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시대 / 양선례
나는 물에 빠진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옆에는 빨간 갈비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방학 때 점심시간이면 행정실 직원들과 학교 주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지만 그곳을 간 적은 없다. 갈비탕 외에도 설렁탕이나 곰탕도 별로다. 메뉴라고는 그것 하나뿐인 식당이면 어쩔 수 없이 시키지만 대체 메뉴가 있다면 절대로 시키지 않는 음식이 바로 물에 빠진 고기류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음료를 마신다. 신나게 운동했거나, 땀 흘리고 나서는 한 잔의 냉수나 맥주도 즐긴다. 가장 못 견디는 건 식어버린 국이나 미적지근한 물이다. 아예 뜨겁거나 차갑거나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은 맘에 들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 주장이 별로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잘 맞춰주면서 정작 자기 속은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이와는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모두와 두루 친한 듯 보이지만 실은 마음을 주지 않은 채 나중에 다시 만나면 외면하지 않을 정도의 그저 형식적인 인간관계만 맺는다.
오래 전 한 학년에 8반이나 있던 큰 학교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학년 친목을 맡았다. 말로 사는 직업인지라 2교시가 끝나면 배가 고팠다. 친목은 그때 모이는 동학년 선생님들을 위해 미리 걷어놓은 회비로 빵이나, 떡, 과일, 차를 준비하는 일을 한다. 비닐만 뜯어 그냥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빵을 썰어 접시에 담거나, 껍질을 벗겨야 하는 과일도 있었다. 거기다 8잔의 차를 타는 일도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 늦게 오는 동학년 선생님을 챙겨야 했다.
지금처럼 교실 안에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을 때라 시간 맞춰 물을 떠오거나 다 마신 컵을 씻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쪽에선 개인의 취향에 맞추어 차를 타고, 다른 쪽에선 미리 준비한 간식을 자르거나 담아야 했다. 그런데 나보다 2년 선배였던 한 언니는 바빠서 종종거릴 때마다 멀찌기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두어 달 참았을까. 어느 날 같이 하면 안되겠느냐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 나는 차 마시는 일도 간식을 먹는 것도 안 좋아해.” 이런다. 이미 결혼한 나와는 달리 아직 미혼이었던 그 언니를 보고 저래서 데이트나 하겠느냐고 속으로 흉을 봤다. 성격도 조용해서 남에게 피해주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일 년 내내 그 언니가 얄미웠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심심한 성격도 한 몫했다.
아이들과도 그랬다. 나는 웃음이 많고, 목소리가 크고, 주장도 강해서 뭐든 일단 시작해보는 편이다. 그래선지 학급 담임일 때 너무 조용하고 얌전해서 존재감 없는 아이들과는 친해지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은 대개 학습과 생활지도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기 할 일을 잘 해내는 아이들이라서 대다수의 선생님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좀 소란스럽고 주장도 강하며 개성이 강한 아이들과 친할 때가 많았다.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보다는 전년도 담임에게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올라온 아이들이 오히려 나와는 합이 잘 맞았다.
‘긍정의 아이콘’도 내가 가진 별명 중 하나이다. 며칠 전 동료 교직원 한 명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일차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바로 옆을 달리던 트럭이 그대로 차를 밀어버린거다. 너무 놀라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긴박한 순간에도 운전대를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리 재수가 없느냐고 하소연했다. 운전을 하는 동안 내가 아무리 주의해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있다. 그렇게 큰 사고였는데도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 아니냐고 위로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조금 위안이 된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 위험은 항상 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던 자살자가 하필 그 시간에 지나가던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져서 길을 가던 행인이 중상을 입거나, 철강 코일을 싣고 가던 트레일러의 급정거로 앞차에 탄 일가족이 몰살당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왕 벌어져 버린 일 부정적으로 생각해 봤자 스스로를 생채기내기 밖에 더하랴. 같은 상황인데도 해석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지인들은 이제는 내 말을 못 믿겠다고 한다. 내게서 좋은 관리자라고 들었는데, 막상 근무해보면 그렇지 않다고 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 모두에게 점수를 너무 후하게 주는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또 나는 게으르다. ‘일상의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지금껏 여러 편 글을 썼지만 일찍 써서 올린 적이 없다. 마감 시간에 맞춰 겨우 쓰거나 넘기기도 일쑤다. 작년 하반기에 글쓰기를 함께했으나 이번 학기에는 등록하지 않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일주일 내내 고민하다가 휴일에도 머리 싸매고 끙끙 앓는 게 너무 힘들어 관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글감을 받고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마감 시간이 되면 어떻게라도 써지겠지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크다. 물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일도 여러 번이긴 하지만 말이다.
조금씩 미리미리 준비해두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마음도 여유로울 거라 예상은 되지만 한 번 잘못 들인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리 해 와서 오히려 지금은 더 편하기도 하다. 긴 보고서를 쓰거나, 학교 교육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때도 할일 다하고 여유있게 잘 놀다가 딱 닥쳐서야 일을 시작한다. 그런 날이면 새벽까지 밤을 새는 일도 허다하다.
교육대학은 전 과목을 가르치는 초등교사를 양성하기에 평가에 실습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미술 시간에는 벚꽃 내리는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제출했다. 체육 시간에는 철봉에서 거꾸로 오르거나, 뜀틀 위에서 앞구르기 등의 실기시험을 본다. 또 방학에는 일주일 동안 전남체고 수영장에서 수영 실습을 한다. 실과 시간에 구정 뜨게실로 테이블보 뜨기 과제가 있었다. 타고난 손재주도 구정 뜨게실을 만져본 적도 없어서 실과 바늘만 사다 놓고 한 달이 지났다. 마감 며칠을 남겨두고 밤을 새서 벼락치기로 작품을 냈었다.
뇌과학자들은 우리의 뇌도 쓰면 쓸수록 개발이 되어 40세에서 65세 사이의 중년에 이르러서야 두뇌의 절정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뇌세포는 절대 새로 생기지 않으며 나이들어 갈수록 줄어들기만 한다는 기존의 생각과 달리 쓰면 쓸수록 개발된다는 가소성의 원리는 새로운 뇌과학과 두뇌 개발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중년이 되면 기존에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연결하여 판단력, 종합능력, 직관력, 통찰력, 어휘력, 위기 관리 능력에서 20대 젊은이가 따라올 수 없는 가장 우수한 뇌가 된다고 한다.
지인들은 나를 보고 호불호가 분명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뭐 어떠랴.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의 이런 자유는 맘껏 누려도 좋지 아니한가. 나는 지금 이생에서의 가장 우수한 뇌의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첫댓글 비록 늦게 올리기는 하나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점이 경이롭고 존경스럽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야 두뇌 회전이 잘 되는 것은 스스로 걸어놓은 마법인 듯합니다. 미지근한 물은 가라! 물에 빠진 고기는 싫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하,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음식 메뉴를 고를 때도, 여행지를 정할 때도 주장이 강하니 피곤한 일이지요.
응원 고맙습니다.
재미있는 선생님 글을 이번주는 읽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고맙습니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막바지에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을거예요.
물에 빠진 고기도 맛있답니다. ㅎ ㅎ ㅎ
네. 이번주는 초안은 토요일 밤에 써 두었는데 일요일 오후에 집에 우환이 생겨서 겨우 마무리를 지었답니다.
황선생님 가게의 물에 빠진 고기는 맛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언제 한 번 주문할게요.
느낌있는 글, 재밌게 잘읽었어요~ ^.^ 글은 이렇게 ㅎㅎ
칭찬 감사.
이번 글은 좀 엉망이예요.
옛날 꼰날 이야기 우려먹네요. 하하
선생님 글 수업 들으며 읽었는데, 이름이 같아서일까요?
어쩜 저를 나타내는 글쓰기라고 할 정도로 닮았어요.
물에 빠진 고기 싫어하는 것, 사람 관계에서 호불호가 분명, 오지랖 넓은 행동, 손재주 없는 것 등등 하하.
가까운 거리에 살면 종종 만나 차 마시고 수다 떠는 합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오우~~
그럼 '선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러는 모양이죠? (일반화의 오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떨며 차 마시기랍니다.
언젠가는 그럴 날 오겠지요.
그때까지 우리 글쓰기 공부 열심히 해 보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