여정 넘 좋아서
잘 모르는 가야 문화 찾아 걷기 더욱 기대됩니다~💓
괜찮은 여행이었다니 참 다행입니다. ^^
자주 뵙겠습니다. ^^
백제로의 시간여행 정말 잘 다녀왔습니다.
30년전에는 그곳이 소중한줄 모르고 지나쳤던 문화유산을 이번 여행에는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던 기회였던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고대사는 알면 알수록 정말 이야기들이 한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요... 올해는 고대사 관련 길을 더 많이 걷고프네요. ^^
애완견이 노견이라 많이 아파서 장거리를 피하다 보니 제 고향인 부여에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참여하겠습니다.
네. 회복되어서 다음에 꼭 함께 하시길 저도 바랄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