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이르러 조명발을 받게 된 단양 기생 두향(杜香)
황진이나 매창(梅窓) 등은 당대에도 이미 그 명성이 자자했고, 야사뿐만 아니라 주류 선비들의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린 아이돌(?)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올린 개성의 자동선(紫洞仙)이나 성종이 사랑한 소춘풍(笑春風)도 여러 야화집에 등장하지요. 그러나 단양(丹陽) 기녀 두향(杜香)은 당대에는 물론이고 조선 중·후기에도 그 자취가 비교적 미미한 편입니다.
물론 퇴계(退溪)의 제자나 그 후손들이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직시 사랑한 두향이라는 기녀가 있었다고 전하며, 잡초에 묻힌 그녀의 묘를 새로 단장하고 한시도 지어 올립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한 건 근대에 이르러 이은상 선생이 운을 띄우고, ‘자유부인’으로 유명세를 탄 정비석의 ‘명기열전’에 등장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읍니다. 수년전에 타계한 최고의 이야기꾼 최인호는 잡초에 묻힌 두향의 묘를 직접 찾아 나서면서, 대학자 퇴계 선생의 전기(傳記)에 양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요.
짧은 만남 긴 이별
死別己呑聲 生別常測測
죽어 이별은 울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지만
살아 이별은 더욱 슬프기 그지없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두향에게 써 주었다는 글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시는 두보가 이백과 헤어지면서 남긴 시(贈李白)의 일부입니다만..)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재
어느덧 술 다 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꼬
두향이 답하여 지어 올린 시조입니다.
(이 시조는 평안도 성천 기생 일지홍(一枝紅)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음.)
호에서도 짐작하듯이 퇴계는 벼슬에서 여러 번 물러나(退)고 다시 임금의 부름으로 상경을 거듭합니다. 48세에 마지막으로 지방관을 희망했는데, 그곳이 충청도 단양(丹陽)이지요. 바로 이곳에서 방년 18세의 두향을 만나 한눈에 반해버립니다(당시 선생의 두번째 부인마져 돌아가셔 독수공방 신세였음). 그는 단양에 재임한 기간이 채 1년도 안 되어 풍기 군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영영 이별하게 됩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퇴계 선생이 돌아가실 때 제자에게 매화 화분이 물을 주라고 하였다는데, 그 화분은 단양에서 함께 완상하던 걸 두향이 보내온 거라고 합니다. 선생은 평생 한시를 별로 짓지 않았는데, 매화에 대한 시는 여러 수 눈에 띕니다. 그 중 두향에게 보내준 한시,
黃卷中間對聖賢 누런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 텅 빈 방속에 초연히 앉아있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또 봄소식을 들으며
莫向瑤琴嘆絶絃* 마주한 거문고 줄 끊겼다 한탄하지 말라.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그를 알아주는 벗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고사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 연시 중 한 수 붙입니다
步屧中庭月趁人 뜰안을 걷노라니 달이 사람을 따르는데
梅邊行遶幾回巡 매화 곁을 에워싸고 몇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밤이 깊도록 앉아 오래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건
香滿衣巾影滿身 옷과 두건에 향기 그득하고 몸에 비친 매화 그림자 때문.
단양에서 두향과 헤에진 후 이십 여년간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그리는 마음에 밤잠을 설치고 매화 핀 뜰을 서성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주 먼 거리도 아닌데 평생동안 한번도 해후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두향의 묘
퇴계가 풍기로 떠난 후 두향은 관기를 그만두고 수절하다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강선대(降仙臺)에서 투신했다지요. 두향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선대 아래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숙종 때 이광려(李光呂), 퇴계의 10대손 이휘영(李彙寧) 등이 묘를 참배하고 시를 써서 올립니다. 여기에서는 송시열의 제자로 호조판서를 역임한 임방(任傍)이 단양 지방관으로 있을 때 지은 ‘두향묘시(杜香墓詩)’를 올립니다.
一點孤墳是杜秋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의 것
降仙臺下楚江頭 강 언덕 강선대 아래 있네.
芳魂償得風流價 향기로운 넋 풍류의 대가런가
絶勝眞娘葬虎丘* 절경에 그녀를 묻어 주었구나.
*虎丘는 중국 4대 미인 서시의 별궁터로 고래로부터 많은 기녀들이 묻히고 싶어 했다는 길지
이광려의 시에 ‘외로운 무덤 길가에 있다(孤墳臨官道)’ 고 했듯이 무덤은 길가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근년 충주호가 조성되어 수몰 위기에 몰리자 지방 유지들의 강선대 위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