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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장
1. 교훈의 목적(1-7)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포함하여 ‘목회서신’으로 분류된 성경입니다. 목회서신으로 분류한 것은, 사도바울이 문제가 발생한 교회를 위하여, 디모데를 남겨두고 그에게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 교회에 가르쳐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를 목회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기에, ‘목회서신’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서신이라고 해서,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내용이고, 또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경계로 삼아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당시 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까지 왔었지만,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데와 계속 동행하지 못하고, 에베소에 남겨 두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의 미혹이 있었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신실한 동역자로 여기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서 교회를 가르치고, 그들을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이란 예수님이 오셔서 교훈한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훈한 것은 복음입니다.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가르치신 내용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이며,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다른 교훈이 에베소교회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지만, 다른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의 본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교회에 있어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가던 디모데를 남겨서, 에베소교회를 지도하고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교훈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아니고,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4절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신화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 단군신화’라는 것이 있고, 2002년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올랐을 때도, ‘4강 신화를 이루다’라는 말을 많이 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 TV에서는 ‘신화창조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화라는 말은 인간이 한 일, 곧 업적을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끝없는 족보라는 것은, 조상의 위대한 인물과 자신을 연결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부각하고자 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곧 사람들이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나의 조상 중에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있었음을 나타냄으로써, 그 가문에 속한 자신의 위대성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 경쟁하며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가문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가문과 전통을 중시합니다. 구약의 인물을 두고 가상적 족보를 만들어, 자신의 가문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랍비들은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의 스승의 족보까지 따집니다.
결국 신화와 족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위대함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기에, 교회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두고, 그에게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편지를 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위대함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신화와 족보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과 변론만을 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기에, 구원받은 자가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서 위대한 자로 높임 받는, 모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해도, 모세가 자신의 후손의 죄를 씻어주고,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 죄인으로 죽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후손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역시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가 몇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자랑을 하기도 하는데, 그처럼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쓸모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좀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자랑거리를 삼아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본성에 치우쳐 살아갑니다. 그런 자랑거리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내가 타인보다 좀 더 높으며 낫다는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신화와 족보에 몰두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교회가 버려야 할 것 중 하나이며, 교회로서 전혀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5절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를 남겨서 그런 것에 대해 경계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경계의 목적은 사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사랑이라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 헛된 것이고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6-7절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나타나고 맺어져야 하는 것은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을 높이 세우고, 자랑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랑은 보이지 않고, 변론과 다툼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것도, 사랑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선생은 율법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고 판단하고 비판하기를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타인을 판단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책망을 받고,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하기 위함인 것을 알지 못하고, 타인을 가르치려고만 한 것입니다.
성도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가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은 변론과 다툼과 판단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신 사랑의 실체를, 자기 백성을 세워서 그 열매로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서로 모이게 하는 것인데, 성도가 서로 모여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데 힘을 소모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초라할 수밖에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쓸모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신을 잘 알았기에, 우리가 볼 때 많은 일을 했으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것입니다. 곧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관계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내가 오해 받고 자존심이 상하고, 남보다 못난 자로 여겨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맺어지지 않고, 다툼이 나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 못난 자로 전락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너짐으로 인해서, 대신 그리스도가 세워진다면, 나의 무너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은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을 나타내고 복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무엇이 세워지는가를 살피기 바랍니다. 사랑인지 아니면 무익한 변론이며 다툼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날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내세울만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를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잊지 말고, 쓸데없는 일에 힘을 소모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가 세워지고, 사랑이 맺어지는 길에 서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2. 율법은 선한 것(8-11)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자 한 것은, 에베소에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교시가 등장하여,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한다는 지적을 합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율법으로 타인을 지적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은 변론이며 다툼일 뿐이지, 사랑은 아니기에 헛된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8절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율법을 적법하게 쓰는 것은 율법의 용도, 율법의 목적에 맞게 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럴 때 율법은 참으로 선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은 선한 것이기에, 율법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은 선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악한 변론이나 다툼과 비판과 판단이 맺어진다면, 그것은 율법을 적법하게 쓰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나쁜 습관은, 타인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지적하고 책망하고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은 감추고 싶어 하면서도,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드러내고 공격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습관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습관에 의해서, 선한 율법을 적법하게 쓰지를 못하고, 나 자신이 율법의 선생이 되어 지적하고 파헤치면서, 헛된 변론과 다툼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말씀을 도구 삼아, 타인을 지적하고 다스리려고만 할 뿐, 정작 나 자신이 말씀에 의해 책망 받고 다스림 받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면, 항상 말씀에 의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남을 비판하고 지적하고 판단하고 책망할 자격이, 나에게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스림 받는 것이 없기에, 항상 타인의 것만 파헤치는데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의 간섭을 받고 있는 흔적이 뭐겠습니까? 보지 않던 성경을 보게 되고, 안하던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분명하고 뚜렷한 증거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실수와 잘못만을 보던 눈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타인을 책망하던 책망이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 이것이 말씀의 간섭을 받고 있는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교훈의 목적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들이 과연 사랑이 맺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를 항상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성도가 율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 복종하지 않은 자, 경건하지 않은 자 등, 곧 죄인들을 위해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 죄인들을 위해 율법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고 책망하기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옳은 사람 앞에서 율법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 앞에서 자신은 옳은 사람으로 세우기를 즐겨하고, 항상 자신의 옳음에 못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용도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선생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을 세우기 위해 법이 주어진 것이지, 잘못을 파헤치고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에게서 율법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나 자신이 믿음에 있지 않고,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3:8-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이 어렵다고 해서, 도움을 주는 그런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없는 것 자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보일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비난의 대상인 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악한 자임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은 본성과 속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가 누구보다 덜하고 더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서 끝없는 비판과 변론이 나는 이유는, 이러한 자신의 악함은 전혀 보지를 못하고 타인만 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단지 스스로 인정하는 믿음일 뿐,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선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입에서, 비판과 판단과 책망의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 안에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힘써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날마다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는 게을리 한 채, 단지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고,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내 입술에 있다고 해서, 마치 믿음에 옳은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법을 법대로 쓰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법의 선함은 타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법은 여러분을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법에 의해서 자신의 옳음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자구적 시각에서 법을 바라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법은 여러분 자신을 책망하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용서의 은총을 바라보게 합니다. 용서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한순간도 생명에 거할 수 없는 악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면서, 은혜와 긍휼에 감사함이 있게 합니다. 이처럼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자에게서, 비판과 판단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2절에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이 행한 비판은 타인을 향한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으로 되돌아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은 옳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옳은 자인지를 타인에 대한 비판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이 비판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입니다.
11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인데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소식입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맡은 자이며, 오늘 여러분이 이 복음을 맡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께 영광의 복음을 맡기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광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지식을 가진 자로서, 복음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증거 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이며, 사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3. 내가 감사함은(12-15)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율법을 율법의 목적대로 쓴다면, 율법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하는 악한 모습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불의함을 보게 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선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율법을 적법하게 쓰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잣대로 하여 타인을 판단하는데 더 빠른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율법으로, 타인의 신앙을 간섭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누구든 율법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살아가는 자이지,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설교하는 자의 위치에 있기에, 목사를 ‘가르치는 자’로 여길 뿐, 실상 말씀에 대한 ‘선생’은 아닌 것입니다.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관계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받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를 서로 나누는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성령의 교제, 또는 성령의 교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 알게 하신 분은 성령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령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아 알아가는 위치에서 만나고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선생은 없는 것인데,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가 등장을 하는 것은, 그가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1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곧 바울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셨기 때문이지, 바울이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음을 맡기신 결과입니다. 복음은 학문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가르쳐서 알게 할 수 있는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상세하게 복음에 대해 가르친다고 해도, 그 가르침 때문에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다만 복음의 내용을 전달할 뿐, 깨우쳐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기에, 목사도 선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맡겨진 직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시 하나님이 여러분께 맡긴 복음을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모든 자에게 주어진 직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2-13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주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맡겼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직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맡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인 것입니다. 바울의 직분은 교회에서 안수하여 세운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성도에게 있어서, 참된 직분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직접 여러분께 맡기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께 복음을 맡겼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러분께 복음을 맡긴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자로 세웠다는 것이 바울의 얘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직분 맡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13절의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무지 복음을 맡아 전할 자격이 없는 자신을, 긍휼히 여겨 복음을 맡기신 것이 넘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도저히 복음을 맡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말합니다.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이 복음을 맡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 주어진 것은, 전적으로 복음의 능력인 것이지, 자신의 실력이 아니란 것입니다.
곧 자신이 옛날 복음을 박해하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지식을 가르치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복음의 능력이 자신을 붙들어, 바른 진리로 이끌어 간 결과이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 결과인 것이지, 자신의 실력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알게 된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알게 된, 지식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는 절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성경 내용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아들은 이삭이고, 야곱의 아들이 열두 명이다’는 식의 지식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으로는, 천국 근처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주께서 맡기심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복음을 맡을,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폭행자고 박해자고 비방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나에게 복음을 맡기셨다는 것이 놀라운 긍휼이고 은혜이며, 그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긍휼을 입게 된 이유를, 예전의 악행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행한 것들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합니다. 곧 모르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봐준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르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봐준 것일까요? 그렇다면 ‘몰랐다’는 말은 면죄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믿지 않던 모든 자들이 ‘몰라서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몰랐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면서 창조주를 모른다는 것은 멸망의 죄일 뿐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박해할 때는 그것이 믿음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고 섬김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바울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백성인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도리어 긍휼을 입히심으로,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악행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도 없는 악행자였음을 말함으로써, 복음에 있어서 자신을 선생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깨달음으로써,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의 풍성, 사랑의 풍성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기도원에 가서 소리쳐 기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알게 되고, 그런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깨달음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우리의 열심도 노력의 결과도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긍휼을 입은 자를 붙들어 이끌어 간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누구라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지칭하는 것은, 그토록 자신은 복음을 맡을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복음이 주어지고,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게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며, 복음의 능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였습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실력이 아님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 앞에서 아무 실력이 없는, 무능하고 연약하고 그저 불의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성도로 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을 복음의 자리에 나오게 하신 은혜와 긍휼을,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십시오. 그것이 바른 교훈이며 하나님의 영광된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알게 될 때, 나 같은 자가 복음을 알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풍성한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라고 해서 감사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됨으로써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께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진노의 대상에 불과한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귀한 복음을 맡기시고, 그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알 것이고 감사함이 넘칠 것입니다.
4. 긍휼을 입은 까닭은(16-17)
사람들은 세상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이 악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딸을 가진 부모는 항상 불안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딸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악함으로 인해서, 나같이 착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는 의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왜 문제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악한 것이 곧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고, 그 악한 인간 속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만 있을 뿐, 악한 나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죄인이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자신의 악함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과연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린 항상 그런 외식적인 고백으로 일삼으면서, ‘나는 죄인이다’고 고백하는, 내가 믿음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서도,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다’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는 의식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5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의와 착함으로는 천국 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전부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착함과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육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온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시간이 남아서 심심해서 나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적당한 종교 하나 골라서, 살아서는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겠다는 욕심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죄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그 마음하나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만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의 실상을 알게 된 바울은, 자신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말을 보십시오. 바울의 관심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입니까, 아니면 교회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비방자요 폭행자요 박해자였던 자신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은,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곧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도, 긍휼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긍휼을 자신이 누리는, 삶의 질에서 맛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하는 것, 곧 소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믿음이고 열심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삼으신 것에서 긍휼을 맛보고,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입은 것으로 인해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증거 할 것도 긍휼밖에 없는 것, 이것이 긍휼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을 얘기합니다. 이것으로 바울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도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얘기할 때는, 긍휼로 인해 자신이 누릴 혜택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 긍휼 받았다. 나 천국 간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입은 자신에게 주어질 혜택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입히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된 믿음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 진실 되고 참된 믿음에서 얼마나 멀어진 자로 살아가는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당신은 왜 항상 우리의 믿음에 시비를 거는가?’라는 반발이 있기도 하겠지만, 목사인 제가 할 일은 여러분에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믿음, 진실 되고 생명이 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로 인해서 증거 되는, 진실 되고 참된 믿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비해서 너무 다른, 그러면서도 무엇이 다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대개 말하는 것은, 바울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를 전했던 것, 곧 전도, 선교의 열심을 본받자는 것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조금 열심을 내면, 그것이 바울을 본받고 있는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던 바울을 보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므로,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그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 대해 오래 참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곧 바울이 기도한 것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도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바울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히셔서, ‘나의 구원은 나의 힘이 아니라, 나에 대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의 긍휼로 인함이다’는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누가 믿음이 있는 자고, 영생을 얻은 자인가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에게 긍휼을 입히시고, 바울을 세워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긍휼을 입어 영생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고백과 감사함이 있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긍휼 앞에서, 우리가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오로지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히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입었음을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 대해 오래 참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진노의 자식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진노로 대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셨기에,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사한다면, 이 감사가 여러분께 있다면, 여러분에게서도 오래 참음이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곧 예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심이, 형제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 하나 옳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그 즐거움과 감사함만으로도,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은 무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감사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이다. 아멘.”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예전에 자기 열심으로 살았던 때에 없었던 찬송이, 긍휼을 알게 됨으로써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베푸신 일에 대한 성도의 반응이며, 그것이 곧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누가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듭니까? 바울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평생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힘으로 믿으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은혜를 감사함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한다면, 사실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만으로, 충만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곧 성도에게는 충만이요 만족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복음의 능력이고, 긍휼이 입혀진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괴수에 불과한 바울을, 찬송하는 자로 고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인간의 것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베푸신 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선한 싸움(18-20)
고전 1:28-29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의 말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육체적 조건이라고 해도, 곧 문벌, 가문, 능력, 지혜 등등,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조건을 기준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지 아니하셨고, 성도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1절에서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옷을 입고자 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번듯한 자로 보여주는 것을, 인생의 한 재미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인생의 즐거움이 되어 있을 때, 그를 행복하다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일컫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예전에 입고 있던 육체의 모든 것들이, 냄새나는 배설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자, 남은 것은 죄 밖에 없는 자신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이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죄인의 괴수에 불과한 자신에게,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긍휼이 참으로 놀랍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라도록 있을지이다. 아멘”이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산다면, 그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도라는 이름만 걸치고 교회를 왕래할 뿐, 성도의 맛은 알지 못한 상태일 뿐입니다. 성도가 성도의 맛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깨닫게 된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자신의 죄인 됨을 마음 속 깊이까지 발견한 자에게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다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악함과 죄를 보게 함으로써, 죄인에게 넘치는 긍휼을 보도록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는 종교적 행위를 의로운 것으로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의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훈이며,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이러한 다른 교훈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 바로 다른 교훈과의 싸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교훈과의 싸움은 필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20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말을 합니다.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을 교회에서 출교했다는 말로 이해해 본다면, 바울은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기 위해, 교회가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착한 양심은, 세상이 칭찬하는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향한 눈이 뜨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체와 세상의 현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이 왜 악한가를 알게 하시고, 인간이 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구원의 길이 되시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이 양심을 버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에게 힘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라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이 파선된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아무리 관심을 두어도, 그것이 돈이 되어 되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오로지 자기 유익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교회의 구별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관심두지 않은 예수님께 모든 관심과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치 있다 여기는 것에 대해 헛된 것으로,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기며, 그리스도만이 영원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 유익을 꾀하며 예수를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며,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에, 단지 예수라는 명칭만 삽입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교훈이라고 말하며, 교회는 이와 같은 다른 교훈을 물리치는 선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현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말씀을 통해 가능합니다. 세상 현실이 제대로 보일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덕분에 성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것이 세상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모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리스도께 나옴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세상의 유익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정작 그리스도께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멸망의 현실에서 구원된 자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수고하시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어도, 내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좀 더 나은 환경과 형편을 위해, 그리스도를 찾는 것 자체가 진리를 벗어난 것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른 교훈이라는 것을 당부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당부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싸움을 교회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다른 교훈에 미혹되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진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경계할 것도 싸워야 할 것도 없게 됩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교회 부흥에 유익이 된다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교회를 바라보는 믿음에 파선된 모습인 것입니다.
진리는 사망에 처한 자를 건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처한 것이 자신의 현실임을 깨달은 성도에게만, 진리가 진리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성도의 부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리는 이방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일 뿐, 성경은 그러한 진리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것이지, 교회의 부흥과 예수를 믿는 자의 부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진리가 아닌, 교회 부흥과 믿는 자의 부를 위한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다른 교훈인 것이고, 교회는 그러한 다른 교훈에 대해서는, 진리의 원수로 여기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양심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교회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싸워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육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로 나아가는 것에 쉽게 미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보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말하는 것보다, 교회 부흥을 강조하고, 부흥을 위해 힘을 쓰면, 분명 눈에 보이는 성과가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육체로 나아가는 것에서, 믿음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되면, 내가 곧 신성을 모독하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교회로 모이지만, 실상은 내가 사탄에게 내어 줌을 받아야 할, 신성을 모독한 자일 수 있음을 명심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육체를 따르는 자, 곧 믿음에 파선한 자로 모인다면, 결국 우리에게서 맺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서로 선생이 되려고 하는 분란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로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마음에 안든다는 불평, 누구누구가 어떻다는 비판을 하는 것만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말씀 위에 서 있는 것만이 교회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말씀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지, 교회를 바라보게 하고, 육체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경계하고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며, 이러한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