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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今日という日のうち。
본문 / 히브리서 3:7~14
히3:7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9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 세대에게 분노해서 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미혹되어서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 11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12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13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4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7. だから、聖霊がこう言われるとおりです。「今日、あなたたちが神の声を聞くなら、8. 荒れ野で試練を受けたころ、/神に反抗したときのように、/心をかたくなにしてはならない。9. 荒れ野であなたたちの先祖は/わたしを試み、験し、/四十年の間わたしの業を見た。だから、わたしは、その時代の者たちに対して/憤ってこう言った。『彼らはいつも心が迷っており、/わたしの道を認めなかった。』11. そのため、わたしは怒って誓った。『彼らを決してわたしの安息に/あずからせはしない』と。」12.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のうちに、信仰のない悪い心を抱いて、生ける神から離れてしまう者が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13.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一人、罪に惑わされてかたくなにならないように、「今日」という日のうちに、日々励まし合いなさい。― 14. わたしたちは、最初の確信を最後までしっかりと持ち続けるなら、キリストに連なる者となるのです。―。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축복에 대해서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의 가문, 그 집안에 속한 것은 곧 영생하는 축복의 자리에 속한 것입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 영생의 집안에 살고 있는 것은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집안에 속한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육신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어떤 혈통에 속해 있더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그 집안에 속한 영생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일상을 살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형제와 자매가 되어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믿음의 자리에서 스스로가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서로 격려하고 권면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의 내용을 인용하시는데요. 시편 95편 7-11절의 내용입니다. 원래 이 시편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릴 때 낭독하던 구절의 일부입니다. 시편 95편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기를 권면하고 독려하는 시편의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내용인데요.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배하는 시간이 그다지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겠지요. 그런데 실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더라도 예배 그 자체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며, 예배하는 시간은 귀중한 시간임을 성경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던 믿지 않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은혜이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의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투사하거나, 즐거움을 표현하는 공연과는 그 의미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한 일반적인 종교에서 소원을 빌거나, 액운을 막기 위한 특이하고 독특한 기복적인 행위와도 완전히 구별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 행사와 제사를 통해서 자기 소원의 성취를 빌거나, 혹은 문제 해결, 악한 것을 제거하려는 주술과 같은 일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하는 삶을 살면 주님께서 나의 소원을 아시고 응답해 주시지요. 문제도 해결해 주시며,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민원창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세상을 창조하시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하는 시간이며, 우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부르심과 응답이 교차되는 순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교회 예배의 순서에도 주님의 부르심과 그에 응답하는 우리의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단란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식사를 할 때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서 대화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공적인 예배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찬양과 말씀, 기도로 간략히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이 “그러므로,”(7절)라고 시작하는 것은 앞선 내용을 이유로 해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불리고,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예배하는 것으로 반응하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자이기에 지켜야 할 어떤 종교적인 의무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구원에 속한 하나님의 가족은 예배로 하나님과 소통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이들은 예배가 아니면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배의 시작을 여는 시편의 후반부에 기록된 내용이 오늘 본문의 7절~11절에 인용된 구절이지요. 주목하려는 표현은 먼저 8절, “너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의 시편에는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기록하면서 ‘므리바’와 ‘맛사’라는 지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지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역사적인 하나의 장소를 부르는 두 개의 이름입니다. 이 장소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적인 어려움, 즉 물이 없음으로 불평과 불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다 결국 문제가 해결되었던 경험을 하였는데요. 그들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고 의심하였습니다.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어도, 다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겹쳐질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 주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인간은 의심하고 세상의 지식과 세계관에 휘둘리는 것이지요. 예배하는 것을 거절하고 멀리하려는 마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예배를 소홀히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미혹”되었다(10절)고 말합니다. 미혹된다는 말은 원어의 뜻으로 보면 “속이다”, 혹은 “방황하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속는 길로 들어서서 결국은 길을 잃고 헤매며 방황하게 된다는 뜻인 것이지요.
그래서 10절 마지막 문장에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요. 마치 선배의 오답노트를 통해 나는 정답을 기억하고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오답노트를 남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길의 바른 방향을 찾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배우고, 포기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또한 세속에 굴복하기 보다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이 구절에서 번제와 다른 제사란… 하나님께 예배하는 형식만을 갖고, 결국 자신의 목표인 전투에서의 승리를 꾀하는 사울의 그릇된 대의명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어떤 대단한 행사보다 실제로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 어귀에서… 즉 어떤 광장이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에서 보란 듯이 소리 높여 종교적 퍼포먼스를 보이며 세력을 과시하려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품격 있는 태도로 주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대중식당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기품이 있게 식사기도를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에 신경을 쓰느라 마음이 미혹되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하는 자의 길에서 벗어나 헤매며 방황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말하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란 곧 미혹된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단지 믿지 않는 것은 악인과 죄인의 태도니까, 반드시 믿어... 믿는 척이라도 해야 저주받지 않고 멸망하지 않아… 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런저런 사인을 주시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경험들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신앙간증이란 그 간증을 고백하는 이에게 직접 벌어진 사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3절에는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만큼의 일상이라고 다시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루에 하루만큼 주님 앞에 삶을 쌓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매일 고백하고 일기에 적어 놓고 있습니다. 어제 적었으니 오늘은 적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가끔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 하루만큼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원래 기록은 출애굽의 여정을 기록한 신명기에 등장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만나는 하루에 한 번 하루만큼의 분량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침에 거두어 들인 만나는 그날 모두 소비하고 먹지 않으면 다음 날에 썩어 버렸지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 (출 16:19-20)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1)
우리에게는 하루라는 삶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적인 공간은 오직 하루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이다. 오직 하루만 살기 때문이다. 어제는 지나버린 하루이고, 내일을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하루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서 사라져 버렸기에 없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루만 존재한다.
우리는 하루살이이다.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인데요. 실은 우리의 영적인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오늘’이라고 하루만큼의 삶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격려하고 독려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불행해지고,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우격다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군중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흐름에 휩쓸리기 쉬운 뇌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적 실험이 있는데요. 횡단보도를 건너던 세 사람이 중간에 멈춰 함께 하늘을 응시하면 지나던 다른 사람들도 같은 보게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반응은 누군가 다수의 사람들이 주변에서 분위기를 만들면 그에 편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떤 숲속에 낮잠을 자던 토끼가 갑자기 귀에 들린 큰 소리에 놀라 뛰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다람쥐가 덩달아 뜁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아기 사슴도 함께 뛰지요. 그 뒤로 너구리, 오소리, 여우, 아기 멧돼지 등등 숲 속의 모든 작고 큰 동물들이 덩달아 뛰기 시작합니다. 왜 뛰어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숲 속의 질서를 잡기 위해 범이 나서서 한 마리씩 뛰는 이유를 묻습니다. 멧돼지 뛰니까… 여우가 뛰니까… 그러다가 토끼가 뛰니까… 범은 토끼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뛰어 가느냐고.. 토끼는 말합니다. 내가 자다가 숲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러자 범이 모든 동물을 데리고 토끼가 낮잠을 자던 나무 아래로 가 봅니다. 커다란 도토리 하나가 덩그런히 놓여 있습니다. 자다가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에 머리를 맞은 토끼가 착각하고 뛰던 것에 온 숲속 동물들이 자기도 모르게 미혹되고 심지어 선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속의 가치관이 우리를 속이고, 미혹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여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게 급히 분주하게 뛰도록 몰아세우려고 할 때 분별력과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독려하며 권면하여 나의 영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루에 하루만큼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듯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분명한 시선과 가치관으로 살 때 생기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뚜렷하고 또렷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열려 있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함으로 하루에 하루만큼 주님 앞에 영생을 사는 인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하며, 열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기억하며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권세이며, 유익한 축복인 것을 믿습니다. 예배자의 삶은 하루에 하루만큼 자라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과 평강을 누리는 안전한 길을 걷는 여정입니다. 이런 예배자의 삶이 너무도 신비롭고 놀라운 인생임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현실의 미혹에 흔들려 그 축복을 제대로 실감하며 체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며 독려하여 지지대가 되어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며,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영생의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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