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은혜의 목적
하나님 섭리의 모든 다른 국면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보통 은혜의 궁극 목적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들 최종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만들어 내는 속성의 현시라는 궁극 목적에 종속해 있는 보통 은혜에 의해 장려되는 더 가깝고 특수한 목적을 탐구해야 한다. 특수한 목적은 하나의 목적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논의된 본문들에서 이미 보여졌던 명백한 하나의 가까운 목적이 있다. 보통 은혜는 특별 은혜나 구속 은혜의 목적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의 영화榮化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라는 긍극 목적을 차례로 갖는다.
하나님 구속의 목적은 이 세상의 역사 중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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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은혜로 마련되는 그러한 삶의 영역 또는 역사의 폭넓은 흐름은 구속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지되고 보존되는 이 세상은, 특별 은혜의 활동이 일어나서 하나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고 선택된 자들 전체의 완전을 성취하게 하는 장이며 발판이다.
보통 은혜는 특별 은혜로부터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특별 은혜는 보통 은혜에서 그 선결 조건과 활동의 장을 얻는다. 보통 은혜가 없다면 특별 은혜는 그 구조를 세울 재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다. 보통 은혜는 잘 짜인 구조물이 주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는 장과 재료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하나님께서 많은 은사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지지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세상 안에서 다양한 노동의 추구와 노동의 분야들을 통해 살아가는 인류가 구속과 중생의 은혜를 위한 신민을 준비해 놓는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따르지 않으시고 사람 가운데서 구속된 사람들로 그의 몸 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관점에서 하나님 구속의 목적을 바라본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더 넓은 역사의 장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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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은혜의 신민이 될 개인을 다룰 때조차도 우리는 그의 중생이 본래 그의 모습 그리고 중생 전 그의 모습과 완전한 결렬을 초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근본적인 도덕적 영적 변화는 있다. 그는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모든 삶과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영향력으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모습이 무효화되거나 버려지지는 않는다. 그의 정체성은 변화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셨던 많은 재능과 자질, 많은 은사와 소유물은 파괴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비록 그가 영적으로는 유아가 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전부 다시 유아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속 은혜의 영역 밖에 있는 과거지사와 과정에 의해 그의 독특한 개체성으로 형성되고 구형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지위를 행사하며, 하나님 나라에 거한다.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의 학생이었다는 것과 모세가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섭리의 계획 안에서 기획된 보통 은혜의 영역에서 기나긴 준비의 도정은 하나님의 종들 중에 가장 복 받은 종들을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야 했던 특별한 역할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실제 회심의 시점에 이르게 될 때, 회심에 포함된 믿음과 회개는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과 동떨어져 발생하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믿음의 재료가 되는 내용을 전달해 주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믿고 회개해 그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구원하는 믿음과 회개의 작용 이전에 율법과 복음이 지닌 의미에 대한 인지와 인식이 있음이 틀림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믿음과 회개 이전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가 우리 양심에 일으키는 직접 결과인 중생 이전에 존재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엄격히 성령의 구원하시는 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성령의 구원 활동을 예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도 속에서 사람을 믿음과 회개라는 지성적 작용의 선행 조건인 심리학적 상태에 놓아 두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그의 의식에 복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통각統覺의 내용을 마음속에 준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과 회개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구속 은혜와 다르다. 즉 비구속 은혜, 또는 보통 은혜 범주에 속해 있다.
보통 은혜의 활동에서 우리는 믿음의 현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은혜의 특별한 구원하시는 활동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른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있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 은혜의 활동 속에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선행 조건과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7) 개인적 영역과 유기체적 역사 활동의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보 과정은 선행된 준비들과 둘러쳐진 조건들과, 일반적인 하나님 섭리의 장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자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 경륜의 특별한 영역, 즉 그 자체가 명백히 구속적이지 않은 보통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준비들과 조건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결론으로 말하면, 보통 은혜는 특별 은혜의 활동 영역을 제공하고, 특별은혜는 보통 은혜의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 성취가 보통 은혜의 유일한 존재 근거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곧 의인들이 세상의 소금인 것은 사실이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는 예언자에 의해 표현된 원리를 세상의 역사라는 넓은 규모에 적용하는 것이 아마도 필요하겠지만, 밀 때문에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시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통 은혜의 전 목적은 특별 은혜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특별 은혜는 보통 은혜가 활동하는 전제 조건이지만, 보통 은혜의 목적은 특별 은혜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은 또 다른 사실의 존재 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 또 다른 사실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아닐 수 있다는 단순한 구별에서 알 수 있다.
보통 은혜로 조성되는 다른 목적이 무엇인지를 추단하는 것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모든 일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인자와 자비의 영광이 보통 은혜의 활동 속에 드러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궁극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일군의 세분된 까닭들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목적 안에 포괄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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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7) 이와 관련해서, 여러 종류의 전도와 선포를 통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그 자체로 보통 은혜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행위와 말씀 안에서 특별 계시의 산물이다. 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중생과 믿음 이전에 진리의 내용이 의식의 소유물이 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서 작용들은 그 자체가 구원 은혜가 아니며, 따라서 보통 은혜에 속한다는 것이다.
* ‘존 머레이 {조직신학 ②}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제10장: 보통 은혜]에서. *
* 배경색은 제가 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