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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할 수 없는 복음 롬1:16-17
내 용 :
어느 목사님이 아는 회사의 신우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러 갔답니다. 설교를 다 끝마치고 회장에게 그 회사에 다니는 자기 교회 장로님에 대하여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신우회 회장이 하시는 말이 "그 부장님도 교회 다녀요"라고 반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장로님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도 알리지 않았고 그런 냄세를 풍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다니기는 다니되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면서 성경을 노란 봉투에 넣고 옵니다. 성경 들고 가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조금은 발전된 것입니다. 부끄러워 아예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예수 믿고 부끄러워 할 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가서 밥을 먹는데 기도하고 먹는 것이 창피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먹기는 그렇고 기도하자니 창피하고 그래서 그냥 가방 속에 있는 도시락을 꺼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도시락을 꺼내어 먹었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까요?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그렇게 떳떳이 밝히지 못할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고 갑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학교 운동회에 갑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못났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워합니다. 주보 표지에도 썼지만 시골에서 보면 자신의 부모님이 다른 아이들 부모보다 조금 못하다 생각하면 운동회 오는 것마져 부끄러워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가 결함이 있으면 결혼식에 오는 것도 싫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랑합니다. 금이빨을 하면 이를 들어내 놓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손에 귀한 반지를 끼고 있으면 반지 낀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좋은 집을 사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당시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에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지혜와 문화를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로마의 권력 앞에 힘없어 나무 십자가에서 반역자로 처형된 예수님은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린도 전서 1:23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2.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까?-복음의 능력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부끄러워할 만큼 그렇게 가치없는 것입니까? 예수믿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복음이란 "유앙겔리온"의 번역어입니다. 기쁜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전쟁시에 사용된 말입니다. 요즈음이야 전쟁도 생중계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당시는 남편이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면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두달, 석달, 1년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전쟁터에서 소식을 가지고 온 전사가 성루에 올라가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성문 앞으로 모입니다. 그 곳에서 승전보를 알리는 이 소식이 유앙겔리온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패하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식은 자유의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요 승리의 소식이요 생명의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수치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사건이요 부활하심으로 생명과, 참자유와 평화를 주신 사건입니다.
이것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1)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의 권력정도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입니다. 파워입니다.
2)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양심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3)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가난한자, 부한자, 지식있는자, 없는자, 아름다운자, 추한자, 건강한자, 병든자, 아무리 마음이 강퍅한 자일지라도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복음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 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은 죽음의 속박에서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복음은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며 살게 만듭니다.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 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권력을 자랑하던 로마가 복음 앞에 힘없이 무녀졌습니다. 죄를 즐기며 타락한 인생의 늪을 헤매던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면 생이 바뀌게 됩니다. 막나니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죠지 뮬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열 살 때까지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사람이었습니다. 열네살 때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가고 더욱 잘못되어서 성격이 비뚤어졌습니다. 그래서 술 먹고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온갖 죄 짓고 형무소에 드나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주 나쁜짖을 했기 때문에 독방에 집어넣을 정도였습니다. 19살 때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해서 할레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여섯 나라의 언어를 능통하게 하는 훌륭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영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시편 68편을 읽다가 고아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2000명의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세계 42개국을 다니면서 3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다가 93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지존파가 천국파로 변합니다.
인육을 먹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지존파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저주하며 압구정동 야타족을 못죽인 것이 한이라고 하던 자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1471번 김현양은 변화되어 교도소에서 30명 이상을 전도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자신에게 넣어준 영치금은 전도한 사람들에게 주석 성경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형이 집행되는 날 할렐루야를 외치며 천국에 갔습니다. 서울 구치소가 생긴 이래 그렇게 감동과 은혜스런 사형 집행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형장에 벗어 놓은 흰 운동화에는 성경 두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말씀이었습니다. 3888번 기환군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먼저 가는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피해자와 그분들의 가족과 모든 분들게 사죄드립니다.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집은 교회 설립하는데 시신은 의과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겠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기키겠습니까? 살인자들이, 찌르면 피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변화가 됩니다. 양민 35명을 죽여 세상에서 최고 악당이 되겠다던 온보현, 대도 조세형이, 무엇으로 변화 되었습니까? 고귀한 철학으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세상의 권력으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가 됩니다. 얼었던 양심이 풀기기 시작합니다. 우울증에서 죽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 새 소망을 얻습니다. 절망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가정에 길이 열립니다. 사회가 변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돈으로도 안되고 권력으로 안되지만 복음으로는 됩니다.
이 능력의 복음을 누가 수치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복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복음이 천만금과 바꿀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3. 복음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합니까?-복음의 내용(왜냐하면으로 연결)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습니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까?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정적 선언입니다. 관계를 정상화하는 선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칭의입니다. 의롭다고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두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는 그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죄의식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댓가를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형벌에서 용서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해주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노력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4장 5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3장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 은혜받은 구절이고 이 구절에 근거하여 이신득의의 교리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것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사람들은 구원받은 길을 찾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숨겨져 있습니다. 놀라운 비밀입니다. 의롭다고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만큼 이 땅에 가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2)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되지만 이제 믿음으로 삶의 원리를 삶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율법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아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자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꾸 율법적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지 마십시오. 자꾸 자기의 고유한 기질의 원리에 따라 살지 마십시오. 복음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욕심의 원리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른 줄을 아라면서도 그 욕심의 고리를 끊지 못합니다.
조선일보 인기 만화 중에 '광수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실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가씨가 자기 친구를 만나서 "나 며칠 전에 약혼 파혼했다." 했습니다. "언제?", "한 일주일 전에 파혼했지. 시원치 않아서 파혼했다." 근데 가만히 친구가 보니까 여전히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어요. "너 그 반지는 왜 아직도 끼고 있냐?" 대답이 "다이아몬드에 대한 내 애정은 변함이 없거든."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에 대한 애정은 있고, 다이아몬드를 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새사람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습관의 종이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옛날의 미신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유교적 관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완벽주의 틀로 모든 것을 볼려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면서도 세상에 조금 그럴듯한 것이 있으면 그것에 홀립니다. 그리고 주님을 부끄러워 합니다.
어는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자신이 기독 실업인회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였답니다. 어는 병원 원장 장로님이 질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마술사가 왔었는데 텔레비전에 나와서 시청자들에게 숟가락을 하나씩 가지고 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으라고 하였답니다. 그 장로님 내외분도 마술사의 말대로 숟가락을 하나씩 가지고 텔레비전 앞에 앉으셨답니다. 그리고 그 마술사가 시키는대로 주문을 하였더니 그 숟가락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U자로 구부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숟가락 통에 잘 보관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 통 앞에 '쓸데 없는 짓'이라고 서 붙이시라고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학문이 있고 그럴듯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을 버리고 그것을 붙들 만한 것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복음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믿음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약점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되겠습니까? 과거의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 과거에 붙들려 살면 되겠습니까? 재혼한 여인이 끝까지 처음 남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첫사랑을 그리며 창문밖에 먼산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원리로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의 보십시오. 모세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살인자입니다. 야곱도,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불륜의 태어난 아들입니다. 다윗은 간음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반역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그 반역으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한 사람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약점에 그들은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새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저의 가정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
지난 주에 저의 아내가 새벽기도 끝나고 산에가서 밤을 주어 왔습니다. 산에 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금요일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만 가라고 한 두 번 주어 먹었으면 만족하지 계속가면 어떻게 되겠냐고? 분당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우리만 주어 먹으면 되겠냐고요? 다람쥐도 먹고 쥐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조금은 욕심을 버리고 믿음의 원리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그리고 부끄러움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부끄러워 할 수 없는 복음/로마서1:16-17/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